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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22-7 : 윤이도(1677.8.11하직-1678이임) : 정산서원에 사액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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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신의 아들은 곧 친혐(親嫌)이 있는 자였는데, 다음날 외의(外議)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와서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무인년9816) 합제 때에는 끝내 폐각(廢閣)하기에 이르렀고, 지난해 학당(學堂)의 시취(試取)는 사람들의 말 때문에 모두 삭제하였으니, 지금도 이 전례에 의거하여 삭파(削罷)시킴으로써 중외(中外)의 비방을 해소시켜야 합니다. 산원(算員) 김필정(金必禎)은 본디 글씨에 능하다고 일컬어졌으므로, 회시(會試) 때 그의 손을 빌고자 하는 자가 있었는데, 김필정이 대술(代述)하여 합제(合製)에서 장원(壯元)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땅히 시원(試院)으로 하여금 자획(字?)을 조사, 비교하게 하여 차서인(借書人)과 입격자(入格者)를 아울러 발거(拔去)시키면, 이 또한 징계 면려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촌(四寸)이면 상피(相避)9817) 하고, 외속(外屬)과 처당(妻黨)도 모두 이를 기준으로 삼는데, 유독 종손(從孫)만 상피하지 않습니다. 만약 복(服)의 경중과 성(姓)의 이동(異同)을 논하지 않고, 모두 상피하게 한다면 간위(奸僞)를 방지할 수가 있습니다. 알성시(謁聖試)․정시(庭試)9818) 를 합고(合考)하여 당락시키는 것이 오로지 독권 대신(讀卷大臣)과 주문신(主文臣)에게 달려 있는데, 친속에 대한 혐애(嫌?)가 없으니, 전후에 의심하여 비방한 것이 대개 여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법식을 정하여 부자와 형제는 상피(相避)하게 하소서. 승보(陞補)와 합제(合製)가 사정(私情)을 행하기가 제일 쉬우니, 대사성(大司成)과 사학 겸관(四學兼官)에게는 아울러 상피법을 적용시킴으로써 사정을 막는 방편이 되게 하소서. 바라건대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워 사문(私門)을 막으소서.ꡓ하자, 임금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니, 예조(禮曹)에서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ꡒ김필정(金必禎)은 이미 지명(指名)되었으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마땅히 시원(試院)에서 그 필적(筆跡)을 조사하여 모두 발거(拔去)해야 합니다.ꡓ하였다. 이에 신방(新榜)의 진사(進士)인 홍중주(洪重疇)가 김필정과 합제(合製)의 동접(同接)으로 회시(會試) 때 차서(借書)했다는 내용을 자수하여 정장(呈狀)하니, 예조에서 또 아뢰기를, ꡒ대술(代述)에 대해서는 지금 추핵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나 과장(科場)의 사목(事目)에는 이미 사수(寫手)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데리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여 차서율(借書律)을 완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발거(拔去)시키소서.ꡓ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였다. 위에 판부사(判府事) 윤지선(尹趾善)이 의논하기를, ꡒ박권(朴權)의 상소에서 이르기를, 기사년9819) 이후는 모두 출제를 미리 알려주어 합격되었고 갑술년9820) 이후는 모두 사정에 의하여 합격되었다.ꡑ 하였는데, 이는 위로 성총(聖聰)을 현혹시키고, 아래로 조정을 무고한 것으로, 신(臣)은 삼가 개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승학시(陞學試)9821) 에는 법에 상피하는 조항이 없는데 이제 비슷함을 의심하여 사정을 쓴 것으로 귀착시켜서, 아울러 삭제 시킨다면 이야말로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너무 곧게 만드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종손(從孫)과 상피하는 것은 국전(國典)에 없는 것이고, 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전시(殿試)에는 임금이 친림(親臨)하는 것이 법이고, 또한 거자(擧子)들에게도 상피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헌(成憲)을 고치는 것이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ꡓ하고, 우의정(右議政) 이세백(李世白)은 의논하기를, ꡒ이번 이 반제(泮製)에 대해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게 답지하고 있습니다. 과차(科次)9822) 하여 출방(出榜)할 적에 등제(等第)를 바꾸어 처음에는 합격되지 않았던 사람이 나중에 합격되었다는 것은 대부분 예관(禮官)들이 말한 것이니, 시관(試官)이 스스로 근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거자(擧子)들의 죄가 아니니, 수교(受敎)에 의하여 시관을 죄주는 예(例)에 따라 처치(處置)해야 마땅합니다. 상피의 조항은 이미 그 근본을 잘 바로잡지 못하고 부질없이 영갑(令甲)만 고치는 것은, 화살을 겨냥하는 대로 따라다니며 과녁을 세우는 격과 너무도 흡사합니다.ꡓ하니,임금이 하교하기를, ꡒ말로(末路)에 과장(科場)이 엄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어찌 기사년 이후에는 모두 출제를 미리 알려주었고, 갑술년 이후에는 모두 사정(私情)을 행했을 리가 있겠는가? 박권(朴權)의 말은 편파스럽고 의혹스러워 내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정을 쓴 자취가 드러나면 분명히 조사하고 철저히 구핵(究?)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과거를 치르고 나서는 그때마다 불공 부정(不公不正)했다고 의심한다면, 나는 두려워할 만한 부의(浮議)가 더욱 분운(紛?)함을 금하지 못하게 되어 그 폐단이 과거를 설행(設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까 두렵다. 이번의 반제(泮製)가 의심스럽다고는 하지만, 고관(考官)이 사정을 쓴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책임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판부사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라. 승학시에 상피하는 것은 새로 만들 수 없으니, 서서히 의논하여 조처하라.ꡓ하였다. 판결사(判決事) 윤이도(尹以道)가 박권의 상소 때문에 인혐(引嫌)하여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다. 대개 윤이도가 바로 초시(初試)의 고관(考官)이었는데, 그의 종손 두 사람이 합격되었기 때문이었다. 박권의 상소에서 운운한 것은 윤이도를 가리킨 것이다./ 【영인본】 39 책 524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註 9811]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 [註 9812]갑술년의 경화(更化) : 숙종 20년(1694) 소론(小論)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肅宗)의 폐비(廢妃)인 민씨(閔氏)를 복위시키기 위한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南人)의 민암(閔?)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화를 당한 사건. ☞ / [註 9813]승보(陞補) : 조선조 때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이 사부 학당(四部學堂)의 유생(儒生)에게 시험을 보여 성균관의 궐원(闕員)을 보충하던 제도. 시부(詩賦)로써 시험하였는데, 합격된 사람은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음. ☞ / [註 9814]합제(合製) : 성균관의 대사성이 매년 사학(四學)에서 선발한 유생(儒生)들에게 시부(詩賦)의 제술과 사서(四書)․소학(小學)의 배강(背講)을 시켜 우수한 자에게 생원․진사과의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던 것. ☞ / [註 9815]정축년 : 1697 숙종 23년. ☞ / [註 9816]무인년 : 1698 숙종 24년. ☞ / [註 9817]상피(相避) : 인연(人緣)․지연(地緣) 등의 관계로 공정한 정사(政事)나 자유로운 분위기가 허용되지 않을 때 그 자리를 피하거나 관직에 부임하지 않던 제도. 혹은 같은 부서(部署)에서 벼슬하는 일이나, 청송(聽松)․시관(試官) 같은 것을 피함. ☞ / [註 9818]정시(庭試) : 과거 제도에서 임금의 특명에 의하여 궁정에서 친히 시험을 보이던 일. ☞ / [註 9819]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 [註 9820]갑술년 : 1694 숙종 20년. ☞ / [註 9821]승학시(陞學試) : 조선조 때 성균관(成均館)에서 유생(儒生)들에게 학업의 진전을 시험하는 시험. ☞ / [註 9822]과차(科次) : 조선조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차례. 성적을 9등으로 나누어 2상(二上)․2중(二中)․2하(二下) 3상․3중․3하 및 차상(次上)․차중(次中)․차하(次下)로 규정하여 이로써 우열(優劣)을 가렸고 3하 이상을 급제(及第)로 하였음. ☞(www.history.go.kr 2007)
윤이도 [記事] : 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1699 기묘 / 청 강희(康熙) 38년) 3월 23일 임진 1번째 기사/ 과거의 거자가 시권을 차서한 것은 죄줄 수 없다는 예조 참판 송창의 상소/ 예조 참판(禮曹參判) 송창(宋昌)이 상소하기를, ꡒ김필정(金必禎)이 산원(算員)이기는 하지만 종전에 거업(擧業)9823) 을 연마하여 초시(初試)에 참여하였고, 또 합제(合製)에도 입격하였으니, 이는 수종인(隨從人)을 무릅쓰고 데리고 들어온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권(試券)을 차서(借書)한 것은 차술(借述)이나 대술(代述)과는 다른데도 거자(擧子)들은 대개 잘못된 것을 답습하여 다르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외의(外議)는 ꡐ비록 과죄(科罪)할 수 있으나, 방(榜)을 발거(拔去)해서는 안된다.ꡑ 하고, 《대전(大典)》에는, ꡐ차술이나 대술을 한 사람은 장(杖) 1백에 유(流) 3천 리에 처한다.ꡑ고 되어 있고, 《수교집록(受敎輯錄)》에는, ꡐ서사 서리(書寫書吏)가 대사(代寫)한 경우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킨다.ꡑ고 하였으나, 차서인(借書人)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서사 서리가 아니면서 대사(代寫)한 경우에는 이 율(律)로 논할 수가 없는데, 차서인도 따라서 차감(差減)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법령(法令)은 반드시 한 번 정탈(定奪)해야만 막히고 방애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니,바라건대 대신(大臣)들에게 수의(收議)하여 명백하게 제도(制度)를 정하소서.ꡓ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세백(李世白)이 말하기를, ꡒ대사자(代寫者)에게 이미 죄가 있다면, 차사자(借書者)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사목(事目)에는 단지 과죄(科罪)하는 데 대해서는 이를 율(律)로 정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그 뜻은 수시로 처분(處分)하기에 달려 있는 듯하니, 발방(拔榜)하는 것 이외에 무슨 율로 감단(勘斷)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ꡓ하고, 좌의정(左議政) 최석정(崔錫鼎)은 말하기를, ꡒ감시(監試)의 선비들이 반드시 모두 글씨에 능하다고는 할 수가 없으니, 같은 과장(科場) 사람의 붓을 빌릴 수도 있는 것으로, 이는 차술(借述)과는 다른 것입니다. 법전(法典)에는 차술과 대사(代寫)를 금한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차서자를 감률(勘律)한다는 조문이 없으니, 홍중주(洪重疇)를 발방(拔榜)시킨 것은 진실로 너무 억울합니다. 만일 지금부터 법식을 정하려면, 차서자는 발방하지 말고 정거(停擧)시키는 벌을 줄 것이며, 서사 서리가 아니면서 대사(代寫)한 경우에는 전가 사변의 차율(次律)인 잡인도배율(雜人徒配律)로 죄줄 것이며, 유생(儒生)은 기한을 정하여 정거(停擧)시키는 것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ꡓ하였는데, 임금이 좌상(左相)의 의논에 따라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드디어 홍중주를 복과(復科)시킬 것을 품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필정(金必禎)은 이미 초시(初試)에 합격되었으므로 난입(?入)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여 드디어 죄주지 않았다. 대사간(大司諫) 민진후(閔鎭厚)가 상소하기를, ꡒ과장(科場)은 지극히 엄한 곳이어서 죄가 있으면 발방(拔榜)시키는 것은 전례에 그렇게 하여 왔습니다. 율문(律文)에도 차술(借述)하였거나 간사한 꾀로 남을 속인 사람은 모두 수군(水軍)에 충청(充定)시킨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발방이라는 두 글자는 없습니다. 만일 혹자(或者)의 말과 같다면 수군에 충정시키는 율(律)을 범해도 발방할 수 없겠습니까? 대신들의 수의(收議)가 아울러 대과(大科)를 가리킨 것이라면, 정거(停擧)시키는 벌 또한 출신인(出身人)에게도 시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참고하여 품정(稟定)하게 해서 법금(法禁)을 범한 사람은 반드시 먼저 발방(拔榜)시킨 다음이라야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그리고 박권(朴權)의 상소(上疏)는 실로 폐단을 구제하기 위한 한 가지 방책인 것입니다. 향시(鄕試)9824) , 한성시(漢城試)9825) 에는 상피법(相避法)이 있는데 유독 승보(陞補)와 합제(合製)에만 대사성(大司成) 혼자서 취사(取捨)를 결정하는데다가 상피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국제(國制)의 허술함이 이와 같습니다. 사촌(四寸)에 해당되는 친속은 처형제와 매서(妹?)라도 상피가 있는데, 조부(祖父) 형제와 친형제의 손자는 상피가 없으니, 이는 정례(情禮)로 헤아려 보아도 근거할 데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출방(出榜)만 하면 번번이 의심스럽다는 비방을 받게 되는 것인데, 지난번 민암(閔?)의 경우와 지난 가을 윤이도(尹以道)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추후에 정제(定制)한 것이 진실로 한둘이 아닌데 유독 이에 대해서 만은 융통성이 없이 고수하면서 고치지 않는단 말입니까? 홍중주(洪重疇)이 발방(拔榜)은 오로지 합제(合製)에서 이름을 바꾸어 김필정의 필(筆)을 얻으려 한 데에 연유된 것으로, 보통으로 대사(代寫)한 경우에 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송창(宋昌)의 상소에서 익히 강론하기를 청한 것은 홍중주를 위해 신변(伸辨)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대신들이 무단히 의논을 제기하여 그가 억울하다는 것은 성칭(盛稱)하였습니다만, 그래도 감히 복과(復科)시키라고 곧바로 청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성지(聖旨)에도 의논에 따르라고 판하(判下)하고 또한 복과를 허락한 것은 아닌데, 이제 해조(該曹)에서 대신의 분부(分付)로 인하여 복과시킬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니, 재상(宰相)이 권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계품(啓稟)을 받아들인 승지(承旨)에게는 마땅히 엄한 경책(警責)을 가해야 합니다.ꡓ하니, 답하기를, ꡒ정거(停擧)를 또한 출신인(出身人)에게도 시행할 수 있겠느냐는 말은 진실로 상소의 내용과 같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기타 나머지는 지금 고칠 수가 없다. 예관(禮官)이 복과(復科)시킬 것을 계품한 것은 그 의도가 명백히 정탈(定奪)하자는 데 불과한 것인데, 무슨 노여워할 것이 있는가? 홍중주의 일 때문에 대신들을 침척(侵斥)함에 있어 있는 힘을 다 기울이고 있으니 진실로 한심스럽다.ꡓ하니, 좌의정(左議政) 최석정(崔錫鼎)이 드디어 상소를 올리기를, ꡒ과거(科擧)를 베풀어 문예(文藝)로 사람을 뽑음에 있어 그 문장이 이미 스스로 찬술한 것이라면, 그 글씨의 차부(借否)는 까다롭게 따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유(韓愈)는 팔대(八代)9826) 뒤에 문장을 일으켰지만 해자(楷字)를 잘 쓰지 못하였고, 문천상(文天祥)은 학문이 천인(天人)을 관통하였지만 생질(甥姪)에게 붓을 빌었습니다. 전배(前輩)인 명공(名公)들 가운데는 과장(科場)에서 차서(借書)한 사람이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모두 간습(奸習)이라 하여 발방(拔榜)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의논의 서두(書頭)에 감시(監試)라는 두 글자를 썼으니, 아울러 대과(大科)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여기에서 명백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관(禮官)이 홍중주(洪重疇)가 자수(自首)한 서장(書狀)을 두루 거론하고, 인하여 법식(法式)을 정할 것을 청하였으니, 신의 의논에서 홍중주를 논급(論及)한 것은 주제(主題) 밖의 얘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간신(諫臣)들이 신이 점출(拈出)한 것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 그 가운데 ꡐ이제부터 정제(定制)해야 한다.ꡑ 했는데, 이는 이번 과거(科擧)로부터 정제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홍중주는 저절로 복과(復科)시키는 데에 들게 되는 것습니다. 예관이 서면(書面)으로 문의하였으므로 신이 과연 헌의(獻議)하면서 그러한 내용으로 답했을 뿐이요, 분부(分付)한 일은 없었으니 간관(諫官)들의 말이 또한 실상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권(權)이라고 하는 한 글자는 이야말로 태상(太上)이 군중(群衆)을 주재하는 것이요, 여탈(予奪)을 주관하는 것으로, 신기(神機)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이 된 몸으로 권병(權柄)을 마음대로 휘두른다면, 이에 대한 조정의 상형(常刑)이 있는 바 그 죄는 사면(赦免)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ꡓ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답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또 김진후(金鎭厚)의 상소를 대신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ꡒ신이 이른바 정거(停擧)라고 한 것은 오로지 소과(小科)만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정시(庭試)와 알성시(謁聖試) 등 시각을 정해 놓고 보는 과거(科擧)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시권(試券)을 쓰는 사람이 열에 한두 명뿐이고, 같은 과장(科場)의 유생(儒生)에게 차서(借書)하는 것이 상례이어서 실제로 나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으로, 형세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시(監試)와 동일한 예(例)로 벌을 주는 것은 부당합니다. 마땅히 삼의사(三醫司)9827) 의 서리(書吏)들을 법을 무시하고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엄금하면 되는 것입니다. 증광 별시(增廣別試)9828) 는 모두 주초(朱草)로 역서(易書)하고 있으니 차서(借書)를 금하는 것은 다시 논할 것이 없습니다. 국가에서 법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정범(情犯)의 경중과 사리(事理)가 어떠한가를 살펴서 재처(裁處)하여야 오래도록 시행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ꡓ하고, 우의정(右議政) 이세백(李世白)은 말하기를, ꡒ해조(該曹)의 복계(覆啓)에서 이미 말하기를, ꡐ붓을 빌리는 소과(小科)와 견주어서는 안되는데, 정거(停擧)시키는 벌을 논하였으니, 아울러 소과를 지적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ꡑ 하였으니, 신은 다른 의논을 제기할 것이 없습니다.ꡓ하고, 판돈녕(判敦寧) 서문중(徐文重)은 말하기를, ꡒ신은 본디 글씨에 능하지 못하여 소과에서는 동접(同接)인 벗이 써주었고, 대과에서는 아자(兒子)가 써주었습니다. 비록 외인(外人)을 데리고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이미 스스로 쓰지 못하였으니, 지금 대사(代寫)한 것에 대해 정죄(定罪)하는 일에 감히 헌의(獻議)할 수가 없습니다.ꡓ하였는데, 임금이 좌상(左相)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영인본】 39 책 525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사법-법제(法制) / *출판-서책(書冊)/ [註 9823]거업(擧業) :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공부. ☞ / [註 9824]향시(鄕試) : 문과(文科)․생진과(生進科)․잡과(雜科) 등 과거의 초시(初試)로 각도에서 보이던 시험. ☞ / [註 9825]한성시(漢城試) : 문과(文科)와 생진과(生進科)의 초시(初試)로서 한성부(漢城府)에서 실시하던 시험. ☞ / [註 9826]팔대(八代) : 동한(東漢)․위(魏)․진(晋)․송(宋)․제(齊)․양(梁)․진(陳)․수(隋)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소자첨(蘇子瞻)이 지은 ꡐ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ꡑ에 실려 있음. ☞ / [註 9827]삼의사(三醫司) : 조선조 때 왕실의 의약(醫藥)을 맡은 내의원(內醫院)과 양반의 의약을 맡은 전의감(典醫監), 평민의 의약을 맡은 혜민서(惠民署)의 삼사(三司)를 말함. ☞ / [註 9828]증광 별시(增廣別試) : 정례(定例)로 행하는 과시(科試) 이외에 별례로 행하는 별시. 본래 식년시(式年試) 외에는 모두 별시로서, 중시(重試)의 대거(對擧), 또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특별히 요하는 과시 등을 뜻하게 되었음. ☞(www.history.go.kr 2007)
윤이도 [記事] : 숙종실록 34권/ 숙종 26년( 1700 경진 / 청 강희(康熙) 39년) 6월 23일 갑신 1번째 기사/ 권시경․윤이도 등이 과옥 죄인의 진술이 적힌 등사지에 관하여 상소하다/ 지금의(知禁義) 권시경(權是經)과 동의금(同義禁) 윤이도(尹以道)가 연명으로 소를 오려 진달하기를, ꡒ근래에 일종의 설화가 진신(搢紳) 사이에 전파되고 있기에, 이른바 그 설화의 등본이 나온 곳을 잇달아 알아보니, 재신(宰臣)에게서 나온 것은 6월 4일 좌기(坐起)10155) 때 오석하(吳錫夏)가 말하였는데, 그의 말에, ꡐ과장(科場)에 들어간 전날 저녁에 심익창(沈益昌)이 찾아와서 「과장에 들어간 후 시권(試券)을 거두어다 역서(易書)10156) 할 적에 각별히 신칙하되, 친근한 반인(泮人) 정순억(鄭順億)은 그대가 거느리고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했는데, 과장에 들어간 뒤에 정순억이 말하기를, 「시관(試官)이 측간에 가면서 불러 말하기를, 심성천(沈成川)이 초장(初場)의 글은 차하(次下)이고 종장(終場)의 것은 막 별치(別置)하고 있으나 입격되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정순억이 비록 심익창을 위하여 간계(奸計)를 부리려고 했지마는 시관이 벌써 양장(兩場)의 글을 다 알고 있었으니, 피봉을 바꾸어 주면 뒤에 반드시 탄로가 날 터인데, 어떻게 피봉을 내보냈을 이치가 있겠는가? 심익창은 곧 절친한 사이이므로 그의 부탁을 받아 정순억을 거느리고 들어갔으나, 이 밖의 여러 사람은 얼굴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ꡑ고 하였습니다. 대저 왕부(王府)에서 옥사(獄事)를 조사하는 규정은 그 범한 죄상을 캐내어 문목(問目)을 만들고, 심문에 답변한 것을 써서 공사(供辭)로 삼게 되니, 형벌을 가할 적에 만약 승복(承服)을 하지 않는다면 다시 더 신문하지 않고 곧바로 시형(施刑)을 합니다. 더구나 시형하는 곳이 10보(步)를 벗어나지 않는데, 만약 새로운 말이 나왔다면 마루 위에 있는 자가 어찌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형벌을 비준할 때가 잠깐 사이도 못 되었으니, 죄인도 긴 말을 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고, 또 당일은 문초를 받아 기초한 적도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를 듣고 어느 사람이 이를 썼기에 한 통의 문안(文案)을 만든 것이 이처럼 상세하고 정밀하겠습니까? 신들이 그날 참석한 낭청(郞廳)을 불러다 물어 보니, 더러는 측간(?間)이라는 말을 귀동냥으로 듣게 되었다 하고, 더러는 어렴풋이 들은 듯하다고 하나, 말이 명백하지 못합니다. 상략(詳略) 간에 낭청(郞廳)들이 과연 들은 데가 있는데도 신들은 귀가 어두워서 유독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혹시 낭청은 귀가 밝사서 유독 당상(堂上)이 듣지 못한 말을 들었겠습니까? 고시관(考試官)이 사정(私情)을 쓴다는 것이 어떠한 범죄이기에 죄인의 입에서 나와 낭청의 귀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당상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더러는 낭청의 문안(文案)을 쓰자고 청하였으나 당상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곧 긴요하고 중대한 말입니다.
낭청이 쓰자고 청하는 것을 당상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신들이 진실로 죄가 있을 것이며, 죄인이 이미 한 말이 없었고 낭청도 또 쓰기를 청한 적이 없었다면, 이 말은 반드시 중간에서 나온 곳이 있을 것입니다. 참석하였던 낭청을 같이 법관(法官)에 내려서 허실(虛實)을 명백히 사핵(査?)하소서.ꡓ하니, 비답하기를, ꡒ경(卿)들의 상소를 보니 나도 몹시 놀라움을 깨닫지 못하겠다. 엄중히 사실을 조사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ꡓ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일에는 차례가 있다는 이유로써 낭청을 우선 나문(拿問)할 것을 청하고, 또 권시경․윤이도의 의금부 관직을 모두 체직하도록 우선 윤허하고 그 대임을 차출하여 추핵(推?)할 바탕을 마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에 도사(都事) 심현(沈玹)․안상억(安相億)․신곡(申?)․윤세유(尹世綏)가 드디어 잡혀 왔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민진후(閔鎭厚)가 상소(上疏)하기를, ꡒ신이 두어 달 이래 줄곧 금직(禁直)에 있으므로 외간의 일은 전혀 들어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최근에 의금부의 일이 적힌 종이쪽지가 돌아다니는 것을 얻어 보았으니, 허실(虛實)이 어떠한지는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였더니, 이제 듣건대 의금부 당상의 상소 안에 일컬은 재신(宰臣)이 대개 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시험삼아 그 상소로써 살펴보더라도 그날 참석한 낭청이 다 들었다고 한다면, 또한 어찌하여 신에게 직접 관계되는 일로써 돌아다니는 등사지에 큰 비중을 두겠습니까? 신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으면서 언어로 대질하는 틈에 끼어들었다는 것은 그 수치됨이 큽니다.ꡓ하고, 좌참찬 이언강(李彦綱)이 또 상소하기를, ꡒ사서(司書) 민진원(閔鎭遠)을 통하여 민진후(閔鎭厚)의 처소에 있는 문자를 보고 이어 중신(重臣)에게 돌려 보였으니 이 한 가지의 일만 가지고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ꡓ하니, 임금이 모두 사피(辭避)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영인본】 39 책 567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註 10155]좌기(坐起) : 관의 으뜸 벼슬아치가 집무함. ☞ / [註 10156]역서(易書) : 시관(試官)이 시험 답안지에 쓴 응시자의 필체(筆體)를 알아보고 사정(私情)을 두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다른 사람을 시켜 모든 답안(答案)의 개서(改書)를 하게 하는 일. 이 역서한 답안을 가지고 시관이 채점(採點)함. ☞(www.history.go.kr 2007)
윤이도 [記事] : 숙종실록 34권/ 숙종 26년( 1700 경진 / 청 강희(康熙) 39년) 6월 29일 경인 1번째 기사/ 헌납 유중무가 과옥에 관한 등사지의 출처를 조사하자고 건의하다/ 헌납(獻納) 유중무(柳重茂)가 논핵하기를, ꡒ죄인을 추문(推問)할 적에 진실로 공사(供辭)한 것이 있었다면 온 헌부(憲府)에서 들었을 것이므로 마땅히 다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상은 듣지 못하였다 하고, 낭청은 들었다고 하는 것은 실로 의심스러우니, 모두 함께 나문(拿問)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시경(權是經)․윤이도(尹以道)를 나문하소서.ꡓ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핵하기를, ꡒ왕옥(王獄)의 사체(事體)는 지극히 엄중한 것이므로, 만약 등사한 원서(爰書)10158) 가 아닌 것으로 공안(公案)을 만들었다면 신빙하여 증거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른바 등본의 문자가 이미 죄인의 글이 아니고, 올린 과정도 또 공가(公家)에서 올린 것이 아니고 보면, 그 말의 허실(虛實)을 막론하고 곧 안에서 만들어 낸 한 장의 이름 없는 글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지고 죄수의 원서(爰書)처럼 보아 왕부(王府)의 추안(推案)을 삼는다는 것은 소인(小人)의 계략에 빠져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기에 알맞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미 재신(宰臣)의 전달에서 나오고, 또 중신(重臣)의 소(疏)에까지 올라서 안핵(按?)하는 조치까지 있었습니다. 당초 글을 전한 자는 반드시 그 사람이 있을 터이므로, 점차 추힐(推詰)한다면 차례의 내력을 캐어내지 못할 이치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금부로 하여금 먼저 등본(謄本)이 나온 곳을 캐어서 문자를 조작해 낸 사람을 명백히 안 다음에 차례로 의금부 당상과 낭청을 추힐(推詰)해서 사실을 조사하여 옥체(獄體)를 엄중히 하소서.ꡓ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 39 책 567 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註 10158]원서(爰書) : 죄인의 범죄 사실을 조사한 문서.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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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