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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02-7 :유철(1641.5.30제수, 동년6.24하직-1643봄이임) : 남산공원에 선정비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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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 [記事] :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 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10월 28일 임신 5번째 기사/ 이경억을 체직시키라고 명하다/ 상이 승지 윤강 등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ꡒ지난번에 경들이 면대를 청하였는데, 내가 마침 병이 있어서 인견하지 못하였다.ꡓ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ꡒ유철의 죄는 삭탈 관작에 불과한 것으로 본래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헌부의 조율이 마땅함을 잃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말과 안색에 나타내는 것을 내가 어찌 그렇게 하고 싶겠는가. 내가 유철의 죄를 고의적으로 범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국사가 잘못되는 것은 모두 임금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그러나 방백으로 있으면서 제대로 검칙하지 못하였으니 유철이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경억은 인피한 후에 한 번도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고, 또 어찌 감히 조석윤의 파직을 환수하는 일을 논계한단 말인가. 동료 관원이 한 사람도 없는데 이에 감히 독계하다니, 참으로 놀랍다. 경억의 뜻을 알고자 해서 경들을 부른 것이다.ꡓ하니, 윤강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ꡒ과연 경솔히 한 잘못이 있습니다.ꡓ하고, 엄정구(嚴鼎耈)도 아뢰기를, ꡒ그것은 생소한 소치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그것이 어찌 무식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반드시 논계하는 데 급급해서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은 자를 시종의 반열에다 두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ꡓ하니, 윤강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ꡒ경억이 제주(濟州)를 안핵할 때 사람들이 모두들 강명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논한 것은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박서를 논핵한 것도 몹시 놀랍고 이상하다.ꡓ하니, 정구가 아뢰기를, ꡒ하찮은 일개 대관이니 단지 체직하여 내치는 것이 옳습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이경억을 체직하라.ꡓ하고, 또 이르기를, ꡒ윤성 역시 장석지로써 대관에게 비교하였으니 매우 어리석고 외람되다. 이 사람에게 형제가 있고, 이 사람이 혀가 짧아 말을 더듬거리는 자인가?ꡓ하니, 정구가 대답하여 아뢰기를, ꡒ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이 사람은 본디 인사(人事)를 모르는 자이다.ꡓ하니, 정구가 대답하여 아뢰기를, ꡒ죄가 있을 경우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을 주는 것이 불가하지 않습니다.ꡓ하였다./ 【영인본】 35 책 513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 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11월 3일 정축 1번째 기사/ 이시백 등이 이경억․조석윤 등의 일이 미치는 폐해에 대해 아뢰다/ 좌의정 이시백이 상차하기를, ꡒ요즈음 조석윤(趙錫胤)․이경억(李慶億) 등의 일로 삼사가 이미 모두다 논열하였는데도 성상의 윤허가 아직 내리지 않았으니, 어찌 신하들의 성의가 부족하고 성상께서 이치를 살피심이 자세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의(情意)가 두텁지 못함으로 인하여 위에서 신하들을 의심하기를 ꡐ위의 심중이 무엇인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번거롭게 다투기만 한다.ꡑ 하고, 신하들은 임금을 의심하기를 ꡐ아랫사람들의 심정이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을 통촉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굳게 거부하기만 한다.ꡑ고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간쟁함이 간절할수록 들어줌이 더욱 멀어지는 것입니다. 신 역시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채 성상께서 살피시어 받아들여 주시기를 기대하고서 속에 품은 생각을 피력하여 성상께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사리를 잘 지적하고 근원을 잘 추구하여 전하로 하여금 분명하게 알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간쟁하는 자들의 말은 임금을 위해서 하는 말이지 두세 신하들에게 사사로운 마음이 있어서가 아닌 것으로 신의 죄 역시 큽니다. 신은 아주 형편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대신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잘못된 점을 보고서도 끝내 바르게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신이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 더욱 큰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한 차례 차자 올린 것을 가지고 책임을 다한 것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유철(兪㯙)이 범한 것이 어찌 장속(杖贖)에 그칠 죄이겠습니까. 중한 죄를 주어야 마땅한데 가볍게 하여 사정(私情)을 따르는 것처럼 한 것이 전하께서 반드시 죄주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대명률(大明律)》을 씀에 있어서는, 꼭 맞는 율이 드물어 대부분 비의(比擬)하고 있으며, 경중(輕重)이나 공사(公私)도 본디 일정한 조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가볍게 죄준 것을 위에서 혹 중하게 하기도 하고, 아래에서 중하게 죄준 것을 위에서 혹 가볍게 하여 고쳐 조율하라는 명이 전부터 종종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조율을 착오나게 한 대각의 신하가 인피하여 체차된 경우는 있으나, 일찍이 조율을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중한 죄를 받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사람들의 의견이 장단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석윤 등에게 특별히 파직의 율을 시행한 것은 성상께서 참작하여 헤아린 데서 나온 것이니, 환수하라는 논의를 어찌 감히 발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경억은 나이 젊은 대관(臺官)으로서 단지 임금이 포용해 주는 것만 믿고 스스로 거리낌 없이 간언해야 한다는 의리에 의탁한 것이니, 그 정상이 용서해 줄 만합니다. 더구나 경억의 망언이 조석윤 등에게 무슨 상관이 있기에 다시 죄를 가하여 찬축하여 유배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지금 조율한 것이 한번 틀렸다는 이유로 문득 유배시킨다면, 사람들이 조석윤이 율을 잘못 적용하였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 율을 중하게 적용하기를 힘쓰고 죄를 범한 실상이 어떠한가는 살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한번 실수하였다는 이유로 문득 찬축한다면, 사람들이 이경억의 처사가 경솔하였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 아무 말도 않하기를 힘쓰고 아부하며 따르기만 하는 풍조가 만연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 폐해가 도리어 오늘날보다도 더 심해질 것입니다. 임금의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행동은 모두다 사람들이 듣고 보는 데 관계되는 것으로,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원의 신하가 말하여서 허락받지 못하고, 삼사(三司)의 신하가 간쟁하여도 허락받지 못하고, 대신이 구제하고도 허락받지 못하였습니다. 가령 조석윤 등의 본심이 진실로 성상의 전교와 같다면, 전하께서 견고하게 고집하시는 것이 마땅하며, 신들 역시 구원하기를 도모한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석윤 등의 본심이 그렇지 않은데 끝내 중한 벌을 내릴 경우, 국사(國史)에 쓰고 야사에 기록하여 온 나라에 전하고 후세에 전하기를 ꡐ모관(某官) 모신(某臣)이 아무 때 아무 일로 유배되고 찬축되었다.ꡑ라고 하게 되면, 성상의 덕에 허물됨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이 어리석다고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다시 분명하게 살피소서.ꡓ하니, 답하기를, ꡒ차자의 말은 깊이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ꡓ하였다./ 【영인본】 35 책 514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 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11월 3일 정축 2번째 기사/ 의금부에서 유철의 죄를 장 팔십 도삼년에 진탈 고신으로 조율하여 아뢰다/ 금부가, 전 감사 유철의 죄를 장 팔십 도삼년에 진탈 고신(盡奪告身)으로 고쳐 조율하여 아뢰니, 결장(決杖)은 제하라고 명하였다./ 【영인본】 35 책 515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 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11월 6일 경진 2번째 기사/ 전 영의정 이경석이 백성의 고통과 조석윤 등의 일에 대해 아뢰다/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말미를 청하여 영동(嶺東)으로 목욕하러 갔다가, 조정에 돌아와 상소하기를, ꡒ신이 돌아올 때에 고성(高城)의 군민들 80, 90인이 일제히 경상(境上)에 모여서 신이 대신을 지냈던 적이 있었다 하여 글을 바치면서 성상께 진달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대개의 내용은, 적곡(翟穀)과 포흠(逋欠)의 폐단이었으며, 또 기경(起耕)하는 데 따라서 세금을 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민정(民情)에 관계되니, 호조로 하여금 복계하게 하여,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분명하게 이문(移文)해서, 궁벽한 시골에 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가부를 알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신이 비록 관직에 있지는 않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어찌 물러가 있다고 해서 차이가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국사는 우려할 만한 단서가 참으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성상께서 위에 계시는 것으로, 이것이 신민들이 함께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서울에 있으면서도 국가의 일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하는 일이 있었는데, 더구나 지금은 외방에서 들어왔으니 크고 작은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상세히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길거리에서 듣고 사람들의 기색에서 본 것으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석윤 등 두세 대신(臺臣)과 유철(兪㯙)․이경억(李慶億)의 일은, 이것이 무슨 처치이며, 무슨 기상(氣象)입니까. 조정의 기강이 엄숙하고 국가의 일이 다스려지는 것은, 오로지 임금의 거조가 마땅함을 얻고, 간언을 따름이 조금도 막힘이 없는 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위세로 억누르고 형벌로 제압하고서도 능히 다른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엄하고 급하게 독촉하는 것은 결단코 다스려진 세상의 기상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서책에 쓰여진 득실을 어찌 감계로 삼지 않으십니까. 발하기는 쉽고 억제하기는 어려운 것 중에서 노여움이 가장 심한데, 이것은 예로부터 성현들이 정녕하게 경계를 내린 것입니다. 더구나 노하여서 격동되는 것이겠습니까. 격동되고서도 능히 중도에 지나치지 않는 경우는, 천하에 이런 이치는 없습니다. 아무리 큰 허물이라도 용서해 주는 것은 성인이 법을 쓰는 요령이고, 광망(狂妄)한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것은 현명한 임금이 말을 듣는 요령입니다. 성군인 요와 현신인 순이 한 조정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옳고 그름을 따졌으며, 한나라와 당나라의 군신간에도 오히려 가부를 따졌습니다. 감히 잘못된 것을 교정하지 못했던 것이 위(衛)나라가 날로 잘못되어진 이유인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어찌하여 노여움을 잊고서 이치를 살피지 않으십니까. 지금 여러 신하들이 이 일을 다투어 간쟁하는 것이, 과연 몇 사람의 신하를 위해서입니까, 임금을 위해서입니까. 군신간에 화목하면 적들이 감히 틈을 엿보지 못하고, 상하간에 서로 막혀 있으면 만사가 무너져 끝내 난망에 이르고 마는 법입니다. 이 일이 어찌 크게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나라 일은 역시 크게 다행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부제(?祭)가 이미 지나 경사가 겹쳐 있고, 삼전(三殿)이 만복하여 예전의 병환이 이제 쾌유하였으며, 왕세자가 안길(安吉)하여 차례로 예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바로 더욱더 덕을 닦고 크게 화기(和氣)를 펴서 천명(天命)을 맞이하고 자전(慈殿)을 받들 때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분분해 사람마다 의기가 저상되어 기색이 걱정스럽고 참혹하단 말입니까. 신은 걱정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신이 만약 임금의 위엄을 저촉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다면, 이것은 전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저의 정성을 대략 진달합니다. 전하께서 고치시기를 신은 간절히 빕니다.ꡓ하니, 답하기를, ꡒ경이 무사히 다녀왔으니, 내가 몹시 기쁘다.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아뢴 것은 마땅히 호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ꡓ하였다. 호조가 복계하기를, ꡒ기경(起耕)하는 데 따라서 세금을 내는 법은, 다른 도에는 없고 단지 영서(嶺西)의 여러 읍에서만 시행하는데, 이는 필시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 산전(山田)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영동 지방은 토지가 자못 비옥하여 백성들의 생업이 영서와 같이 피폐되지는 않았습니다. 조종조에서 법을 제정한 것을 가볍게 의논하기는 곤란합니다. 포흠된 각종 곡식에 대해서는, 병자년 전란에 산실(散失)되어 징봉(徵捧)할 곳이 없는 경우에는 뽑아내어 감면해 주어 조금이나마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ꡓ하니, 따랐다./ 【영인본】 35 책 515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구휼(救恤) / *재정-전세(田稅)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8권/ 효종 3년( 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1월 6일 기묘 2번째 기사/ 김자점의 옥사에 대한 논의를 하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서전》 미자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검토관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ꡒ정자(程子)나 주자(朱子)같은 현인도 끝내 시대를 만나지 못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추의 한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성의를 가지고 구한다면 어찌 현재(賢才)를 얻지 못하겠습니까.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현인이 없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단지 현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규정을 보면 전적으로 양전(兩銓)517) 에 그 책임을 맡기고 있는데, 위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그저 의망한 차례만 보고 제수할 따름이니, 웃음이 나올 일이다.ꡓ하자, 시독관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ꡒ기(夔)같은 인물이 하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518) 임금이 어느 겨를에 그 인물됨을 두루 보고서 가려 등용하겠습니까. 그 책임은 진정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얼마나 공명정대하게 업무를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승지 윤강에게 하문하기를, ꡒ서필원 등이 논한 것에 대해 바깥 의논은 어떻게들 생각하는가?ꡓ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ꡒ이징과 이숙을 방치(放置)하기로 한 것이야말로 그들을 보전하는 길이니, 누군들 필원 등이 논한 것을 망령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김자점(金自點)과 다른 적(賊)들을 보건대, 자신들이 꼭 죽게 될 줄을 알고 나서도 사실을 자백하지 않았다. 이는 흡사 남쪽의 토적(土賊)들이 죽을 때 입을 열지 않고 오히려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취했던 행동과 같았다. 그러니 이번의 일도 후환이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ꡓ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ꡒ군부(君父)가 말[馬]을 하사했는데도 김자점이 내팽개치고 받지 않았으니, 이것만 보아도 임금을 무시한 일단(一端)을 알 수 있습니다.ꡓ하자, 상이 이르기를, ꡒ말을 하사한 뒤에도 끝내 응답이 없기에 내가 이미 괴이하게 여겼다.ꡓ하였다. 시진이 아뢰기를, ꡒ서필원 등이 말한 것 때문에 죄를 얻은 것은 실로 아름다운 일이 못 됩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시비(是非)는 양립(兩立)할 수는 없다.ꡓ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ꡒ시진의 생각은 대체로 그 사람이 언관(言官)의 신분으로 죄를 얻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진달드린 것입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아무리 언관이라 하더라도 그가 일을 논한 시비만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저 언관이라는 것만 가지고 논한다면, 혼조 때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언관들도 언관이라 해서 죄줄 수 없단 말인가.ꡓ하고, 또 이르기를, ꡒ지난해 능에 거둥할 때 김세룡(金世龍)이 아무 이유 없이 병을 핑계대고 끝내 어가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세워둔 횃불이 교외로 나가자마자 즉시 꺼졌는데, 한 사나이만 반역을 도모했어도 필시 일이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 방백으로 있던 자가 전혀 직무를 수행할 줄 몰라 시동(尸童)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였는데, 뭇 의논들이 모두 유철(兪㯙)을 죄준 것을 지나치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ꡓ하였다./ 【영인본】 35 책 524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인사(人事)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註 517]양전(兩銓) : 이조와 병조. ☞ / [註 518]기(夔)같은 인물이 하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 ꡐ기일족(夔一足)ꡑ이라는 고사(故事)에서 유래된 말로, 유능한 인물이 하나만 있어도 모든 일이 잘 처리될 수 있다는 말. 《한비자(韓非子)》 외저설 좌하(外儲說左下)에 ꡒ애공(哀公)이 공자(孔子)에게 묻기를 ꡐ내가 듣건대 요(堯)임금의 신하 기(夔)는 외다리였다고 하는데, 참말입니까?ꡑ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ꡐ기도 사람인데 어찌 다리가 하나뿐이겠습니까. 그도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나 음악에 대해서만은 통달했기 때문에 요임금이 「기 하나면 충분하다[夔一而足矣]」고 하여 악정(樂正)으로 임명했던 것인데, 군자들이 잘못 알아 듣고 「기는 다리가 하나다.」라고 한 것일 뿐, 사실은 외다리가 아닙니다.ꡑ하였다.ꡓ하였음. ☞(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8권/ 효종 3년( 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1월 24일 정유 1번째 기사/ 유거․조수익을 석방하라고 명하고, 이시해에 대해 의논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서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박서가 아뢰기를, ꡒ근래 유배된 사람 가운데, 유거(柳?)는 현재 적소(謫所)에서 모친상을 당하였으니 사정이 매우 측은하고, 조수익(趙壽益)․유철(兪㯙)․이경억(李慶億)도 모두 노친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조수익은 당초 국문에 참여하는 일을 꺼려 피하다가 유배까지 당했으니 지극히 원통할 듯합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유거의 사정은 정말로 측은하기 그지없고, 조수익은 일찍이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던 사람으로서 여론이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있으니, 모두 먼저 석방하도록 하라.ꡓ하였다. 시독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ꡒ이시해를 논죄한 일은 아무리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신은 진정시키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시해가 논계할 때 어휘를 구사한 것이 참으로 지나친 것이긴 합니다만, 형적(形迹)이 혐의쩍다고 하여 갑자기 증도 부처(中道付處)하는 율을 적용하기까지 한 것은 너무도 지나칩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어찌 어휘 구사에만 잘못이 있겠는가. 모두들 대간을 죄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대간의 직책에 있는 신분으로서 사적인 의도를 개입시키는 것이야말로 그 죄가 중하다고 여긴다.ꡓ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ꡒ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유백증(兪伯曾)과 민응형(閔應亨)이 탑전(榻前)에서 김류와 이경증(李景曾)을 탄핵하였는데, 하나는 대신이고 하나는 중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한꺼번에 싸잡아 논하였으니, 어찌 놀랄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왕께서는 역시 죄를 주지 않으시고 좌우에 자문을 구하셨는데, 대신 이하 사람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특별히 민응형을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내려 보냈습니다. 이번에 이시해가 처벌된 것은 정말로 과중한 듯합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그런 식으로 논하지 말라. 그와 같이 한다면 끝내 시비가 정해질 날이 없을 것이다.ꡓ하였다./ 【영인본】 35 책 529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전사(前史)(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8권/ 효종 3년( 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1월 26일 기해 1번째 기사/ 호서의 죄인 13명을 황해․강원에 옮기고, 최극령 등을 북쪽으로 이배하다/ 금부가 아뢰기를, ꡒ호서에 정배한 죄인 14명을 하교하신 대로 황해와 강원 양도에 이배(移配)하였습니다.ꡓ하니, 답하기를, ꡒ최극령(崔克寧)․유여해(兪汝諧) 등은, 여러 역적의 초사(招辭)를 보건대 이두일(李斗一)이 지난해 가을로 군사행동 시기를 잡았다는 주장이 있었고 보면 김세룡(金世龍)이 병을 핑계대고 어가(御駕)를 수행하지 않았던 그 상황이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였다고 할 것인데도, 깜깜한 밤중에 불켜는 관원 하나 준비시키지 않았다. 어찌 심상하게 논죄할 수 있겠는가. 북쪽 변방에 이배하여 유철과 함께 3년의 기한을 채우도록 함으로써 형편없이 행동하는 신하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라.ꡓ하였다./ 【영인본】 35 책 529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9권/ 효종 3년( 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10월 30일 무진 2번째 기사/ 전 감사 유철․전 대사간 이시해를 서용토록 하다/ 전 감사 유철(兪㯙), 전 대사간 이시해(李時楷)를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영인본】 35 책 58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9권/ 효종 3년( 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12월 12일 경술 2번째 기사/ 인평 대군을 사은사로, 유철을 부사로, 이광재를 서장관으로 삼다/ 인평 대군 이요(麟坪大君李?)를 사은사로, 유철(兪㯙)을 부사로, 이광재(李光載)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영인본】 35 책 59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10권/ 효종 4년( 1653 계사 / 청 순치(順治) 10년) 1월 28일 을미 1번째 기사/ 사은 정사 인평 대군, 부사 유철, 서장관 이광재 등이 청국으로 가다/ 사은 정사(謝恩正使) 인평 대군 이요(麟坪大君李?), 부사(副使) 유철(兪㯙), 서장관(書狀官) 이광재(李光載) 등이 청국(淸國)으로 갔다./ 【영인본】 35 책 614 면/ 【분류】 *외교-야(野)(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10권/ 효종 4년( 1653 계사 / 청 순치(順治) 10년) 5월 23일 무자 1번째 기사/ 사은사 인평 대군 등이 북경에서 청국 정세에 대해 치계하다/ 사은사(謝恩使) 인평 대군 이요(麟坪大君李?)와 부사(副使) 유철(兪㯙)이 북경(北京)에서 치계하였다. ꡒ신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영력 황제(永曆皇帝)740) 가 방금 운남(雲南) 지방 사천(四川)에 있는데, 유적(流賊) 가운데 멀리서 영력 황제를 붙좇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오삼계(吳三桂)는 한중(漢中)에 있으면서 유적과 교전(交戰)하고 있는데, 청인(淸人)들이 군대를 출동시켜 돕자 유적이 관문을 닫고 굳게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ꡓ/ 【영인본】 35 책 627 면/ 【분류】 *외교-야(野)/ [註 740]영력 황제(永曆皇帝) : 명나라 영명왕(永明王). ☞(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10권/ 효종 4년( 1653 계사 / 청 순치(順治) 10년) 6월 23일 정사 2번째 기사/ 사은사 인평 대군, 부사 유철, 서장관 이광재가 돌아오다/ 사은사(謝恩使) 인평 대군 이요(麟坪大君李?)와 부사 유철(兪㯙)과 서장관 이광재(李光載)가 청국(淸國)에서 돌아왔다./ 【영인본】 35 책 632 면/ 【분류】 *외교-야(野)(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 1653 계사 / 청 순치(順治) 10년) 7월 2일 을축 1번째 기사/ 구인후․유철․남선․홍명하․정두경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구인후(具仁?)를 병조 판서로, 유철(兪㯙)을 경기 감사로, 남선(南銑)을 예조 판서로, 홍명하(洪命夏)를 대사간으로, 정두경(鄭斗卿)을 사간으로 삼았다. 정두경은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술을 즐기고 방일(放逸)하여 세상 일을 버렸으니, 간쟁(諫諍)하는 직책은 그의 적임이 아니었다./ 【영인본】 35 책 63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 1653 계사 / 청 순치(順治) 10년) 윤7월 2일 을미 2번째 기사/ 역관들의 사역으로 유철․이광재를 추고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ꡒ이광재(李光載)가 추고에 대하여 함답(緘答)한 사연에 ꡐ패(牌)를 꽂았다는 말에 대해서는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때에 이미 그런 말을 들었다.ꡑ 하였고, 또 역관(譯官) 장현(張炫)이 궁액(宮掖)을 빙자하여 폐단을 지은 정상을 끌어댔으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장현을 먼저 잡아다 문초하라. 또 그 말이 전에 형조에서 핵문(?問)하였을 때의 말과 다른 것도 괴이하다.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도 모두 불러 물어서 아뢰라.ꡓ하였는데, 유철이 대답하기를, ꡒ접때 대론(臺論)은 오로지 역관들이 물건을 팔 때에 내사(內司)를 핑계댔기 때문에 나온 것인데, 신이 북경(北京)에 있을 때에 어느 사람이 이런 일을 하였는지 듣지 못하였으므로, 형조에서 핵문할 때에 감히 사실대로 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광재의 말과 신의 말이 서로 다르나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은 각자 같지 않는 법이니, 신이 어찌 자기 소견만을 스스로 옳다 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처음에 말한 것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ꡓ하고, 이광재가 대답하기를, ꡒ형조에서 물을 때에는 신이 탄핵받았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하였으나, 이번에 특별히 추고한 것은 다른 거조에서 나왔으므로 들은 바를 상세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신의 말과 신의 말이 같지 않은 것은 듣고 본 것이 다를 수도 있고 사세가 그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어필(御筆)로 조목을 만들어 다시 하문하였는데, 유철이 대답하기를 ꡒ장현이 나인(內人)의 아비라는 말은 신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을 때에 처음으로 들은 일이 있으나, 세력을 믿고 폐단을 지은 정상은 신이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50바리[?]나 되었다는 말은 정녕 잘못 전해진 풍문이기에 신이 나아가 사은(謝恩)하던 날에 마침 대간(臺諫)을 만나서 말하기를 ꡐ내가 본 것은 한 바리뿐이었다. 그런데 내사에서 전부터 으레 무역하는 규례가 있었으므로 역관이 저희끼리 식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의심하지 않았다.ꡑ 하였습니다. 그 뒤에 대간이 인피한 글에는 신을 직접 눈으로 본 것으로 지목하였고, 이광재가 함답한 글에도 동행(同行)이 눈으로 보았다고는 하였으나 신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바리 수도 밝히지 않았는데, 말이 퍼지며 늘어나서 50 바리나 되었습니다. 신이 바야흐로 짤막한 상소를 갖추어 스스로 논열하려 하던 중에 마침 엄한 물음을 받았는데, 밤이 이미 깊어 자세히 아뢰지 못합니다.ꡓ하고, 광재가 대답하기를, ꡒ장현이 세력을 믿고 폐단을 지은 일은 신이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마는, 물건을 팔고 살 때에 그 이익을 마음대로 하고 내사를 핑계하여 남의 사물(私物)을 빼앗은 것은 신이 들었습니다. 또 신이 듣건대, 김상헌(金尙憲)이 대사헌이었을 때에 집이 제도를 넘었기 때문에 장현을 가두고 다스렸는데, 그때는 장현의 우익(羽翼)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대가(大家)의 청탁이 그래도 매우 어지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재산이 더욱 많아지고 딸이 궁인(宮人)이 되었으므로 다시 그전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은 여느 사람이나 같은 것인데, 남의 물건을 빼앗아도 감히 말하는 이가 없는 것은 그 세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한껏 의심하면서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도 대개 이 때문입니다.ꡓ하였다. 그때 인평 대군 이요가 상사(上使)로서 사사로이 무역한 것이 매우 많았고, 장현이 궁인의 아비로서 내사를 핑계하여 남잡한 일이 많았으므로 대론이 이 때문에 나왔다. 그런데 상의 뜻이 장현 등을 감싸는 데에 있었으므로 유철이 뜻을 맞추느라 그 실상을 숨기니, 청의가 더럽게 여겼다./ 【영인본】 35 책 640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외교-야(野) / *무역(貿易)(www.history.go.kr 2007)
유철 [記事] :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 1653 계사 / 청 순치(順治) 10년) 윤7월 3일 병신 3번째 기사/ 헌부에서 삼화의 사역으로 장현과 장찬을 죄주길 청하다/ 헌부가【집의 조복양(趙復陽), 장령 윤성(尹珹)․김옥현(金玉鉉), 지평 한진기(韓震琦)․이휴징(李休徵).】 아뢰기를, ꡒ삼화(蔘貨)는 나라에서 크게 금하는 것인데, 장현(張炫)과 장찬(張燦)이 가져간 것이 가장 많으므로 뭇 사람의 말이 시끄럽습니다. 국법을 업신여기고 이익을 마음대로 노려 방자하게 군 정상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으며, 아문(衙門)의 이자(移咨)에 수를 정하라는 말까지 있었고 보면, 이들이 가탁(假託)한 자취는 이것에 의거해도 알 수 있습니다. 장현을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이 내리자 물정이 시원하게 여기는데, 그 아우 장찬이 죄를 같이한 사람으로서 홀로 면할 수는 없습니다. 잡아다 국문하고 율문(律文)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예조 참판 유철은 사명을 받들고 강역(疆域)을 나갔는데 역관(譯官)들이 삼을 가져가 방자하게 군 일을 법에 따라 규핵(糾劾)하지 못하였고, 발문하였을 때에도 명백히 아뢰지 않은 채 전후 말을 바꾸었으므로 물의가 다 놀라워하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북경에 가는 사신을 전부터 가려 차출하여 보냈으니, 홍명하(洪命夏)를 부사(副使)로 삼는 것이 안될 것은 없습니다. 다만 홍명하가 역관들의 간사하고 외람한 정상을 논하자마자 이 때문에 특지(特旨)로 벼슬을 간 것만도 미안하기 짝이 없는데, 이번에 특별히 사신으로 차출하라는 하교가 또 뜻밖에 나왔으므로,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의혹스럽게 여깁니다. 다들 장차 ꡐ홍명하는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마치 벌받은 것처럼 되었다.ꡑ고 말할 것이니, 어찌 포용하는 덕에 손상이 없겠습니까. 홍명하를 부사로 차출하여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ꡓ하니, 답하기를, ꡒ역관들이 금하는 물건을 지닌 것은 다스려야 마땅하다. 다만 생각건대 김귀인(金貴仁)이 공초한 말에 일행 사람들이 모두 가져갔다 하였으니, 1백보이건 50보이건 마찬가지로 법을 어긴 것이다. 조정에서 알고도 버려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아서 모두 죄준다면 또한 어지러워질 것이므로, 해조를 시켜 대신에게 물어서 처치하게 하였다. 홍명하의 일은 이미 정원에 일렀다. 그리고 홍명하가 잘못한 것이 또한 한둘이 아닌데, 어찌하여 역관들을 논한 것을 가지고 말하는가. 이것은 내가 그대들에게 신뢰받지 못한 것이니, 참으로 부끄럽다. 유철의 일은, 들은 것이 가탁이라도 본 것은 가탁이 아니었으니, 어찌하여 반드시 죄주어야 하겠는가.ꡓ하였다./ 【영인본】 35 책 640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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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