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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22-3:윤이도(1677.8.11하직-1678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5.09.05 06:42:34

  예천고을원 122-3 : 윤이도(1677.8.11하직-1678이임) : 정산서원에 사액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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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도 [記事] : 국역비변사등록 새창/ 기사제목 領議政 徐宗泰 등이 입시하여 倭人이 요구한 서식 변경의 문제에 대해 논의함/人才別薦別單 ./ 왕 재위년도  숙종 37년  / 월일  숙종 37년(1711) 6월 3일 / 이번 5월 27일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입시하였을 때에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어제 동래부(東萊府)의 장계로 인하여 왜인 서식의 일로 특교(特敎)가 계셨으나 미처 회계하지 못하였는데 문자로는 상세히 다 말씀드리기가 어렵겠기에 오늘 입대하여 품정하겠다는 뜻으로 계사를 올렸던 것입니다. 계사 중에서 이미 대략을 아뢰었으나 대체로 관백(關白)은 그 나라 국정을 맡은 신하입니다. 그러므로 당초에 제 나라에서 버젓이 왕(王)으로 호칭하지 못하고 혹 대장군(大將軍)이라고 칭한 듯하오나 왕의 일을 실지로 행하여 국왕으로 일컬어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만력(萬曆) 정사년 (광해 9년(1617)) 이래로 왕복한 국서(國書)의 서식에서는 일본국왕(日本國王)으로 쓰다가 숭정(崇禎) 을해년 (인조 13년(1635)) 에 대마도의 서계(書契)에서 평조신(平調信)의 일로 관백을 떠받드느라 처음으로 대군(大君)이란 말이 있어 조정의 회답 서식에서도 비로소 대군이라고 썼습니다. 대군이란 말이 비록 존귀한 칭호이기는 하나 그때에는 필시 그들의 소청에 의해서 썼던 것이기 때문에 저들도 그 칭호를 받고도 말이 없어 그대로 관례가 된 것이나 고거할 만한 곳은 없습니다. 지금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아도 실린 곳이 없고 비국에 『접왜식례(接倭式例)』 한 권이 있는데 거기에는 무인년 (인조 16년(1638)) 에 왜인의 소청에 의하여 대군으로 고쳐 불렀다고만 말하고 그 연유는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식을 바꾸어 써 달라는 청이 그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마 혹시 관백이 새로 들어서서 매사를 자긍(自矜)․자대(自大)하기 위하여 이 국왕이 옛 서식에 따라서 써 달라는 듯하니 외람되이 우리를 모멸하는 따위는 아니라고 봅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옛날에는 강호(江戶)에서 우리 조정에 서계(書契)를 직접 보낸 일도 있었으나 이는 폐지된 지 이미 오래이고 비록 대마도로 하여금 뜻을 전하게 하였다 하더라도 서식은 중대한 일인 만큼 그 사유를 말하고 공손한 뜻을 나타내면서 간곡하게 청하였다면 조정에서도 의당 들어 주고 고쳐 주었지 어찌 굳이 고집하기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고 통신사가 차정된 지 이미 오래이고 근일에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할 때에도 한번도 이 일로 말한 적이 없다가 이제 와서 국서가 이미 작성되고 사신이 바다를 건너갈 날이 임박하여서야 비로소 서계를 보내서 청하였으니 이는 대마도의 잘못이 아닙니다. 저들 나라에서 예단(禮單)과 이 일을 어렵게 여김이 없이 말을 보내서 저희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것이니 어떻게 그들 말만 따라주겠습니까? 마치 지시나 하는 것처럼 하는 일은 성상의 하교처럼 엄히 거절하여야 합니다. 오늘 품정할 바는 서계를 받을 것인지의 여부에 있사온데 여러 의논은 더러 동래부에서 자체로 한 것처럼 하여 변신(邊臣)으로 하여금 거절하고 받지 못하도록 하여 그들의 뜻을 꺾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마는 신의 생각으로는 당당한 대조(大朝)에서 하필이면 절대 올려 보내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사리에 의거하여 대답해도 무방하다고 여겨지옵니다. 답하기를 '비록 구례(舊例)가 있기는 하나 지금의 서식도 행해온 지 이미 70여 년이 되었으니 갑자기 호칭을 바꿀 수 없고 더구나 국서가 이미 작성되고 사신의 행차가 이미 출발하였는데 졸지에 청하는 것은 사체가 전도되었으므로 들어줄 수 없다. 그러나 후일에는 혹 구태여 난색을 표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은 아뢰기를  "서식을 고치는 것은 예절에서도 큰일인 만큼 저들이 만일 이러한 뜻이 있었다면 대차왜(大差倭)가 나와서 절목을 강정할 때에는 어찌 언급도 하지 않다가 이제 사신이 떠난 뒤에야 갑자기 발론한답니까? 동래부에서 서계를 받지 않은 것은 사실 체통을 얻은 것입니다. 신의 처음 뜻도 동래부로 하여금 끝내 엄히 거절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금번에 만력(萬曆) 정사년에 고(故) 상신(相臣) 오윤겸(吳允謙)이 통신사가 되었을 때에 종사관(從事官) 고 판서 이경직(李景稷)의 일기(日記)를 찾아보니 관백의 답서에 다만 일본국 원수충(源秀忠)은 삼가 재배상서(再拜上書)한다고만 하였기 때문에 그때의 사신이 만일 왕(王)이라 칭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우리나라와 대등한 예(禮)가 되겠느냐 하고 기어코 왕 자를 쓰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서식에 왕 자를 쓴 것은 실로 우리 쪽에서 발의한 것이니 왜인들이 혹 그 일을 알고 탈을 잡고 말한다면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동래부에 분부하여 대마도의 서계를 올려 보내게 하고 당초에 대차왜가 나왔을 때에 강정하지 않고 졸지에 청하는 것은 사체가 전도되었으므로 우선은 들어줄 수 없다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답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조상우(趙相愚)는 아뢰기를  "동래부에서 장계가 올라온 뒤에 군하(群下)는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고 성상께서도 통악스럽고 해괴하다 하신 하교가 계셨습니다. 의당 한결같이 성상의 뜻에 따라 준절한 말로 엄히 거절하여야 마땅하오나 지난 일을 취고(取考)해 보니 정사년에 왕이란 호칭이 우리나라 통신사의 강청에서 나온 것이고 애당초 저들이 방자하게 자대(自大)하려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지금에 못이기는 듯이 들어주어도 방해로울 것은 없겠습니다. 다만 대차왜가 왕복하며 절목을 강정할 때에는 한 마디도 여기에 언급이 없다가 이제 통신사가 글을 가지고 길을 뜬 뒤에 졸지에 발론하였으니 그들이 매사를 저희 뜻대로 하려는 습성이 전부터 의례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는 의당 엄히 거절하여야 하겠으나 그래도 어렵다는 뜻으로 완곡하게 말을 만들면 교린(交隣)하는 도리에서나 신중히 하는 뜻에서 가히 양득(兩得)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대마도의 사정은 어쩐지 모르겠으나 만일 강호(江戶)에 회답을 보냈다면 사신 행차가 중도에서 지체하는 염려가 있을 터이니 이 일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새로 나온 왜인의 말이 서계를 전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강호에서 무거운 죄를 받게 된다고 말하였다는데 그 실정을 생각해 보면 그럴 듯도 싶습니다. 외론은 도주(島主)가 연전에 서계를 받지 않은 죄가 있으니 지금은 꼭 그 서계를 물리쳐야만 사체가 엄하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마도에 그 죄가 있다 하더라도 조정은 관대하여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와 견주어 그런 짓이야 하겠습니까? 도주는 우리나라에 속번(屬藩)과 같으니 지금 만일 그 서계를 받아 그로 하여금 강호에서 죄를 받지 않게 해 준다면 그도 사람인만큼 혹 감동하여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제신들도 차례로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행병조판서 최석항(崔錫恒)은 아뢰기를  "관백(關白)의 칭호를 혹은 국왕(國王)이라고도 칭하고 혹은 대군(大君)이라고도 칭하는데 우리나라 서계에서는 저희들이 쓰는 대로 따라서 쓰면 불가할 것이 없겠으나 다만 통신사를 청한 지가 3년 전의 일이고 칭호를 복구하는 일은 관계된 바가 중한만큼 만일 대차왜(大差倭)가 나왔을 때에 이런 뜻으로 여쭈었다면 허가해도 좋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통신사의 출발이 이미 오래 되어 곧 배에 오르게 된 뒤에야 졸연히 와서 고하기를 마치 지시나 하는 것처럼 하니 그 교만 방자하고 남을 경멸하는 습성이 참으로 놀랍고 통악스럽습니다. 지금은 '이렇듯 중대한 일을 대차왜가 나왔을 때에 어찌 알리지 않고 서계가 이미 작성되고 통신사가 출발한 뒤에야 갑자기 와서 말하니 사세가 들어줄 수 없다.'는 뜻으로 답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우참찬 이언강(李彦綱)은 아뢰기를  "대체(大體)로 말하자면 서식의 개정은 우리에게는 별로 손상될 바가 없다 하겠습니다. 만력(萬曆) 정사년 (광해 9년(1617)) 의 이경직(李景稷) 일기에는 왕 자를 쓰도록 청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 전년인 병진년의 강호(江戶) 서계에서 이미 일본국왕 원수충(源秀忠)이라고 썼으니 정사년에 왕 자를 쓰지 않은 것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또 을해년 (인조 13년(1635)) 의 도주(島主) 서계에 우리 대군(大君)이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회답 서계에서도 귀 대군이라고 칭하였고 이미 서식이 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경전(經傳) 중의 글 뜻으로 말하자면 대군이란 칭호는 국왕보다 높은 듯도 하지만 왕을 고쳐 대군으로 칭할 때에 우리나라에서 난색을 표하지 않았었으니 지금에 와서 칭호를 회복해 달라는 청에 난색할 것은 없겠습니다. 다만 사신 행차가 이미 국서를 받들고 조정을 하직하고 떠났으니 추후로 고쳐 달라는 것은 이미 전도된 듯합니다. 지금 만일 절목(節目)을 강정한 뒤에 서식을 고치는 것은 사체에 온당치 못하다 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저들도 필시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행훈련도정 윤취상(尹就尙)은 아뢰기를  "소신의 의견도 이언강(李彦綱)이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하고, 예조참판 김진규(金鎭圭)는 아뢰기를  "신은 비국의 계사로 인하여 춘추관 당상으로써 춘추관에 나아가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실록』을 상고한 뒤에는 의례히 서계(書契)하여야 하오나 등대할 시각이 박두하였기 때문에 미처 서계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실록』을 상고한 일을 먼저 아뢰고 다음에 소회를 아뢰겠습니다. 신이 사관(史官)과 함께 인조조 실록을 상고해 보니 을해년 겨울에 대마도의 서식이 바뀐 일이 있는데 중조(中朝)의 연호도 쓰지 않고 간지(干支)만 썼으며 또 예조당상합하(禮曹堂上閤下)의 합하를 족하(足下)로 고쳤기 때문에 인조대왕께서 받지 말라고 하셨으나 묘당에서는 사소한 예절로 굳이 다툴 것이 없다 하고 받기를 청하고 다만 족하의 호칭만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서계가 바로 괴원(槐院 : 승문원의 별칭 )의 등록에 실려 있는 대군으로 바꾸어 칭한 서계이나 호칭을 바꾸었다는 말은 나타난 곳이 없습니다. 괴원등록 중에는 병자년 봄에 예관(禮官)이 을해년에 온 서계의 답서를 썼는데 역시 대군으로 칭하였으나 『실록』에는 이 글이 실리지 않았고 그해 통신사를 들여보낼 때에도 필시 서계가 있었을 터이나 사신을 들여보낸 일까지 아울러 기록되지 않았으며 다만 정축년 (인조 15년(1637)) 3월에 귀환한 통신사 임광(任?)․김세렴(金世濂)․황호(黃?) 등을 인견하셨을 때에 왜인의 정세를 하문하신 얘기만 실려 있었고 호칭에 대해서는 거론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있을 때에 지은 ≪접왜식례(接倭式例)≫에는 무인년 (인조 16년(1638)) 에 왜인이 나와서 대군으로 호칭을 바꾸기를 청하여 조정에서 따랐다고 되어 있으나 ≪실록≫에는 무인년 한 해에는 원래 이러한 일이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는 문적이 갖추어지지 않아 대군으로 개칭하게 된 곡절을 상고할 길이 없습니다. 또 ≪교사촬요(巧事撮要)≫ 접대왜인조(接待倭人條)에는 저들 국왕 앞에 사신을 보내는 예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이르기를 '저희 국중에서는 감히 왕이라 칭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그 왕이란 칭호는 저희 나라에서는 감히 칭하지 못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칭하였던 것입니다. 선조조 경인년 (선조 23년(1590)) 에 통신사가 들어갔을 때에 그들 국왕 앞으로 보낸 우리의 국서에 일본국왕이라는 호칭이 있었고 임진란(壬辰亂) 뒤 을사년 (선조 38년(1605)) 에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사이에 들어 다시 통화(通和)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병오년 (선조 39년(1606)) 에 조정에서는 박대근(朴大根)으로 하여금 왜인 귤지정(橘智正)과 교섭하게 하였는데 귤지정(橘智正)이 이르기를 '통서(通書)는 전례인 만큼 일본국왕으로 써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손문욱(孫文彧)으로 하여금 귤지정(橘智正)과 교섭하게 하였는데 손문욱(孫文彧)이 말하기를 '의강(義康)은 반드시 국왕이라 칭해야 한다 하고 우리나라의 국서에서도 국왕이라고 칭할 수 있다.'하여 잇달아 경인년의 일까지 언급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국왕이란 칭호는 그 유래가 오래인 것입니다. 정미년 (현종 8년(1667)) 에 통신사를 보낼 때에는 국서에서 조선국왕 성휘(姓諱)는 일본국왕에게 글을 보낸다고 하였고 강호(江戶)의 회답 서계에서는 다만 일본국왕 수충(秀忠)이라고만 쓰고 봉작(封爵)은 쓰지 않았는데 이는 정미년의 통신부사(通信副使) 경섬(慶暹)의 소기(所記)에 있는 말입니다. 병진년 (숙종 2년(1676)) 의 왜인 서계에서는 일본국왕 원수충(源秀忠)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번에 동래부에서 베껴 보낸 옛 문서에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사년에 이경직이 사신으로 갔을 때에 기록한 바로는 저들의 답서에 왕이란 칭호를 쓰지 않아 우리 사신이 왕이라고 칭하지 아니하면 대등한 예가 될 수 없다 하고 왕의 칭호로 고쳐 쓰기를 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내 이대로 준행하여 갑자년 (인조 2년(1624))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을해년에 호칭을 바꾼 일은 괴원등록에 보이는데 대체로 대마도주가 평조흥(平調興)과 각립(角立 : 서로 세력을 다툼 )하다가 평조흥(平調興)이 죄를 받게 되자 도주가 우리 나라에 기쁨을 알려 왔는데 그 서계에서 처음으로 저들 관백(關白)을 '우리 대군[我大君]'이라고 칭하여 우리 나라의 답서에서도 그들을 따라 왕이라고 칭하다가 중간에 대군으로 고친 것인데 이제는 또 왕의 칭호로 복구하는 것은 어쩌면 나라의 법제(法制)가 장전(章典)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어떠한 곡절이 있었는데도 우리가 듣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비단 저들이 고쳐서 부르게 된 곡절만 모를 뿐아니라 우리가 저들의 호칭을 따라서 부른 연유도 나타나 있는 곳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떻게 저들 서계에서 '우리 대군'이라고 칭하였다 하여 우리나라에서 그들을 따라 귀(貴) 대군(大君)이라고 불러 그대로 전례가 될 이치가 있겠느냐? 반드시 곡절이 있었을 터이지만 『실록』에 실리지 않았으니 참 허술하였다 하겠다." 하였다. 김진규(金鎭圭)가 아뢰기를  "허술하였음은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사옵니다. 우리나라의 문적이 상고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아서 저들과 논란할 즈음 근거를 대어 명백하게 말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이 점이 민망스럽습니다. 대체로 저들의 왕 칭호는 새로 만든 것도 아니고 참람한 것과도 다르니 굳이 방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나 근래에 왜인들은 모든 일을 오직 저희 뜻대로 하려하고 또 꼭 하고야 말았습니다. 명호(名號)와 서식은 관계된 바가 중대한데 당초에 절목을 강정(講定)할 때에 미리 알리지도 않고 이제 사신이 국서를 가지고 떠난 뒤에야 황급하게 서계(書契)를 보낸 것은 사체에 몹시 전도된 일일 뿐더러 성신(誠信)으로 교린(交隣)하는 도리에서 어긋납니다. 저들이 과연 왕의 호칭을 복구하여 서식을 고치려고 하였다면 의당 그 사유를 분명하게 말하고 청했어야 하는데 이번의 그들 서계에서는 조금도 그 곡절은 드러내지 않고 급작스럽게 강요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우리나라를 경멸하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예단(禮單)을 제폐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또 이와 같으니 이 뒤로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버릇이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 소청이 고사(故事)가 있었던 일이고 이번 서계가 만서(慢書)와는 다름이 있으므로 변신(邊臣)으로 하여금 거절하고 받지 못하게는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조정으로 받아 올리게 하여 답서를 써서 보내기로 한다면 왕래하는 동안 필시 지체될 것이고 또 조정에서 저들 서계에 졸지에 답하면서 그 가부를 논한다면 비단 사체만 하찮게 될 뿐 아니라 앞으로는 여지도 없을 것입니다. 동래부로 하여금 그들이 가지고 온 글을 받게 하고 그들에게 말하게 하기를 '이 일은 고사가 없지 않고 중간에 고치는 것이 근례(近例)가 되다시피 하긴 하였다. 참으로 칭호를 복구할 일이 있었다면 네가 두 나라 사이에 있으면서 사신 행차의 절목을 강정할 때에 미리 그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서식을 고쳐달라고 청했어야 옳은데 이제 졸지에 사신이 길을 뜬 뒤에 이 말을 꺼내고 또 그 곡절도 말하지 않은 것은 자못 경근(敬謹)하고 성실한 도리가 아니다. 또 국서가 이미 이루어진 마당에 변신이 어떻게 감히 이 글을 받아 올려 고치기를 뒤미처 청하겠느냐? 이는 사리에 당치 않으니 상문(上聞)하지 못하겠다.'하고 예조로 보낸 글을 물리쳐 버린다면 저들이 듣고 필시 말이 있을 것이므로 그럴 즈음 그들의 사정을 차차 정탐하고 사태의 추이를 보아가면서 다시 의처할 일입니다." 하고, 병조참판 윤지인(尹趾仁)은 아뢰기를  "전후로 왜국과 왕래한 문서를 대략 보건대 관백(關白)을 장군(將軍)이라고 칭하다가 국왕(國王)이라고 칭하고 또 대군(大君)이라고 칭하는 등 변경이 무상(無常)하였습니다. 왕에서 대군이라고 칭함에 있어서는 저들의 존비(尊卑)와 등급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 수는 없사오나 전장(典章)이 미비하여 그때그때 칭호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체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기왕 교린하는 나라의 임금으로 관백을 대하고 있으므로 관백의 호칭이 낮아 우리나라와 대등하지 못한 것으로 되려 우리나라에 흠결(欠缺)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 점은 정사년에 통신사가 쟁집하여 저들 답서에 기어코 왕(王) 자를 써 넣게 하기로 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제 와서 그 왕이란 칭호를 복구해 주는 것은 본래 지난(持難)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사신 행차의 절목을 강정할 때에 이러한 큰 문제는 의당 먼저 결정을 지었어야 하는데 이제 추후하여 청한 것은 극히 전도된 일입니다. 이제는 이렇듯 중대한 일은 도주(島主)의 말만 믿고 고쳐 줄 수는 없는 일이고 반드시 강호(江戶)의 복구를 청한 문적이 있는 연후라야 고칠 수 있는데 사신 행차가 이미 떠났으므로 사세가 미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조사(措辭)하여 답해 보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공조참판 권상유(權尙游)는 아뢰기를  "그들이 왕이라고 칭하고 군이라고 칭한 문적은 일정하지 않으나 전장이 정해지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은 사실이 아닐 듯합니다. 대체로 국왕의 칭호로 복구하는 일은 그 관계된 바가 얼마나 중차대합니까? 대마도의 차왜(差倭)가 이른바 '만일 서계(書契)를 전하지 못하면 강호(江戶)에 중죄를 지게 된다.'고 한 말로 보면 그들이 이 일을 중대한 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신과 제재(諸宰)들은 통신사가 하직하고 떠난 뒤에 그들의 때늦은 청으로 인하여 서식을 고쳐 주는 것은 전도된 일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옳은 말이오나 신의 옅은 소견으로는 염려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그 나라의 사정을 멀리서 헤아릴 수는 없으나 혹 그가 나라를 차지한 이래로 오랫동안 왕으로 칭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가 이제야 비로소 통일을 하였기 때문에 이렇듯 급작스럽게 와서 청하는 일이 있게 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초에 대차왜(大差倭)가 절목을 강정할 때에 이 일로 와서 강정하지 않은 것은 사세가 그럴 처지에 이르지 않았던 소치이지 우리나라를 업수이 여긴 데서 나온 것이 아닐 것입니다. 또 이번에 통신사의 출행 날짜를 물려달라고 청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이번에 서식을 고쳐 달라는 청은 결코 우연한 절목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옵니다. 그가 기왕에 왕이라 칭하고 스스로 존대(尊大)하여 통신사의 서식을 고쳐 달라고 청하여 저희 국중에 자랑하고 인심을 진압하려는 계획을 가졌다면 그 바랬던 바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만일 거절하고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찌 일이 생길 염려가 없겠습니까? 또 만이(蠻夷)와 교린하는 도리에서는 비록 얕보는 글이 있다 하더라도 옛날 제왕(帝王)은 오히려 면종(勉從)한 일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번 도주의 서계에서 운운한 바는 본래 얕본 뜻이 있지 않았고 또 조종조에 이미 허가한 전례가 있었으니 이는 배척하고 거절할 일이 아닙니다. 제신들의 말도 이미 조용하게 들어주자고 청한 바 있으나 다만 통신사가 떠난 뒤에 서식을 추후로 고치는 것은 전도된 일이라 하여 졸지에 들어주기는 어렵다고 한 것인데 이는 우리가 고집한 바가 좀스런 작은 일에 지나지 않음을 그들에게 보이는 것이 되옵니다. 좀스럽고 작은 일에 구애되어 저들 나라의 큰 소망을 저버리는 것이니 득계(得計)라 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만일 이 일로 트집을 잡고 혹 통신사가 배를 떠난 뒤에 지로선(指路船)을 내주지 않거나 혹 강호(江戶)에 들어간 뒤에 따로 성을 내는 사단이라도 있게 된다면 어찌 대단히 난처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된 뒤에야 비로소 들어준다면 이는 참으로 약함을 보이는 꼴이 되니 어찌 지금에 쾌히 허락한 것만 하겠습니까? 더구나 저들이 꼭 왕이라고 칭한 뒤라야 대등한 예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정사년에 통신사가 저들 나라에서 쟁집(爭執)한 바이기도 한만큼 이제 와서 거절하고 방색하고 하는 것은 더욱 거리가 먼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통신사가 비록 이미 국서(國書)를 가지고 떠났다고는 하나 배에 오를 시기는 아직 멀었으므로 국서를 빨리 가져다가 그 서식을 고쳐서 보내면 우리에게는 손실이 없고 저들에게는 만망(滿望)이 되므로 일이 순탄하고 무사하게 될 것으로 여겨지옵니다. 이 일은 범연히 처리할 일이 아닌 듯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강호(江戶)에서 장군이라 칭하다가 국왕이라 칭하고 혹은 대군이라고도 칭한 것은 그 변경한 곡절은 알 수 없으나 을해년 이전에는 이미 국왕이라 칭하였으니 이는 오늘날에 새로 만들어 청한 일이 아닌 것이다. 다만 서식을 고치고 안 고치는 것을 어찌 대차왜가 나왔을 때에 강정하지 않고 이제사 급할 때에 갑자기 제기하니 그 습성이 참으로 고약스럽다. 또 이 일의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가 우리나라에 손실이 있는 것은 아니로되 한 가지 두 가지 매양 그들 말에 따르다가 혹 따를 수 없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이 몹시 염려스러워 불가불 그 뜻을 꺾어야 하겠다고 여겨 당초에 반드시 엄히 척절(斥絶)해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권상유가 말한 사신이 들어간 뒤에 혹 다른 염려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선뜻 그 말이 옳음을 깨닫겠다. 과연 그러한 염려가 있다 한다면 이는 욕을 끼침이 적지 않다 하겠다. 또 도주(島主)의 글이 만서(?書)라고는 할 수 없는데 기왕 그러함을 알았다면 당초의 의견을 꼭 지킬 필요는 없으니 다시 상의하여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언강(李彦綱)이 아뢰기를  "권상유(權尙游)가 밖에 있을 때에도 이미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옛 칭호로 복구하기를 청한 것은 업수이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대체(大體)를 말하자면 들어주어도 무방하지만 다만 이미 예단의 제폐를 들어주었고 또 지금 그들 말에 따라 서식을 고쳐서 보낸다면 결국 겸연쩍은 것이 되기 때문에 당초에는 방색하자는 뜻으로 앙진하였사오나 도주가 만일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여 사신이 배에 오른 뒤에 지로(指路)를 하지 않거나 그곳에 도착한 뒤에 순탄치 못한 사단이라도 있게 된다면 몹시 난처할 것이므로 권상유(權尙游)의 말은 참으로 의견이 없지 않다 하겠습니다." 하고, 서종태(徐宗泰)는 아뢰기를  "예절에 관한 일은 외이(外夷)와 서로 다툴 것이 없으므로 권상유가 진달한 바는 의견이 없지 않은바 즉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리는 도리를 얻음이 있다고 하겠으나 매사를 그들의 말만 따르다가는 결국에는 약함을 보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들어주기가 어렵다 한 것입니다. 두 원임대신의 의견도 신 등의 의견과 대략 같았습니다." 하고, 김창집(金昌集)은 아뢰기를  "동래부의 장계로 보면 도주 역시 꼭 소청을 이루겠다는 뜻은 아닌 듯하였습니다. 서계는 올려 보내라 하고 이번에는 사체가 급작스럽고 전도되었으니 들어줄 수 없으므로 일후에 헤아려서 처리하겠다는 뜻으로 좋게 말하여 회답함으로써 필경에는 꼭 방색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보인다면 어찌 트집이 생길 염려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진규(金鎭圭)가 아뢰기를  "저들은 다만 복호(復號)만 말하고 그 곡절은 말하지 않았고 우리는 또 그 곡절은 알지도 못하고 선뜻 고쳐 쓰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 같아서는 먼저 변신(邊臣)으로 하여금 답서를 써서 복호를 하게 된 곡절과 졸연히 서식을 고쳐 쓰도록 청한 까닭을 묻게 한 뒤에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언강(李彦綱)은 아뢰기를  "비록 묻는다 하더라도 필시 말하지 않을 것이고 또 이는 물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고, 윤지인(尹趾仁)은 아뢰기를  "지금 대마도의 서계에서 조어(措語)가 공손히 청하였다 하여 저들 나라에서도 꼭 청을 이루어 보겠다는 뜻은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대마도에서는 다만 우리나라의 답서를 얻어 강호(江戶)의 질책을 면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 간에 오직 우리의 회답을 얻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있으니 겸손하게 비는 것은 필연의 세입니다. 새 관백이 들어서서 기어코 통신사를 청한 것은 대체로 저희 국중에 자랑도 하고 인심을 진압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번에 칭호를 고쳐 달라는 청은 그 소망이 가볍지 않습니다. 만일 약함을 보이게 됨을 걱정한다면 이 일을 끝까지 들어주지 말아야지 처음에는 안 들어주다가 끝에 가서는 들어주면 이는 더욱 약함을 보임에 가까워지는 것이니 역시 난처합니다." 하였다.

 

  좌부승지 박태항(朴泰恒)이 아뢰기를  "신은 해방승지(該房承旨 : 예방승지(禮房承旨) )로 입시하였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앙달하옵니다. 복호(復號)했다는 말은 실지의 말이 아닌 듯합니다. 중간에는 왕이라 칭하고 그 뒤에는 대군이라고 칭하더니 이제는 또 왕으로 칭한 것은 그 나라의 전장(典章)에는 등제(等第)와 권위가 엄명(嚴明)하지 않아 임의로 호칭을 빌어 교린(交隣)하는 사이에 존대함을 나타내보이려는 뜻인 듯하옵니다. 만일 참으로 칭호를 복구하여 왕으로 한 일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교린하는 나라에 먼저 자랑하고 장허(獎?)를 받으려 하였을 것이며 대마도의 왜인들도 어찌 소문을 퍼뜨리는 일이 없었겠습니까? 통신사가 떠날 때를 당하여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으나 교활한 왜인들의 처사는 본래 이와 같음이 많습니다. 절목(節目)을 강정할 때에는 한 마디의 말도 없다가 이제야 졸지에 고치기를 청하니 그 무엄한 작태가 몹시 밉살스럽지만 대군이라 칭하고 왕이라 칭함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무슨 손익(損益)이 있겠습니까? 강호에서 기왕 분부가 있었던 것이니 비단 도주 한 사람이 차왜들을 내보내서 죽음을 한하고 꼭 얻어내고 말겠다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이해도 없는 일로 결국에는 저들과 끊겠다는 말씀이옵니까? 그러나 조정에서 쟁집(爭執)도 하지 않고 그들 말에 따라 고쳐 준다면 이는 자못 까닭없는 일이 되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국서(國書)의 칭호는 관계된 바가 중대한데 사신이 싸 가지고 떠난 뒤에 도주의 한 장 서계를 가지고 와서 고쳐 써 달라는 것은 사체가 전도된 것입니다. 결코 따를 수 없다는 뜻으로 관왜(館倭)에게 책유(責諭)한다면 우리의 주장한 바가 정대하므로 저들이 혹 들을 수도 있으리라고 여겨지옵니다. 왜관과 대마도와는 아주 가까워 날으는 듯이 빠른 배의 왕래가 줄을 이으니 며칠 안으로 서로 왕래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그 답하는 바를 보아 정히 그만둘 수 없다 한다면 심히 조른 뒤에 따라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그럴 즈음 사신의 출발이 비록 한 열흘이나 혹 보름가량 늦어진다 하더라도 일만 잘 된다면 방애로울 것은 없을 듯하옵니다." 하고, 이언강(李彦綱)은 아뢰기를  "모든 대신이 이미 모두 의견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원로대신이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종전에 일본에 다녀와서 그 나라 사정을 잘 아니 비국의 낭청을 보내서 청허(聽許)하는 여부에 대하여 문의하고 한편으로는 동래부에 분부하여 서계를 받아서 올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영부사(尹領府事 : 윤지완(尹趾完) )는 전에 일본에 갔다 왔고 사는 곳이 멀지 않으니 즉시 비국의 낭청을 보내서 물어보고 온 뒤에 다시 품처하기로 하고 동래부사에게도 도주(島主)의 서계를 받아 보내라고 분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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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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