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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뤈141-11:조영복(1714.7.8제수-동년.7.25하직-1715.5.11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6.06.16 06:32:07

  예천고을원 141-11 : 조영복(1714.7.8제수, 동년.7.25하직-1715.5.11이임) : 재임 도중 과거에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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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의정 김창집, 영부사(領府事) 이이명, 좌의정 이건명, 우의정 조태구,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 판돈녕(判敦寧) 송상기(宋相琦), 행 좌참찬(行左參贊) 최석항(崔錫恒), 공조 판서 이관명(李觀命), 이조 판서 권상유(權尙游), 병조 판서 이만성(李晩成), 예조 판서 이의현(李宜顯), 행 사직(行司直) 이광좌(李光佐), 청은군(淸恩君) 한배하(韓配夏), 형조 참판 이조(李肇),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연(金演), 예조 참판 이집(李?),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태좌(李台佐), 병조 참판 김재로(金在魯), 이조 참판 이병상(李秉常), 행 사직(行司直) 이정신(李正信), 승지(承旨) 홍계적(洪啓迪)․한중희(韓重熙)․안중필(安重弼)․유숭(兪崇)․조영복(趙榮福), 사간(司諫) 어유룡(魚有龍), 응교(應敎) 신절(申?),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 교리(校理) 이중협(李重協),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 정언(正言) 신무일(愼無逸)․황재(黃梓) 등이 입시(入侍)하였는데, 김창집이 말하기를, ꡒ천만 뜻밖에도 갑자기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받들었으므로, 신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쟁(廷爭)하였으나 천청(天聽)을 감회(感回)하지 못하였는데, 어젯밤에 또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줄곧 버티며 떠드는 것도 감히 할 수 없는 바가 있어서 아침에 차자를 올려 앙품(仰稟)한 바가 있었는데, 이제 우상(右相)의 입대(入對)로 인하여 같이 들어올 수 있었으니, 신 등이 힘써 다투지 못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ꡓ하고, 조태구는 말하기를, ꡒ오늘 천안(天顔)을 뵐 수 있으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신은 비망기를 갑자기 내리셔서 중외가 놀라고 당황한다는 것을 듣고는 감히 제 자신이 대간의 탄핵을 입었다 하여 시골 집에 물러가 있을 수 없었으므로, 성 밖에 와 엎드려 여러 차례 상소로 진달하고 호소하였으나, 유음(兪意)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대신이 정청(庭請)을 이미 정지했다는 것을 듣자 신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사생(死生)을 걸어 반드시 다투고자 감히 와서 청대(請對)하여 천의(天意)를 돌이키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는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곧 온 나라 사람의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화열(火熱)이 오르내림 때문에 기무(機務)를 사양하려고 하시지만, 화열이 오를 때는 잠시 재결을 정지하시고 화열이 내려 마음이 안정되고 뜻이 평탄해지기를 기다리신다면, 저절로 연기처럼 사라지고 안개처럼 흩어져 뜻과 생각이 맑고 밝을 것입니다. 이와 같을 때 일이 닥치는 대로 순조롭게 응하신다면 사무에 적체됨이 없어 병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두 가지 일이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생각이 이에 미치지 아니하십니까? 국가는 전하의 국가가 아니라 곧 조종(祖宗)의 국가입니다. 영고(寧考)743) 께서 전하께 부탁하신 것이 어떠하며, 신인(神人)이 전하에게 의귀(依歸)744)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대보(大寶)745) 의 자리는 인군(人君)이 스스로 사사로이 하는 곳이 아닙니다. 전사(前史)를 두루 상고해 보아도 인주(人主)가 한갓 한 몸의 사사로움을 따라 경솔하게 행한 것이 전하의 오늘날 하시는 바와 같은 것은 있지 아니합니다. 흰 머리의 늙은 신하가 유궁(遺弓)746) 하는 날 죽지 못하고 오늘날 이 일을 차마 보게 되었으니, 신이 이것을 광구(匡救)하지 못하면 다만 전하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또한 선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신이 살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만일 반한(反汗)의 명을 얻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며, 청을 허락받지 못하면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ꡓ하고, 이어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여러 신하가 각각 차례차례 반복해서 진청(陳請)하고 이광좌․유복명이 더욱 힘써 다투었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ꡒ어제의 비지(批旨)는 더욱 차마 듣지 못할 것이 있었으나, 밤이 깊어진 뒤라 글로 다시 계달하기 어려웠고, 또 절차가 복잡하여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까 두려워 감히 절목(節目)을 거행할 뜻을 차자(箚子)로 품(稟)하였으니, 실로 부득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 신하가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반드시 도로 거두시게 하려는 뜻이 신 또한 어찌 여러 신하와 다르겠습니까? 이제 만약 전의 명을 도로 거두신다면, 신이 비록 만 번 죽을지라도 어찌 감히 마다 하겠습니까?ꡓ하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ꡒ날마다 연달아 청대(請對)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하였고, 소회(所懷)를 아뢴 것이 아침에 들어가 저녁에 비로소 내려졌으니, 이와 같은데 어찌 감히 천심(天心)을 감회(感回)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어젯밤의 전교는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일이므로, 곧장 땅을 뚫고 들어가려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2품 이상을 모아서 물었으나 말한 바가 각각 같지 아니하므로, 신 등이 반복해 생각했지만 어쩔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을유년747) 에 선대왕(先大王)께서 비망기를 내렸을 적에 고(故)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이 여러 대신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ꡐ군하(群下)가 힘써 다투었으나 만약 혹시 난처한 지경에 이른다면 우선 순종하여 사무를 참결(參決)하기를 청하는 것이 낫다.ꡑ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진차(陳箚)한 것인데, 이제 만약 성상께서 군하의 청을 굽어 따르시어 빨리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신다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ꡓ하였다. 최석항과 김연은 말하기를, ꡒ선왕조(先王朝) 을유년의 전선(傳禪)은 또한 여러 신하의 힘써 다투는 것을 거스르기 어려워서 곧 도로 정지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ꡓ하자, 김창집이 말하기를, ꡒ오늘의 일은 곧 대리(代理)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석항과 김연은 곧 을유년의 일에 견주니, 인심이 놀라고 의혹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기는 하지만 비망기를 환수하기를 청하는 성심이야 어찌 여러 사람보다 못하겠습니까?ꡓ하였다. 여러 신하가 다시 서로 잇따라 힘써 다투며 수작(酬酢)을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ꡒ크게 떠드는 것이 지극히 황공한 줄 압니다만, 먼저 신의 힘써 다투지 못한 죄를 다스린 후에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는 것이 마땅합니다.ꡓ하고, 이이명(李?命)은 말하기를, ꡒ신 등이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여러 번 입대(入對)를 청하였으나 한 번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모두 신 등의 성의가 천박한 죄입니다.ꡓ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ꡒ전후의 비망기를 도로 거둘 것을 쾌히 허락하신 뒤에야 온 나라의 물결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그렇게 하라.ꡓ하였다. 김창집이 아뢰어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후의 비망기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여 받아서 임금 앞에 놓았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ꡒ이제 대신의 말로 인하여 이처럼 도로 거두게 되었으니, 인심이 이제부터 안정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물러가 구학(丘壑)에서 죽을지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ꡓ하였다. 김창집․이이명․조태구가 이어서 자주 의관(醫官)의 입진(入診)을 허락하고 증세에 대해 의약(議藥)하도록 청하고, 민진원(閔鎭遠)도 자주 신료(臣僚)를 접견하여 옳고 그름을 서로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는 물러가고 승지와 삼사(三司)는 남아서 일을 아뢰었다. 홍석보(洪錫輔)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ꡒ본원(本院)748) 에서 바야흐로 우상(右相)이 〈탄핵을〉 무릅쓰고 들어와 청대(請對)한 잘못을 배척하여 계품(啓稟)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인견(引見)의 명이 갑자기 내렸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디로부터 우상이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으셨는지요?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어찌 안팎을 막음이 없으며 사사로운 길을 열어 둘 수가 있겠습니까? 들어와서 고한 사람을 명백하게 적발하여 영원히 후일의 폐단을 막고 군정(群情)의 의혹을 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ꡓ하고, 어유룡(魚有龍)․박치원(朴致遠)․신무일(愼無逸)․황재(黃梓) 등이 아뢰기를, ꡒ조태구는 대각(臺閣)에서 토죄(討罪)하는 날 감히 마음대로 궐문으로 들어와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림이 없었으니, 오늘날 나라의 기강(紀綱)이 비록 여지가 없다 할지라도 하루라도 나라가 있다면 그 방자한 행동을 일체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먼저 멀리 귀양보내소서.ꡓ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ꡒ조태구가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와서 청대(請對)하자, 승정원에서 대계(臺啓)가 바야흐로 한창이라고 하여 품달(稟達)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사알(司謁)이 입시(入侍)하라는 일을 전교하였습니다. 무릇 신하의 접견은 승정원을 경유하는 것이 3백 년의 정규(定規)인데, 지금 대신은 어떤 사사로운 길로 몰래 입래(入來)한 까닭을 품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비록 북문(北門)의 변(變)749) 이 있을지라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승전색(承傳色)․사알(司謁)을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핵실하게 하소서.ꡓ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박치원이 아뢰기를, ꡒ최석항이 연중(筵中)에서 진달하며 곧 오늘날 대리(代理)의 명을 을유년750) 전선(傳禪)의 일로 지적함으로써 인심을 놀라게 하고 의혹하게 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그 마음에 있는 바를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또 당초에 비망기는 깊은 밤에 내려졌는데, 최석항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같이 들어갈까 두려워하여, 대신(大臣)이 바야흐로 나아가는데 앞질러 들어가서 혼자 독대(獨對)하여 여러 신하가 힘써 다투는 길을 거꾸로 막고 자기가 혼자 일을 처리한 자취를 자랑하려고 하였으니, 그 정태(情態)에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ꡓ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국군(國君)에게 질병이 있을 경우 태자(太子)가 청정(聽政)하고 선위(禪位)받았던 것은 당(唐)나라에는 순종(順宗)이 있고, 송(宋)나라에는 광종(光宗)이 있었다. 순종은 풍암(風?)751) 으로 말을 못하여 조회를 보지 못하였고, 광종은 심지(心志)를 잃어서 부모에게 문안을 폐하고 집상(執喪)을 하지 못하므로, 두황상(杜黃裳)과 조여우(趙汝愚)의 일752) 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비록 조회에 임하여 침묵하고 청단(聽斷)에 권태로움을 느낄지라도 기거 동작(起居動作)이 상도(常度)가 있고 조향(朝享)을 폐한 적이 없으며, 비록 혹시 화기(火氣)가 올라 섬미(?迷)753) 함이 있을지라도 군하(群下)가 아뢰는 일에 대한 수답(酬答)이 어긋나지 아니하여 순종․광종 두 임금처럼 말을 못하거나 집상(執喪)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대신으로서 비록 충성스러움이 두황상․조여우와 같은 자가 있을지라도 정무를 놓는 일을 즉위 원년(元年)에 갑자기 의논하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돌아보건대 이이명과 김창집은 죄와 허물이 쌓이고 쌓여 항상 스스로 위태로와하는 마음을 품고 감히 이런 일을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 자제(子弟)와 문객(門客)의 흉측한 계획과 사악한 모의가 또 역안(逆案)에 낭자한 경우이겠는가? 정무를 놓는 명이 있었는데도 정청(庭請)을 또 거두니, 중외의 인심이 비분(悲憤)하고 대소 신민(大小臣民)은 분주하여 허둥지둥하였다. 제생(諸生) 중에는 대궐을 지키면서 울부짖는 자까지 있었는데, 조태구가 대궐에 나아가 입대(入對)하자 반한(反汗)의 명령이 있음을 듣고서는 모두 기뻐하여 뛰어 마지 않았으니, 경종(景宗)의 거룩한 덕이야말로 전(傳)에 이른바, ꡐ슬퍼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아니하여도 백성이 슬퍼하고 공경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아니하여도 백성이 공경한다.ꡑ는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사신(史臣)은 말한다. ꡒ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마음의 병이 갑절이나 심해져 군신(君臣)을 대할 때는 말이 혹 뒤바뀌는 경우가 있고 만기(萬機)에 임할 때는 살피지 못함이 많았으니, 진실도 두려워할 만한 종사(宗社)의 근심이 있었으니, 이는 조성복(趙聖復)의 상소와 네 대신의 차자(箚子)에서 빙자해 말한 바이다. 청정(聽政)은 선조(先朝)로부터 이미 이루어진 법이 있고 세제(世弟)의 영명(英明)함은 족히 큰 임무를 맡아 감당할 만하니, 성상께서 정무를 놓고 한가로운 데 나아가 조양(調養)에 전심하되 1분(分)의 차효가 있다면 어찌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두황상(杜黃裳)․조여우(趙汝愚)의 일이니, 어찌 곧장 역(逆)으로 논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윤(伊尹)․곽광(?光)754) ․두황상․조여우는 공(公)을 위한 것이었고, 왕망(王莽)․동탁(董卓)․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755) 은 사(私)를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이 무리들의 충(忠)이 되고 역(逆)이 되는 것은 또한 오직 마음의 공(公)과 사(私)가 어떠한가에 있을 뿐이다. 마음을 속에 감추었으니, 그 공과 사를 어떻게 분변해 낼 것인가? 그 하는 일을 추적하면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대저 국군(國君)에게 질병이 있어 세자가 수고로움을 대신하는 것은 바로 나라의 큰 정사이니, 또한 숨기고 덮어서 비밀로 할 만한 것이 아니니, 대신이 애초에 바로 청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은미(隱微)하게 말을 낸 것은 무엇 때문인가? 3일 동안 정청(庭請)하여 힘써 다투고 고집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미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또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신의 변하지 아니하는 충성된 마음으로 종사(宗社)를 위해 큰 의논을 세우는 것이 또한 이와 같은가? 그 몰래 손과 다리를 놀려 힘써 덮으려고 한 것은 그 마음에 협잡(挾雜)한 바가 있어 속으로 부족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저 이른바 협잡이라는 것은 이 무리가 성상을 등의 까끄라기처럼 보아 30년 이래 두려워하며 도마 위의 고기로 자처하고, 동궁에게는 또 스스로 정책(定策)756) 의 공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 일의 거행은 바로 까그라기를 없애고 도마를 벗어나며 공(功)을 요구하고 보답을 바라는 계책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비록 착함이 이윤(伊尹)과 같고 어질고도 충성스러움이 곽광(?光)․두황상(杜黃裳)․조여우(趙如愚)와 같은 이가 이 처지에서 이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스스로 드러낼 수 없는데, 하물며 환득 환실(患得患失)757) 하고 옹치(?痔)758) 를 입으로 빨아주는 탐욕스럽고 비루함이 이 무리와 같은 경우이겠는가? 아! 임금과 신하 사이는 분의(分義)가 엄중하니, 만약 한 몸의 사사로운 이해(利害)로 그 사이에 참여한다면, 맹자(孟子)가 이른바 ꡐ이윤(伊尹)의 뜻이 있으면 가하다.ꡑ고 한 데에 크게 어긋남이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장경부(張敬夫)759) 가 이른바 ꡐ일신의 이해를 위하여 꾀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지 용서할 수 없다.ꡑ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經)에 이르기를, ꡐ그 큰 괴수(魁首)를 죽인다.ꡑ라고 하였으니, 어찌 수종(首從)760) 의 구분이 없겠는가? 더욱이 애초에 옥안(獄案)에 관련되지 아니한 자는 더욱 구별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제 한꺼번에 네 대신을 함께 죽였으니 그 또한 참혹하다.ꡓ/ 【영인본】 41 책 180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註 741]청광(淸光) : 임금의 얼굴. ☞ / [註 742]정유년 : 1717 숙종 43년. ☞ / [註 743]영고(寧考) : 선왕. ☞ / [註 744]의귀(依歸) : 의탁. ☞ / [註 745]대보(大寶) : 왕위. ☞ / [註 746]유궁(遺弓) : 왕의 죽음. ☞ / [註 747]을유년 : 1705 숙종 31년. ☞ / [註 748]본원(本院) : 사간원. ☞ / [註 749]북문(北門)의 변(變) : 중종(中宗) 14년(1519)에 남곤(南哀)․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을 모함하여 사사(賜死) 또는 유배(流配)하게 된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말한 것. 북문은 경복궁(景福宮)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 / [註 750]을유년 : 1705 숙종 31년. ☞ / [註 751]풍암(風?) : 중풍으로 말을 못함. ☞ / [註 752]두황상(杜黃裳)과 조여우(趙汝愚)의 일 : 두황상은 당(唐)나라 덕종(德宗)․순종(順宗)․헌종(憲宗) 때의 명신(名臣)으로, 순종이 중풍을 앓아 벙어리가 되어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자, 순종 즉위년 7월에 사위 위집의(韋執誼)를 시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황태자(皇太子)가 정무를 대신 처리할 것을 청하게 하였고, 조여우는 송(宋)나라 효종(孝宗) 때의 명신으로, 효종이 죽고 광종이 정신병을 앓아 집상(執喪)하지 못하자, 한탁주(韓?冑)를 헌성 태후(憲成太后)에게 보내어 내선(內禪)을 청하고, 가왕(嘉王)을 받들어 황제에 즉위하게 하였음. ☞ / [註 753]섬미(?迷) : 병을 앓아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함. ☞ / [註 754]이윤(伊尹)․곽광(?光) : 이윤은 은(殷)나라의 명상(名相)으로, 왕(王)인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으로 내쫓아 악행을 고치게 하였음. 곽광은 전한(前漢)의 명신으로, 창읍왕(昌邑王) 하(賀)의 정사가 문란하자 그를 폐(廢)하고 효선제(孝宣帝)를 영립(迎立)하였음. ☞ / [註 755]왕망(王莽)․동탁(董卓)․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 : 왕망은 한(漢)나라 효원 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서 평제(平帝)를 죽이고 한조(漢朝)를 빼앗아 신(新)나라를 세운 자. 동탁은 후한(後漢)의 장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헌제(獻帝)를 세워 허수아비로 만들고 전횡을 일삼다가 여포(呂布)․왕충(王充)에게 살해된 자. 사마의는 삼국 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장수로 문제(文帝) 때 승상의 자리에 올라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제위(帝位)를 찬탈할 기초를 닦은 자. 환온은 동진(東晉)의 장군으로 황제(皇帝) 혁(奕)을 폐위(廢位)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한 후 찬탈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자. 이 네 사람은 모두 왕위를 직접 찬탈하거나 찬탈 음모를 꾸민 자임. ☞ / [註 756]정책(定策) : 세제(世弟)로 세운 일. ☞ / [註 757]환득 환실(患得患失) :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지 못할까 근심하고 얻은 뒤에는 잃을까 근심하는 비루한 짓. ☞ / [註 758]옹치(?痔) : 종기와 치질. ☞ / [註 759]장경부(張敬夫) : 송(宋)나라 유학자 장식(張?). ☞ / [註 760]수종(首從) : 수범자(首犯者)와 종범자(從犯者). ☞(www.history.go.kr 2007)

 

  조영복 [記事] : 경종실록 5권/ 경종 1년( 1721 신축 / 청 강희(康熙) 60년) 11월 2일 기축 2번째 기사/ 황해 감사 이집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고 최석항․조태구를 변호하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집(李?)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ꡒ인군(人君)에게 깊은 병이 없는데도 즉위한 원년이 갑자기 정무를 놓기를 명하는 것은 사첩(史牒)에 있지 아니한 바입니다. 전일에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지자 온 나라 인심이 물이 끊어오르듯 불이 타오르듯 하였습니다. 만약 도로 거두기를 조금이라도 늦추었다면 안정시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심이 극도에 이르면 하늘이 어기지 못하는 법인데, 다행히도 전하께서는 멀지 아니하여 회복하셨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聖意)를 굳게 정하셔서 다시는 전도(顚倒)되는 일을 하지 마시고, 또 반드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각고 면려(刻苦勉勵)하시어 하늘과 조종(祖宗)의 뜻에 보답하소서. 최석항이 홀로 먼저 입대(入對)한 것이 과연 무슨 죄이며 말하고자 한 것은 얼마나 큰 일입니까? 몸이 이미 대궐에 이르렀다면 오직 마땅히 즉시 호소하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침묵하며 다른 사람과 지체하여 기다리는 것이 어찌 분의(分義)에 마땅한 바이겠습니까? 만일 이와 같은 자가 있으면 진실로 주책(誅責)767) 해야 할 만한데도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아니한 것을 죄로 삼으니, 이는 상정(常情)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후(先後)를 물론하고 다만 천의(天意)를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은 이에 지극한 다행이었습니다. 홀로 이룩한 것이나 함께 이룩한 것을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태구(趙泰耈)는 전하의, ꡐ시속의 태도를 쾌히 씻고 마음을 돌이켜 곧 들어와서 장차 망하는 나라를 편안하게 하라.ꡑ는 하교를 받들었는데, 어찌 감히 앉아서 상규(常規)만 지키겠습니까? 출입을 동궐(東闕)768) 로 한 것은 단지 병이 위중하여 행보가 조금 가까운 곳을 취하였을 뿐이며, 선인문(宣仁門)769) 역시 시어소(時御所)770) 의 정문(正門)이므로, 비록 병이 있지 않아도 이곳을 경유하여 출입한 것이 옛부터 한정없이 많았습니다. 그 행차할 적에 도로에서 소리를 치고 들어와서는 후사(喉司)에 입대하기를 청하였으며, 그 말한 바는 성상께서 정무를 놓고자 하는 명을 돌이키려고 한 것인데, 이제 그 죄를 성토하여 혹은, ꡐ돌입(突入)하였다.ꡑ고 하고, 혹은 ꡐ몰래 진현(進見)하기를 도모하였다.ꡑ라고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저 인견(引見)의 명이 바로 내려진 것이 또 어찌 상신(相臣)이 감히 아는 바이겠습니까? 그때의 곡절을 전하께서 이미 명백하게 하교하셨는데도, 오히려 구실을 삼아 마음을 쾌하게 하려고 하여 잠시 사이에 삭출(削黜)로부터 원찬(遠竄)에 이르렀고, 이튿날은 원찬에서 국문(鞫問)으로, 또 그 이튿날에는 국문에서 다시 원찬이 되었습니다. 막고 낮추고 올리는 것을 오직 하고 싶은 대로 하니, 아! 너무나 꺼리는 바가 없습니다. 대신이 비록 죄나 허물이 있을지라도 나문(拿問)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선왕(先王)의 하교가 명백해 있는데도 오히려 변모(弁?)771) 로 여기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상신(相臣)의 평생 행신(行身)을 나라 사람이 아는 바이니, 환시(宦寺)와 교통(交通)하였다는 말이 어찌 근사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터무니없이 죄를 마구 더하며 조금도 어려워함이 없습니다. ꡐ환첩(宦妾)이 이름을 아는 사람에게 복상(卜相)하였다.ꡑ고 한 데 이르러서는 이는 성간(聖簡)772) 하신 일까지 아울러서 속이는 것이니, 어찌 통분(痛憤)하지 않겠습니까? 군부(君父)가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내리시자 정성을 다해 돌이키려 하고 뭇사람의 마음이 함께 분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혹시 다른 사람이 능히 하기도 하고, 상례(常例)로 할 수 없는 것은 혹 파격적으로 하기도 하였던 것이니, 일이 지나간 뒤에도 서로 하례(賀禮)하는 바탕이 되기에 꼭 적합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워 오히려 함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신은 진실로 세도(世道)를 위하여 개탄합니다. 마음에 품은 바의 장소(章疏)를 승정원에서 마음대로 퇴각(退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옛 법인데, 지난번 정청(庭請)을 정지하던 날 중신(重臣)이 상소를 승정원에 와서 올렸으나, 공공연히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와 같다면 국가에 관한 일은 경중을 물론하고 모두 위에 아뢸 길이 없어질 것이고,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될 것입니다. 엄하게 신칙(申飭)을 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ꡓ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ꡒ광구(匡救)하고자 올린 말을 내가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시사(時事)가 개탄스러운 것은 진실로 나의 박한 덕이 밝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으니, 아! 누구를 허물하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경은 뒤미처 다시 제기하지 말고, 공경히 가서 일을 살피도록 하라.ꡓ하였다.

 

  승지(承旨) 조영복(趙榮福)․한중희(韓重熙), 부제학(副提學) 홍계적(洪啓迪),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 사간(司諫) 어유룡(魚有龍)이 모두 이집(李?)의 상소로 인하여 인혐(引嫌)하고, 소를 올려 피혐(避嫌)함이 서로 잇따라 분분하였다./【영인본】 41 책 18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註 767]주책(誅責) : 죄책. ☞ / [註 768]동궐(東闕) : 창경궁. ☞ / [註 769]선인문(宣仁門) : 창경궁의 협문. ☞ / [註 770]시어소(時御所) : 임금이 현재 거처하는 곳. ☞ / [註 771]변모(弁?) : 관례(冠禮) 때 머리에 쓰는 관(冠). 한 번 쓰고 버리므로 쓸모없는 것을 가리킴. ☞ / [註 772]성간(聖簡) : 임금이 특별히 임명함. ☞(www.history.go.kr 2007)

 

  조영복 [記事] : 경종실록 5권/ 경종 1년( 1721 신축 / 청 강희(康熙) 60년) 12월 6일 임술 1번째 기사/ 조성복과 그 무리들을 벌할 것을 청하는 박필몽․이진유․이명의 등의 상소/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이명의(李明誼)․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정해(鄭楷)․서종하(徐宗廈) 등이 상소하기를, ꡒ강(綱)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군위 신강(君爲臣綱)이 세 가지 중에서 으뜸이 되고, 윤(倫)에 다섯 가지가 있는데 군신 유의(君臣有義)가 다섯 가지에서 첫머리가 되니, 이것은 천상(天常)이고 민이(民?)입니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지어 대강(大綱)을 바로잡고 인륜(人倫)을 밝히되, 임금을 섬기는 의(義)를 엄하게 하여 신하가 된 분수를 한결같게 하였습니다. 미묘한 데서 삼가고 싹트는 데서 살펴 두 가지 마음이 있으면 역(逆)이 되고 장심(將心)을 가지면 반드시 죽이는데, 몇 마디 붓을 움직여 삼척(三尺)의 율(律)을 게시(揭示)하자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하였으니, 진실로 천하 만세(萬世)의 대경 대법(大經大法)인 것입니다. 아! 《춘추》를 이 세상에 강(講)하지 아니한 지 오래인지라, 작은 것을 막지 아니하고 싹을 자라게 하여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이 무너짐이 오늘날과 같은 적은 없었습니다. 조성복(趙聖復)이 앞에서 불쑥 나왔는데도 현륙(顯戮)하는 법을 아직 더하지 아니하였고, 사흉(四凶)이 뒤에 방자하였는데도 목욕(沐浴)하고 토죄(討罪)할 것을 청한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으며, 임금의 형세는 날로 외롭고 흉한 무리는 점점 성하여 다시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없으니, 사직(社稷)이 빈 터가 되는 것은 다만 다음에 있을 일일 뿐입니다. 전일의 일은 종사(宗社)에 망극(罔極)하니, 천고(千古)로 거슬려 올라가도 듣지 못한 바이며 국사[國乘]에도 보지 못한 바입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가 진실로 전하께 북면(北面)하는 마음이 있다면, 모두 대궐 뜰에 엎드려 머리를 부수고 간(肝)을 가르며 비록 해와 달을 넘길지라도 차마 갑자기 물러갈 수 없는 것이 곧 하늘과 백성의 그만둘 수 없는 떳떳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복합(伏閤)․정청(庭請)으로 겨우 책임이나 면하고 3일 만에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마음대로 재정(裁定)하고는, ꡐ신자(臣子)가 어찌 감히 가볍고 갑작스러움에 구애받아 한결같이 모두 어기고 거역하겠습니까?ꡑ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빨리 유사(有司)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거행하도록 하소서.ꡑ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마음속에 품었다가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조성복과 더불어 머리와 꼬리로 호응하며 서로 표리(表裏)가 된 형상을 환히 볼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일이 장차 헤아리기 어렵게 되었는데, 만약 밖에서 새로 들어온 대신이 몸을 잊고 목숨을 잊고 사직(社稷)에 바쳐 천폐(天陛)에 머리를 조아려 면대해 옥음(玉音)을 받들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라가 나라답게 될 것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갑술년793) 에 양사(兩司)에서 기사년794) 에 대신이 반나절 정청(庭請)한 죄를 논하기를, ꡐ정조(鄭造)․윤인(尹?)․정인홍(鄭仁弘)이라도 다시 더할 것이 없다.ꡑ고 하였으니, 기사년의 여러 신하도 오히려 정조․윤인․정인홍의 죄과(罪科)로 배척하였는데, 오늘 저 무리는 진실로 양기(梁冀)․염현(閻顯)․왕망(王莽)․조조(曹操)의 죄795) 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기사년에는 오직 차청(箚請)만은 저 무리들과 같은 것이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아! 대리 청정(代理聽政)의 일은 대(代)마다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간혹 있으며, 모두 수십 년을 임어(臨御)하여 춘추가 많고 병이 중한 뒤에 진실로 절박하고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원년에 보산(寶算)이 바야흐로 한창이시고 또 드러난 병환이 없으십니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전하를 복종해 섬긴 세월이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 도리어 오늘날 차마 전하를 버리려는 자가 있으니, 저들의 마음이 편한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중외의 여정(輿情)이 물결처럼 흔들려 놀라고 솥에 물이 끊어오르는 듯하여, 모두 저 정승을 가리켜 말하기를, ꡐ이는 참 역(逆)이다. 어찌 우리 임금을 버리는가?ꡑ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묵묵히 돕고 몰래 보호하여 저들의 꾀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니,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은 진실로 속일 수 없는 것이고, 사흉(四凶)의 죄는 진실로 천지간에 머리를 들기 어렵습니다. 신 등이 저 무리가 조성복(趙聖復)을 논한 상소를 가져다 보건대, ꡐ안으로 「우리 임금이 능하지 못하다.」는 마음을 품었다.ꡑ라고 하였으니, 저들의 정상(情狀)은 여기에서 그 단서를 족히 볼 수 있습니다. 저 무리가 말하는, ꡐ우리 임금이 능하지 못하다.ꡑ는 것은 어떻게 하여 생겨나게 된 것입니까? 신 등은 망령된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ꡐ인(仁)․명(明)․무(武)ꡑ 세 글자 중에서 ꡐ무ꡑ가 부족함이 있으시니, 진실로 또한 권강(權綱)을 거두어 잡지 않으시고 한갓 인순(因循)․고식(姑息)하는 병통을 가지셨으므로 저 무리들이 굽어보고 쳐다보며 엿보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침모(侵侮)하는 버릇과 협제(脅制)하는 꾀가 달마다 점점 자라나고 날마다 지극히 깊어져 권병(權柄)은 이미 아래로 옮겨지고 위복(威福)이 위에 있지 아니한데,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속으로 장심(將心)을 품고 적(賊)의 상소로 먼저 시험하고 흉악한 차자(箚子)가 이어서 올라왔으니, 이것은 ꡐ우리 임금이 무능한데, 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ꡑ라는 뜻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사명(李師命)과 이상(李翔)이 처음 복관(復官)되었을 적에 박태상(朴泰尙)이 상소하여, ꡐ권강(權綱)을 총람(總攬)하지 아니하고 한갓 인순만을 일삼는다.ꡑ는 말로 선대왕(先大王)을 우러러 경계하자, 선왕께서 기꺼이 가납하시며, ꡐ나의 병통을 맞혔다.ꡑ고 칭찬하시고는 이어 복관(復官)의 명을 거두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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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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