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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97-1:유진(1629-1629.10.23)
작성자장병창 @ 2013.08.01 20:23:41

  예천고을원 97-1 : 유진(1629-1629.10.23) : '위민영농기'에서 신농법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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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柳袗, 1582~1635)은 1629년(인조 7)에 이정혁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같은 해 10월 23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안동 사람,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岩), 본관은 풍산, 영의정 서애 성룡(成龍)의 셋째 아들, 여․단의 동생, 정경세와 장현광의 제자이다. 임진왜란(1592) 후 아버지에게도 글을 배웠다.

  22세에 향시에 합격, 부모 사후에 유학으로서 1610년(광해군 2)에 식년 진사시에 1등 1위로 합격하였다. 1612년 해서 지방에서 김직재의 역옥이 일어났을 때 무고를 당하였는데, 6월 22일에 유진이 자신의 억울함을 진술하기를, ꡒ저는 역적 괴수의 얼굴도 성명도 모르는데, 제가 진사시에 장원으로 올라 이름이 민간에 퍼졌으므로 역적의 괴수는 필시 알고 무고하였을 것입니다ꡓ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ꡒ유진을 놓아보내고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게 하라ꡓ라고 하였다.

  1616년에 천거되어 세자익위사 세마가 되었고, 인조반정(1623) 후 42세에 봉화 현감, 영주 군수로 부임하여 그 치적이 도내에 최고였기에 형조 정랑(1624년 12월 22일)이 되었다.

  그 후 청도․합천 군수를 거쳐 예천 군수로 부임하였는데, 1623년 10월 23일 군내에 노비가 주인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 이임하였다. 이어 지평(1634)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그의 사상은 먼저 이(理)가 있고, 뒤에 기(氣)가 있다 하였고, 저서 「위민영농기」(1618)에서 천방보와 이앙법, 다경, 다운, 신시비법, 황지개간법 등의 신농법을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영남학파 성장의 경제적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무덤은 호명면 원곡리 등암산에 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544號, 2003-01-25 11:15:53)

 

유진(柳袗) : 1629년(인조 7)에 부임, 1629년(인조 7) 10월 23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무덤이 호명면 원곡리 등암산(藤岩山)에 있다. 1582(선조 15)-1635(인조 13), 안동 사람,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岩), 본관은 풍산, 영의정 서애 성룡(西厓成龍)의 아들, 여ㆍ단의 동생, 정경세(鄭經世)와 장현광(張顯光)의 제자이다. 임진왜란(1592) 후 아버지에게도 글을 배웠다. 22세에 향시(鄕試)에 합격, 부모 사후(永感下)에 유학(幼學)으로서 1610년(광해군 2)에 식년 진사시에 1등 1위로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해서(海西) 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무고(誣告)를 당하여 5개월 간 옥고(獄苦)를 치루고 석방되었다. 동년 6월 23일 왕의 비망기에, "유진(柳袗)은 곧 유성룡(柳成龍)의 아들(3子)이라 들었고, 유성룡은 곧 선왕조(先王朝)의 훈구대신(勳舊大臣)이니, 내가 차마 못하는 바가 있다. 놓아 보내어 그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라." 라고 하였다. 1616년 유일(遺逸)로서 천거를 받아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후 42세에 봉화 현감(奉化縣監)이 되고, 이어 영주(榮州) 군수, 형조 정랑(刑曹正郞)이 되어 오래 묵은 원옥(寃獄)을 해결하였다. 그 후 청도(淸道), 합천 군수를 거쳐 1629년(인조 7) 예천 군수에 부임하여 동년 10월 23일 군내에 노비가 주인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 해직되어 이임하였다. 그 후 1634년 지평(持平)이 되어 장령 강학년(姜鶴年)을 두둔하다가 대간(臺諫)들로부터 공격을 당하였다. 후일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그의 사상은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따르고 있고, 저서인 <잡록(雜錄)>에 의하면, "대개 본원(本原)의 시초로서 논하면 먼저 이(理)가 있고, 뒤에 기(氣)가 있다할 것이다." 라고 하여 이(理)의 일차성(一次性)과 현상계(現象界)의 이기 합성(理氣合成)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의 스승인 정경세(鄭經世)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사상이다. 또한 천방보(川防洑)와 이앙법(移秧法)을 비롯하여 다경(多耕), 다운(多耘), 새로운 시비법(施肥法), 황지간법(荒地懇法)과 같은 선진 농법은 1618년 유진이 편찬한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담긴 새 농법은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선진 농법으로서 타도(他道)에 앞서 실시됨으로써 16세기 영남 사림 내에 영남학파(嶺南學派)를 급속히 성장시킨 경제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저서로 <수암선생연보(修岩先生年譜>(古 4650-91)와 <수암집(修岩集)> 3권, <임진록(壬辰錄)>이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인터넷 야후 2001)

 

유진(柳袗) : 1582(선조 15)-1635(인조 13), 1629년(인조 7)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 1630년(인조 8)에 이임하였다. 무덤이 호명면 원곡리 등암산에 있다.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岩), 본관은 풍산, 서애 성룡(西厓成龍)의 3자, 정경세(鄭經世)와 장현광(張顯光)의 제자이고, 한강 정구(寒岡鄭逑)의 제자이다. 22세에 향시(鄕試)에 합격, 1610년(광해군 2)에 사마시(司馬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 때 무고(誣告)를 받아 5개월간 옥고(獄苦)를 치루고 석방되었다. 동년 6월 23일 왕의 비망기에, "유진(柳袗)은 곧 유성룡(柳成龍)의 아들(3子)이라 들었고, 유성룡은 곧 선왕조(先王朝)의 훈구대신(勳舊大臣)이니, 내가 차마 못하는 바가 있다. 놓아 보내어 그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다." 라고 하였다. 1616년 유일(遺逸)로서 천거를 받아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후 42세에 봉화 현감(奉化縣監)이 되고, 이어 영주(榮州) 군수, 형조 정랑(刑曹正郞)이 되어 오래 묵은 원옥(寃獄)을 해결하였다. 1627년(인조 5) 허위 보고를 하였다 하여 청도(淸道), 합천, 예천 군수에서 파직되었으나, 1634년 다시 등용되어 지평(持平)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따르고 있고, 저서인 <잡록(雜錄)>에 의하면, "대개 본원(本原)의 시초로서 논하면 먼저 이(理)가 있고, 뒤에 기(氣)가 있다할 것이다."라고 하여 이(理)의 일차성(一次性)과 현상계(現象界)의 이기 합성(理氣合成)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의 스승인 정경세(鄭經世)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사상이다. 또한 천방보(川防洑)와 이앙법(移秧法)을 비롯하여 다경(多耕), 다운(多耘), 새로운 시비법(施肥法), 황지간법(荒地懇法)과 같은 선진 농법은 1618년 유진이 편찬한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담긴 새 농법은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선진 농법으로서 타도(他道)에 앞서 실시됨으로써 16세기 영남 사림 내에 영남학파(嶺南學派)를 급속히 성장시킨 경제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저서로 <수암집(修岩集)> 3권과 <임진록(壬辰錄)>이 있다. 네 고을의 수령을 나가서는 선정을 베풀었다. 학문의 연원이 있어 성경(誠敬) 공부에 독실하였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종향되었다. 문집 3책이 있다. 상주시 낙동면에 유허비가 있다.(安東의 書院 1994)

 

  유진 [記事] : 한국문집총간(076_437a) 경정집(敬亭集, 1664)에 실린 유진(柳袗)의 예천군수(1629-1629) 유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敬亭先生集年譜卷之二/ 附錄/ 輓詞 醴泉郡守柳袗]/  名直節聳儒紳。儀鳳游麟作世珍。律度森嚴松出壑。襟懷瑩澈鏡無塵。騷壇健筆空餘子。經幄嘉猷不數人。已矣典刑難再?。獨留樑月是傳神。”이다.(www.minchu.or.kr 2006)

 

  유진 [記事] : 한국문집총간(091_034c) 학사집(鶴沙集, 1776)에 실린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예천군수(1629-1629) 수암 유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夢吟寺。次諸益韻°/ ...夢吟寺。次諸益韻。 己巳年間會此庵。疏?何幸亦?參。重尋舊日班荊處。草沒山蹊却未?。 柳修巖爲醴泉?...”이다.(www.minchu.or.kr 2006)

 

  유진 [記事] : 한국문집총간(124_481b) 목재집(木齋集, 1761)에 실린 목재 홍여하(洪汝河)의 예천군수(1629-1629) 수암 유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修巖先生柳公行狀/ ...講璣衡註。自衛曹直所。邀先生玉堂。講論疑義。旋拜司僕寺僉正。己巳正月。出爲醴泉郡守。郡在鄕隣。境內皆親故。...”이다.(www.minchu.or.kr 2006)

 

  유진 [記事] : 한국문집총간(179_255a) 식산집(息山集, 1813)에 실린 이만부(李萬敷)의 예천군수(1629-1629) 수암 유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修巖先生遺事/ ...鄭愚伏先生。長玉署。將進講璣衡。邀先生于直所。討論疑義。旋拜司僕寺僉正。己巳。出爲醴泉郡守。郡與先生世鄕爲...”이다.(www.minchu.or.kr 2006)

 

  유진(修巖 柳袗) [記事] : 수암(修巖) 류진(柳袗)은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활약했던 유학자이자 교육자였다. 류진은 경세유학자(經世儒學者), 반양명학(反陽明學), 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의 대재난인 임진왜란에서 국가를 구한 명재상을 길이 추앙받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세째 아들이다. 류진 역시 청렴한 목민관으로서 열화 같은 우국충정의 지사(志士) 교육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개결한 인품과 선정(善政)을 기념하기 위해 합천군민들이 합천군 황강(黃江) 기슭 함벽루(涵碧樓) 옆에 세운 만고인청비(萬古仁淸碑)가 지금도 그 자리에 전해오고 있다. 본관이 풍산(豊山)인 류진은 선조 15년(1582) 아버지 류성룡의 임지인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생애의 절반을 하회(河回)에서 보낸 그는 37세 때 일가 독립하여 상주의 가사리(佳士里)로 이거하였다. 이곳은 팔공산의 물줄기가 북으로 흐르는 위강(渭江)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팔공산과 일월산, 속리산의 맥이 이곳에서 끊어져 풍수가에서 매화낙지(梅花落地)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류진의 호 수암도 마을 앞산의 봉우리인 수암에서 연유한다. 류진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8세때 모친인 정경부인의 상을 당하자 그는 어린 나이에도 여막을 떠나지 않고 두 형과 함께 거상하는 것이 어른 못지 않았다고 연보에 기록돼 있다. 류진은 10세 때 김치중(金致中)에게서 처음 글을 배웠다. 성품이 겸후단직(謙厚端直)하다는 평을 받은 그는 남달리 총명해서 웃사람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는 16세 때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경암(敬庵) 노경임(盧景任)의 문인이 됐다. 노경임은 그의 백부 류운룡(柳雲龍)의 사위였다. 노경임의 문하에서 특히 사서(四書)를 철저히 깨져 학문의 기틀을 잡은 그는 2년 뒤에는 아버지인 류성룡을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류성룡은 때마침 북인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을 받아 하회에 낙향해 있었다. 그는 특히 중용(中庸) 공부에 몰두하여 그 경의(敬義)를 깊이 깨달았다. 그의 연보를 보면 이때 그는 아버지와 무릎을 맞대고 조선 유학계에 중용 연구로 이학(理學)의 거봉을 이룬 일두(一?), 정여창(鄭汝昌)의 이학이론 [氣以成形理亦賦焉 기이성형이역부언] 비판론을 토론하여 이기론(理氣論)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0세 미만에 벌써 중용장구(中庸章句)를 둘러싸고 전개된 주자와 정여창의 이론을 섭렵한 그는 49세 때에 부지암(不知巖)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수일간 묵으면서 삼 개조의 문목(問目)을 올려 학문을 강마했다. 류진의 학적 계보는 노경임과 류서애, 장현광의 세 사람을 징검다리로 하여 퇴계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류진은 한편으로 34세 때에는 국담(菊潭)으로 창석(蒼石) 이준(李埈)을 찾기도 했고 사수(泗水)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만나 학문을 묻기도 했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월간(月澗) 이전(李전), 사서(沙西) 김식(金湜)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22세에 향시 급제 29세에 증광시, 성시(省試)에 연거푸 장원을 차지한 류진은 42세되던 인조 원년에 봉화현감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봉화를 필두로 하여 일생동안 영주, 청도, 합천, 예천의 목민관을 역임한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의 질곡을 풀어주기에 앞섰다. 봉화현감 재직시에는 전무(田畝)의 제도를 시행하고 감세 조치를 취해 농토와 군민이 크게 늘어났는데 인조가 이것을 알고는 표리(옷을 말함)를 내려 그를 표창했다. 합천의 목민관 시절에는 영남사림의 종장인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위토가 무단 점탈당한 것을 되찾아 종손에게 돌려주기도 했다. 그는 한편으로 흥학(興學)에 중점을 두어 오성(五性: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과 오륜을 밝히는 것을 학문의 근본으로 하는 그의 위학정신(僞學精神)을 임지해서 향민에게 교육하기에 부심했다.

 

  류진은 남달리 강직했고 의를 보면 참지못하는 성품이었다. 그는 광해군 4년 김직재(金直哉) 무옥사건에 무고로 연류되어 목에 칼을 쓰고 포박을 당한채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중죄인의 신세가 되었으나 언동(言動)이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는 인조 4년에 형조정랑이 되었을 때에는 묵은 원옥(?獄)을 시시비비를 가려 명쾌히 판결하니 형조판서가 ꡒ공이 아니면 이 옥사를 그르칠 뻔 했다고ꡓ 하여 그의 강직함을 칭송했다. 시시비비가 분명했던 그는 그의 정론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인조 12년 그가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에 때마침 강학년(姜鶴年)의 상소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장령으로 있던 강학년이 피폐한 민력(民力), 인심(人心)의 이산(離散), 도적의 봉기, 기강의 문란 등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소를 올리면서 인조가 천의(天意)에 반역하고 정사에 덕을 잃고 숭례(崇禮)를 지키지 않은 점을 질책한 사건이다. 류진은 이 사건이 터지자 강학년을 극형에 처하라는 조정대신들의 벌떼같은 주장에 맞서 홀로 강학년이 언관으로서 군왕에게 직언하여 직책에 따르는 책임을 다한 점을 들어 강학년을 극구 옹호했다. 이때에 그가 급환으로 세상을 버리니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사관은 응천일록(凝川日錄)에서 [전 지평 류진은 영남선비들이 추앙하던 바였는데 과감하게 말하다가 시론(時論)에 배척당하고 갑자기 명(命)을 마치니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그의 강직한 인품을 극구 칭송했다. 46세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류진은 향리인 상주에서 반청창의(反淸倡義)의 선봉장이 됐다. 정경세가 호소사(號召使)가 된 상주의 의병군은 류진을 의병장으로 초대하였다. 류진은 그의 성품에 걸맞게 대나무와 연꽃을 사랑했다. 그의 정전고죽기(庭前枯竹記)와 분지연기(盆地蓮記)를 지어 풍우(風雨)에 굴하지 않고 곧음을 자랑하는 그 절조를 찬양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내적인 정신세계의 한 표현이기도 했다. 류진은 많은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그의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주는 몇 편의 수작(秀作)을 남기고 있다. 그 중의 한 편인 임진록(壬辰錄)은 국문학 사상 자조적(自照的) 수기문학의 백미(白眉)로서 높이 평가될 만한 귀중한 국문학 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류진이 11세때 임진왜란을 당해 매형 이문영(李文英)을 따라 경기도와 강원도로 피난다니면서 경험한 사실을 후일 한글로 당당하게 기록한 임진록은 문학적 가치 외에도 당시 관리의 부패상과 왜적의 잔학상, 왜적과 결탁한 도적들의 실상을 여실히 묘사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살피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김직재의 무옥에 연류되어 경옥(京獄)에 유치된 때의 전말을 일기체로 기록한 임자록(한글로 기록), 한국 두견새에 관해 동물학적 견해를 밝힌 두견설, 상례제설(喪禮諸說), 사례집략(四禮輯略), 격치설(格致說), 자경설(自警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54세 되던 해에 영주 구학사(龜鶴寺)에서 급서(急逝)한 그에게 조정에서는 좌승지와 이조참판을 연이어 증직했으며 현종 3년에는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종향되었다.(김성규 客員記者 안동넷 2008-08-27 오전 9:23:27)

 

  유진 [記事] : 豊柳마을 카페/ 柳侯 袗 仁政碑(류후 진 인정비)  / 글쓴이: 류석우(충주오석)/ 2006.05.17 20:45/ 柳侯 袗 仁政碑(류후 진 인정비)/ 修巖先祖(수암선조)께서 醴泉郡守(예천군수)를 歷任한 後 郡民들이 修巖先祖(수암선조)의 遺德(유덕)을 推仰(추앙)하기 위하여 竪立(수립)하였다./ 碑文(비문):『愛如子愛如父 治民髓基可忘(아들처럼 사랑하고 부형처럼 아끼어서 백성들의 골수에 배었으니 그 어찌 잊으리요)』/ 所在地(소재지):慶北 義城郡 多仁面 陽西里(경북 의성군 다인면 양서리:당시 예천군 관아)/ [댓글] : 류현우 '柳侯袗仁政碑'라는 비문은 오랜 풍마에 실제는 형체를 알아보기가 어려우며 편집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실물을 자세히 관찰하면 글의 형체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의성군 다인면 양서리에 가면 선정을 펼쳐 군민들이 세워 준 군수비석이 합동으로 모여 있으니 오가는 길이 있다면 탐방하셔도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04.07.31 09:31(daum 2009)

 

유진 선정비(柳袗善政碑), 비 [碑] : 예천군 현내면(縣內面, 現 義城郡 多仁面 陽西2里) 서동(西洞)에 있는 예천군수(醴泉郡守) 유진(柳袗)의 비로, 원래 도로 우측 논 가운데 있었다. 비명(碑銘)은, '군수 유공진 ᄋᄋ비(郡守柳公袗ᄋᄋ碑)"이다. 두 글자는 식별(識別)할 수 없다.

 

  [광해군일기] : 1612년(광해군 4) 3월 9일 대사헌 이이첨이 왕에게 아뢰기를, "유진은 유성룡의 아들인데, 잡혀올 때 이미 여역(여疫)에 걸려 있었고 중도에서 병이 가중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동년 3월 10일 왕이 전교하기를, "유진을 보방(保放)하였다가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추문하라." 라고 하였다. 동년 6월 22일에 유진이 원정(原情)을 올려 자신의 억울함을 진술하기를, "저는 역적 괴수의 얼굴도 성명도 모르는데, 제가 진사시에 장원으로 올라 성명이 민간에 퍼졌으므로 역적의 괴수는 필시 알고 무고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유진은 곧 유성룡의 아들이요, 유성룡은 선조의 훈구이니, 유진을 놓아보내 그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게 하라." 라고 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 익위, 세마가 되었다.

  [인조실록] : 인조반정(1623) 후 봉화 현감이 되었고, 다음 해 형조 정랑(1624.12.22)으로 오래 묵은 원옥(寃獄)을 해결하였다. 이 때 사관(史官)은 기록하기를, "유진은 인조반정 초에 학행으로 뽑혀 고을 원이 되었는데, 치적이 도내에 최고였기 때문에 이렇게 임명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1627년(인조 5) 11월 25일 청도 군수를 이임하였고, 1629년 예천 군수, 1634년(인조 12) 10월 22일에 지평이 되었는데, 동년 11월 10일 지평으로서 강학년의 죄를 용서하도록 아뢰고, 스스로 파직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黙齋日記)

 

  [저서] : 1) <수암선생문집(修岩先生文集)>이 있는데, 4권 연보 2권 합 3책, 31.9x21cm,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21.5x16cm, 유계(有界), 10행(行) 20자(字), 주소자쌍행(註小字雙行), 판심(版心)은 상하 내향 사판 화문 흑어미(上下內向四瓣花紋黑魚尾)이고, 발문은 갑인년(甲寅年) 상한(上澣)에 썼고, 내용으로 권1에 시(詩), 권2에 서(書), 권3에 기(記), 권4에 임자일록유소(壬子日錄遊消), 양산일록(양山日錄)이 있다. 1833년(순조 33)에 간행되었고,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경북대이다. 2) <수암문집(修巖文集)> : 2권 2책, 목판본이다. 1734년(영조 10)에 후손 위하(緯河)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조덕린(趙德隣)의 서문이 있고, 시(詩), 소(疏), 계사(啓辭), 지명(誌銘), 행장(行狀), 기(記), 잡저(雜著), 서(書), 부록 등으로 구성되었다. 시 중에, '경차퇴계선생운(敬次退溪先生韻)' 3수는 퇴계 이황에 대한 흠모의 정을 나타낸 것이다. 잡저 중에서 '유청도유생문(諭淸道儒生文)'은 청도의 유생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고, '위빈총담(渭濱叢談)'은 유운룡(柳雲龍), 유성룡이 이언적과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잡록'에는 성리학과 예학에 관한 글들이 주로 수록되어 있고, 편지는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에게 보낸 것이 주목된다. 17세기 영남학파의 사상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한 저서로, <임진록(壬辰錄)>이 있는데, 222 (192)쪽, 27cm, 홍재휴(洪在烋)가 역주(譯註)하여 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에서 2000년에 발행한 <민족문화자료총서> 제18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표제(標題)의 '임진록'은 '임진녹', '임자록', '슈암선생행장'이 합편된 단권의 필사본으로, 임진, 임자 양일록은 유진이 지었고, 행장은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3-1678, 龍宮縣 出身, 司諫)가 수찬한 '수암선생행장'을 뒤에 국역(國譯)한 역문이 부첨(附添)된 것이다. 경북대학교 도서관 중앙단행본자료실에 소장(청구기호 중앙811.31 류79ᄋ홍)되어 있다.(인터넷 야후 2001)

 

  유진 [記事] : 안동하회마을/ 간행년 : 1996/ 저자 : 서수용/ 발행처 : 안동문화원/ 3. 누대(樓臺)와 정사(精舍)/ 16) 수암(修巖) : 서애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이 아호로 삼은 바위다. 수암은 안동하회마을 남산 수봉(秀峯) 아래의 바위다. 다만 속명(俗名)이 수암(秀巖)인 것을 아호로 삼으면서 ꡐ수(修)ꡑ 자로 바꾸었다 한다. 26살 때인 선조40년(1607)에 부친상을 당한 이후 31살(광해군4, 1612) 겨울에 선친의 체취가 남은 옥연정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 무렵에 자신의 아호(雅號)를 마련한 것이다. 수암은 이후 줄곧 고향에 살다가 36살 되던 9월에 상주 가사리(佳士里)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이 때 서애 선생의 양대 제자인 우복 정경세와 창석 이준이 격려차 방문한 기록이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유진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豊山 柳氏】/ 류진(柳袗):1582(선조 15, 임오)~1635(인조 13, 을해). 본관 豊山. 자는 季華. 호는 修巖. 成龍의 第3子. 부친 成龍에게 수학. 1610년 사마시 장원. 1612년 金直哉의 무옥사건에 화를 입어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李德馨ㆍ沈喜壽 등의 변호로 풀려남. 1627년 정묘호란에 왕과 세자가 피난하는 위급한 지경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엄정한 통솔력을 발휘함. 증직:吏曹參判. 제향:屛山書院. 저서:『修巖集』. ▣참고:「行狀」(洪汝河 撰) ??집필:이원걸(www.koreastudy.or.kr 2007)

 

  유진(柳袗) : 1582(선조 15, 임오) ~ 1635(인조 13, 을해),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영의정 성룡(成龍)의 제3자. 노경임(盧景任)의 문인. 1610년(광해군 2)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 때 무고를 받아 5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이덕형(李德馨)ㆍ심희수(沈喜壽) 등의 변호로 풀려났다. 1616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가 되었다. 인조반정 뒤 봉화 현감(奉化縣監)이 되고, 이어 형조 정랑(刑曹正郞)이 되어 오래 묵은 원옥(寃獄)을 해결하였다. 1627년(인조 5) 허위 보고를 하였다 하여 청도 군수(淸道郡守)에서 파직되었으나, 1634년 재등용되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부친인 성룡(成龍)과 같이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수암집(修巖集)』이 있다. 만년에 상주(尙州) 낙동(洛東)으로 이거했다. ◎참고문헌 : 光海君日記ㆍ仁祖實錄ㆍ嶺南人物考(www.koreastudy.or.kr 2007)

 

  유진 [記事] : 안동하회마을/ 간행년 : 1996/ 저자 : 서수용/ 발행처 : 안동문화원/ 3. 상주 낙동(洛東) 우천파(愚川派)/ 수암(修巖) 류진(柳袗:1582, 선조15~1635, 인조13) :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으로 서애 선생의 셋째 아들이요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2)에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사마시에 합격한 2년 뒤 해서지방에서 김직재 무옥이 일어났을 때 무고를 당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봉화ㆍ영주ㆍ청도ㆍ예천ㆍ합천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는데,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선정비를 세워 은덕을 기렸다. 뒤에 한성부 서윤, 사헌부 지평 등 직을 지냈다. 학문의 연원이 있어 성경공부(誠敬工夫)에 독실했다. 효종 7년(1656)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현종 3년(1662) 병산서원에 종향(從享)되었다. ꡐ수암ꡑ이란 호는 31세 때에 하회의 남산 수봉(秀峯) 아래에 수암(秀巖)이란 바위가 있어서 글자를 바꾸어 지은 것이라 한다. 『사례집략』, 국문본 『임진록』『임자록』과 문집 4권 3책이 있다. 특히 국문본 임진록과 임자록은 수기문학(手記文學)의 백미(白眉)로 평가받을 만한 작품이다. 『임진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피난 일기인데, 일어판으로도 번역된 바 있다. 수암이 상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광해군 9년(1617), 당시 36세 9월의 일로 중동면 가사리(佳士里)에 터를 잡은 것이 그 시초다. 종택은 상주군 중동면 우물리(于勿里)에 있다. 종택 뒷산에 유허비(1989년 건립)가 서 있다. 묘소는 군위군 소보면 내의동 어의골(언실, 於義谷)에 사향(巳向)으로 모셔져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유진(柳袗) [記事] : 가족이야기/ 조 : 유중영(柳仲?) / 생부 : 유성룡(柳成龍) / 모 : 전주이씨(全州李氏) 이경(李坰)의 딸 / 형제 : 유위(柳褘), 유여(柳?), 유단(柳?) / [김직재의 옥사 때 가묘에 고하다.] : 1612년 김직재의 옥사 때 무고로 체포되었을 때 잡으러 온 판관에게 지금 가면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우니 가묘에 고하고 가기를 청하였다. 판관이 허락하지 않고 나졸을 시켜 빨리 묶어 압송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 중형 유서의 편지가 왔으나 공의 행동이 태연자약하여 얼굴색이 변하지 않으니 나졸이 ꡒ이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니 반드시 현자임이 틀림없다.ꡓ고 하였다. 공이 가묘에 들어가 엎드려 통곡하고 나오니 금오랑이 집에 들어가 식구들과 이별하라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예천 군수 시절 친척의 청탁을 끊다.] : 1628년(인조 6) 예천 군수로 임명되었을 때 예천이 고향과 가까워서 친척들이 청탁을 많이 하였으나 선생은 엄격히 처신하여 한사람도 법에 저촉되는 바가 없었다.(www.koreastudy.or.kr 2007)

 

  유진 [記事] : 병산서원/ 공간이야기/ 유진(柳袗, 1582~1635)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아버지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다.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12년 해서 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 현감이 되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토지 문제[田畝]와 부세(賦稅)를 바로잡았다. 이듬해 형조 정랑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옥사를 잘 해결하여 판서 이서(李曙)의 경탄을 샀다. 1627년에 청도 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수포장인(收布匠人)에 대한 보고에 허위가 있다 하여 파직 당하였다. 1634년 지평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학년(姜鶴年)이 당시 서인정권의 정책을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 때 그를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수암집(修巖集)』이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유진 [記事]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陝川 / 名宦  / 新羅 宗貞 太宗王八年移押督州於大耶以阿飡 宗貞爲郡督 高麗 任元厚 仁宗朝出守 田元均 知郡淸廉不受苞?其撫細民未嘗不俯循哀惻及繩猾吏鋤/ <하권0385-4>/ 理甚威發奸摘伏如神一州敬憚決獄尤詳審雖受捧楚者皆曰田君決之 李兆年 忠烈王朝自禮賓內給事出爲知州 本朝權軫 嘗知此郡有美政民歌之曰權軫之前無權軫 權軫之後亦無權軫 趙? 淸節無比嘗在郡子壻奴僕往來者皆?私糧又郡産銀口魚夏月雖至腐敗不許妻子嘗 曹尙治 牟恂 俱知郡 權得經 鄭而虞 俱爲郡守 兪好仁 爲司憲掌令以親老辭出守于郡而卒 新增趙穆 柳袗 俱有治績 李秉泰 以承旨知郡淸白有惠政吏民至今追思(www.history.go.kr 2007)

 

  유진 [記事]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尙州 / 人物  / ...李埈 ?之弟中生員登第官至副提學學問文章推重一代館閣章奏勤懇?切立朝遇事抗言直節稟然有蒼石集行于世享玉城書院 金光燁 生進俱中登文科官至典翰 全湜 中進士登第●●●曹參判學問德業爲世所仰光海政亂杜門求志仁廟朝經席館閣論思?切乙丑航海朝天遇?風/ <하권0436-3>/ 舟危人皆失措獨不變丙子亂倡義勤 王有文集配享白玉洞書院 曺友仁 中進士登第光海政亂無意仕進嘗以迎詔使製述官被徵入直西宮時長秋錮門藏舊作六韻詩略曰蕭條物色同南內 陟降英靈泣夜臺爾?見而?之誣以護逆光海親鞠受訊但連呼念先王三語因繫獄三年逮 反政得釋卽 除承旨退歸洛濱而卒有?齋集行于世 高仁繼 中進土登第官至縣監見爾瞻亂國政棄職還鄕築室于瀕水之上賦詩自娛享孝谷書院 柳袗 成龍之子進士壯元以遺逸薦授持平資質謙沖踐履篤實歷典四邑有氷蘖聲享安東屛山書院 金安節 中進士孝行出天不求名利遊成允諧之門講明經旨踐履堅貞入享花巖書院 申碩蕃 中進士天資超卓學問精博以遺逸爲官至進善 贈吏曹參議享花巖書院 康應哲 中進士以學行薦察訪享淵嶽書院 金聃壽 中司馬性至孝八歲執父喪不?六十四遭母喪廬墓不脫衰?遊曹植門下講●不怠 朝廷聞其賢授繕工監役不赴享星州...(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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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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