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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41-13:조영복(1714.7.8제수-동년.7.25하직-1715.5.11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6.06.21 18:01:21

  예천고을원 141-13 : 조영복(1714.7.8제수, 동년.7.25하직-1715.5.11이임) : 재임 도중 과거에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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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복 [記事] : 경종실록 12권/ 경종 3년( 1723 계묘 / 청 옹정(雍正) 1년) 5월 16일 갑오 1번째 기사/ 간원에서 신임․임방 등을 양이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다/ 간원(諫院)【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이다.】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신임(申?)․임방(任?)․조영복(趙榮福)을 양이(量移)하라는 명령의 환수(還收)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영인본】 41 책 293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과학(科學)(www.history.go.kr 2007)

 

  조영복 [記事] : 경종수정실록 2권/ 경종 1년( 1721 신축 / 청 강희(康熙) 60년) 8월 20일 무인 1번째 기사/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의 청에 따라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 판윤(判尹) 이홍술(李弘述),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관명(李觀命),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 우참찬(右參贊) 임방(任?),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현(李宜顯), 대사헌(大司憲) 홍계적(洪啓迪), 대사간(大司諫) 홍석보(洪錫輔), 좌부승지(左副承旨) 조영복(趙榮福), 부교리(副校理) 신방(申昉) 등이 저사(儲嗣)를 세우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연잉군(延?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았다. 처음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가 상소하기를, ꡒ전하의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도 저사(儲嗣)를 두지 못하시니, 삼가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커다란 슬픔으로 애구(哀?)하시는 중에도 반드시 근심하는 생각이 더하실 것이고, 우리 선왕(先王)의 하늘에 계신 혼령께서도 반드시 정성스럽게 돌아보며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조종(祖宗)께서도 이미 행하신 영전(令典)이 있으니, 어찌 오늘날 마땅히 준용(遵用)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방금 국세(國勢)가 위태롭고 인심(人心)이 흩어졌으니, 더욱 마땅히 국가의 대본(大本)을 생각하여 종사(宗社)의 지극한 계책으로 삼아야 할 것인데도, 대신(大臣)들이 오히려 세자 세우기를 청하는 일이 없으니, 신은 삼가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속히 이것을 위로는 자성(慈聖)께 품하시고, 아래로는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 즉시 사직(社稷)의 큰 계책을 결정해서 많은 백성들의 큰 기대를 잡아매소서.ꡓ하니,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김창집과 이건명이 빈청(賓廳)에 나아가,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육경(六卿), 의정부(議政府)의 서벽(西壁)206) 과 판윤(判尹),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명초(命招)하여 회의(曾議)해서 품정(稟定)하기를 청하였는데, 판중추(判中樞) 김우항(金宇杭),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상기(宋相琦), 이조 판서(吏曹判書) 최석항(崔錫恒)은 부름을 어기고 이르지 아니하였다. 김창집 등이 드디어 모두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ꡒ성상의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도 아직까지 저사(儲嗣)가 없으니, 신은 외람되게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우려하였으나, 다만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 까닭에 감히 앙청(仰請)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대간(臺諫)의 말이 지극히 마땅하니, 누군들 다른 의논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ꡓ하였다. 조태채는 말하기를, ꡒ송(宋)나라 인종(仁宗)이 두 황자(皇子)를 잃었을 때 춘추가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간신(諫臣) 범진(范鎭)이 ꡐ태자(太子)를 세울 것ꡑ을 소청(疏請)하였고, 대신(大臣) 문언박(文彦博) 등은 정책(定策)을 극력 도왔습니다. 지금 대간의 말이 이미 나왔으니, 지연시킬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조속히 처분을 내리소서.ꡓ하였다.

 

  이건명은 말하기를, ꡒ자성(慈聖)께서 하교하실 적에 매양 ꡐ국사(國事)를 우려하여 억지로 죽음(粥飮)을 마신다.ꡑ고 말씀하셨으니, 비록 애구(哀?)하는 중에 있지마는 그 종사(宗社)를 위한 염려가 깊으실 것입니다. 이 일은 일각인들 조금도 늦출 수 없기에, 신 등이 감히 깊은 밤중에 청대(請對)하였으니, 원컨대 성사(聖思)를 가하여 조속히 대계(大計)를 결정하소서.ꡓ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차례대로 진청(陳請)하기를 마치자, 김창집․이건명․조태채가 다시 거듭 청하여 마지 않았다. 승지(承旨) 조영복(趙榮福)이 말하기를, ꡒ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宗社)의 대계이니, 청컨대 빨리 윤허하여 따르소서.ꡓ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따를 것을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ꡒ이는 종사의 무강(無彊)한 복(福)입니다.ꡓ하였다. 김창집과 이건명이 말하기를, ꡒ대신(臺臣)의 이른바 ꡐ조종(祖宗)의 영전(令典)ꡑ이란 공정 대왕(恭靖大王) 때의 일을 가리키는 것인 듯합니다. 성상께서는 위로 자전(慈殿)을 받들고 계시니 들어가서 자전께 품하여 수필(手筆)을 얻은 후에 봉행(奉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은 청컨대 물러나 합문(閤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ꡓ하니, 임금이 이에 대내(大內)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김창집 등이 승전 내관(承傳內官)을 불러서 구두(口頭)로 아뢰어 다시 입대(入對)를 청하니, 먼 동이 튼 뒤에 임금이 낙선당(樂善堂)에서 인대(引對)할 것을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ꡒ그것을 이미 자성(慈聖)께 품계(稟啓)하셨습니까?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그렇다.ꡓ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ꡒ반드시 자전의 수찰(手札)이 있어야만 거행할 수 있습니다.ꡓ하니, 임금이 책상 위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ꡒ봉서(封書)가 여기에 있다.ꡓ하였다. 김창집이 받아서 뜯어보니, 봉서(封書) 안에 두 통의 종이가 있었는데, 하나는 해서(楷書)로 ꡐ연잉군(延?君)ꡑ이란 세 글자를 써 놓았고, 하나는 언찰(彦札)로 하교하기를, ꡒ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과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은 단지 주상(主上)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나의 뜻이 이와 같으니, 대신(大臣)에게 하교함이 마땅할 것이다.ꡓ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 읽어보고 울었다. 이건명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해자(楷字)로써 언교(諺敎)를 번역하여 써서 승정원(承政院)에 내리게 하고, 승지로 하여금 전지(傳旨)를 쓰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영복(趙榮福)이 탑전(榻前)에서 전교(傳敎)를 쓰기를, ꡒ연잉군【휘(諱).】을 저사(儲嗣)로 삼는다.ꡓ하였다. 이어서 예조(禮曹)의 당상관(堂上官)을 명초(命招)하여 거행하기를 청하고, 여러 신하들이 이에 물러나왔다. 뒤에 영조[英宗] 계축년207) 에 민진원(閔鎭遠)이 영조에게 고하기를, ꡒ경자년208) 국휼(國恤) 후에 여러 신하들이 서로 만나면 번번이 머리를 맞대고 걱정하여 말하기를, ꡐ사왕(嗣王)의 성후(聖候)가 불예(不豫)하시고, 더욱 후사를 두실 희망이 끊어졌으니, 국사(國事)를 장차 어찌 하겠는가?ꡑ 하여, 이에 건저(建儲)의 의논이 있었습니다. 신은 말하기를, ꡐ국사(國事)가 비록 급하지만 즉위(卽位)한 지 한 해를 넘기지도 않았는데, 바로 건저한다면 중외(中外)에서 성후(聖候)의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터에 반드시 의혹이 있을 것이다. 힘을 다해 곁에서 보좌하여 3년이 지난 뒤에 마땅히 건저를 의논해야 할 것이다.ꡑ 하였고, 김창집은 말하기를, ꡐ왕자(王子)가 여러 분 계시다면 마땅히 일찍 건저를 의논하여 인심(人心)을 붙잡아 매어야 하겠지만, 우리 임금의 아드님은 단지 한 분이 계실 뿐이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다시 어느 곳으로 돌아가겠는가? 「3년 뒤에 해야 한다.」는 말이 진실로 옳다.ꡑ 하였습니다. 그 뒤에 조정의 신하들이 건저(建儲)를 급하게 여겼으나, 김창집은 끝내 종전의 견해를 고집하였고, 고(故) 판서(判書) 이만성(李晩成)은 신을 꾸짖기를, ꡐ종사(宗社)의 계책이 시급하니,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ꡑ 하였습니다. 신축년209) 에 이르러 대소(臺疏)가 갑자기 나오자 신은 ꡐ이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인데 일개 대관(臺官)이 갑자기 상소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ꡑ 하였습니다. 비답(批答)이 내려진 뒤에 김창집이 신을 빈청(賓廳)으로 나가는 길에 지나다가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ꡐ3년의 뒤를 기다리려 하였는데 지금 대소가 나왔습니다. 이미 말이 나왔으니 극력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ꡑ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ꡐ이 논의가 이미 나온 뒤에는 경각도 지연시킬 수 없으니, 반드시 오늘밤 정성을 다하여 극력 진달해서 꼭 정책(定策)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혹시라도 지연된다면 종사(宗社)의 변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ꡑ 하니, 김창집이 그렇게 여기고 곧바로 대궐에 나아가 여러 재신(宰臣)들을 부르기를 청하여, 유문(留門)210) 한 다음 들어왔습니다. 이어서 청대(請對)하여 ꡐ동조(東朝)에 입품(入稟)하여 대책(大策)을 결정한 뒤 다시 신 등을 불러서 하교하실 것ꡑ을 진달하고, 합문(閤門) 밖으로 물러나와 기다렸습니다. 3, 4경이 되도록 소명(召命)이 내려지지 않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ꡐ이 일은 경각이 매우 급하니, 지금 다시 청대하는 것이 마땅하다.ꡑ 하니,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ꡐ이와 같이 하면 군부(君父)에게 재촉하는 것 같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ꡑ 하였습니다. 파루(罷漏) 뒤 신이 말하기를, ꡐ일이 재촉하는 것 같은 것은 소절(小節)이고, 구대(求對)하여 입시(入侍)하는 것은 대사(大事)이니, 곧바로 조속히 청대함이 마땅하다.ꡑ 하자, 여러 대신(大臣)들이 말하기를, ꡐ그렇다.ꡑ 하였습니다. 즉시 승전색(承傳色)에게 구대를 청하여 날이 밝아지려 할 때 입시하니, 어좌(御座)의 곁에 서안(書案)이 있었고, 서안 위에는 글이 있었습니다. 경묘(景廟)께서 서안을 돌아보며 가리키시기에, 대신(大臣)이 가져다가 받들어 보니, 자전(慈殿)의 언교(諺敎)와 경묘의 친필(親筆)이었습니다. 좌상(左相) 이건명(李健命)이 받들어 읽으니,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실성(失聲)하여 눈물을 흘려 울고 물러나왔습니다.ꡓ하였다./

 

  【영인본】 41 책 347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註 206]의정부(議政府)의 서벽(西壁) : 서벽(西壁)은 회좌(曾座)할 때 좌석의 서쪽에 앉는 벼슬. 《중종실록(中宗實錄)》 제 24권에 보면, 정부의 동벽(東壁)은 좌우 찬성(左右贊成)이고, 서벽(西壁)은 좌우 참찬(左右參贊)이라 하였음. ☞ / [註 207]계축년 : 1733 영조 9년. ☞ / [註 208]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 / [註 209]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 [註 210]유문(留門) : 궁문(宮門)의 개폐(開閉)는 정시(定時)에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꼭 나가야 할 사람과 들어올 사람이 있을 때는 그 개폐(開閉)를 유보(留保)하던 일. ☞(www.history.go.kr 2007)

 

  조영복 [記事] : 경종수정실록 2권/ 경종 1년( 1721 신축 / 청 강희(康熙) 60년) 10월 17일 갑술 1번째 기사/ 영의정 김창집․영중추부사 이이명 등이 대리 절목에 관한 차자를 올리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李?命),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대리(代理) 절목(節目)을 진달하였는데, 그 차자에 이르기를, ꡒ근일에 갑자기 비상(非常)한 조처가 있으므로, 합문(閤門)에서 나흘을 부복(俯伏)하였으나 윤유(允兪)를 내리지 않으셨고, 6, 7차례에 걸쳐서 청대(請對)하였으나, 굳이 거절하시기를 더욱 심하게 하여 끝내 한 번도 청광(淸光)을 뵐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니, 다만 성의(誠意)가 천박하여 능히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므로, 신 등의 죄는 만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하겠습니다. 지난밤에 내리신 비지(批旨)는 더욱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받들어 읽기를 절반도 되기 전에 심담(心膽)이 모두 떨어져서 경황(驚惶)․진계(震悸)한 나머지 앙대(仰對)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당초 비망기(備忘記) 중의 ꡐ대소(大小) 국사(國事)를 모두 세제(世弟)에게 재단(裁斷)하도록 하라.ꡑ는 교지(敎旨)는 실로 국조(國朝) 이래로 있지 않았던 일이니, 신 등이 비록 만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하더라도 결단코 감히 봉승(奉承)할 수 없습니다. 정유년의 일에 이르러서는 바로 선조(先朝)에서 재정(裁定)한 것이며, 또 절목(節目)의 구별(區別)도 있으니, 그것이 ꡐ모두 세제(世弟)에게 재단(裁斷)하도록 하라.ꡑ는 분부와 비교해 볼때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 성상의 하교는 지성(至誠) 측달(惻?)한 데서 나왔으니, 전하의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 또한 어찌 감히 경솔하고 성급한 것에 구애를 받아 모조리 어기고 거절하여 우리 전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조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다만 정유년의 절목(節目)에 따라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ꡓ하고, 차자가 들어간 뒤 정청을 드디어 중지하였다. 이날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이 약방(藥房) 문안(問安) 때문에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기를, ꡒ지난밤에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고 여러 대신(大臣)들이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를 청하여 모여 앉혀 놓고 묻기에, 신이 ꡐ이 일은 비록 한 해가 지나고 세월이 바뀐다 하더라도 절대로 승순(承順)할 이치가 없다.ꡑ며 누누이 쟁집(爭執)하였더니, 여러 대신들이 ꡐ우선 진차(陳箚)하여 대죄(待罪)하고 이어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진달(陳達)한다.ꡑ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대신의 차자 내용을 삼가 들으니, 정유년의 절목에 따라 시행할 것을 청했다 합니다. 아! 한밤중에 갑자기 소견(所見)을 변경하여 의논하지 않은 채 국사를 같이 처리할 신하들이 이와 같은 종전에 없던 해괴한 일을 하게 되었으니, 신은 진실로 그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전후에 걸친 성상의 하교는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비답에 지나지 않는데, 몸이 대신(大臣)의 지위에 있으면서 힘을 다해 광구(匡救)할 의리는 생각지 않고 조급히 서둘러 봉행(奉行)하기를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 듯이 하였으니, 그 마음의 있는 바는 길 가는 사람들도 알 수가 있습니다. 임금을 망각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이루 다 처벌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쾌히 성명(成命)을 거두시어 신인(神人)의 희망을 위로하소서.ꡓ하니, 승지(承旨) 홍계적(洪啓迪)이 상소를 물리치고 임금에게 올리려 하지 않았다. 이광좌(李光佐)․이태좌(李台佐)․이조(李肇)․김연(金演) 등이 조방(朝房)에 있으면서 청대(請對)하여 다시 간쟁할 것을 함께 의논하였다. 우의정 조태구(趙泰耈)가 선인문(宣仁門)으로부터 사약방(司?房)에 들어가 앉아서 사람을 승정원(承政院)에 보내 청대하고, 이광좌 등은 금호문(金虎門)을 통해서 들어가 또한 각각 청대하였다. 승지 홍계적(洪啓迪) 등이, ꡐ조태구가 바야흐로 대간(臺諫)의 논핵을 당하였는데, 어찌 감히 청대할 수 있겠는가?ꡑ 하면서 물리치고 임금에게 아뢰지 않고 왕복(往復)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양사(兩司)의 관원이 막 대각(臺閣)에 나왔다가 조태구가 대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우선 그를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다. 계사(啓辭)가 미처 임금에게 올라가지 않았는데, 사알(司謁)이 합문(閤門)으로부터 승정원으로 허둥지둥 달려나와 조태구를 인견(引見)한다는 것을 전교(傳敎)하고, 또 말하기를, ꡒ성상께서 이미 전(殿)에 나와 계십니다.ꡓ하니, 승지 등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합문 밖으로 나아갔다. 이때 대궐의 안팎이 물끓듯 진동(震動)하였다. 김창집 등은 이미 차자(箚子)를 올렸고 조태채는 질병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다. 김창집이 이이명(李?命)․이건명(李健命) 등과 비변사(備邊司)에 있으면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조태구가 장차 입대(入對)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 허둥지둥 지름길로 빠른 걸음으로 합문으로 나아갔는데, 조금 후에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뒤좇아 당도하여 모두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영부사(領府事) 이이명(李?命)․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우의정 조태구(趙泰耈)를 인견(引見)하였으며,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 판돈녕(判敦寧) 송상기(宋相琦), 행 좌참찬(行左參贊) 최석항(崔錫恒),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관명(李觀命),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의현(李宜顯), 행 사직(行司直) 이광좌(李光佐), 청은군(淸恩君) 한배하(韓配夏),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조(李肇),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연(金演),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집(李?),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태좌(李台佐),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재로(金在魯),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병상(李秉常), 행 사직(行司直) 이정신(李正臣), 승지(承旨) 홍계적(洪啓迪)․한중희(韓重熙)․안중필(安重弼)․유숭(兪崇)․조영복(趙榮福)․사간(司諫) 어유룡(魚有龍), 응교(應敎) 신절(申?),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 교리(校理) 이중협(李重協),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 정언(正言) 신무일(愼無逸)․황재(黃梓)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ꡒ천만 뜻밖에도 갑자기 비상(非常)한 하교(下敎)를 받고서 신 등은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정쟁(庭爭)하였으나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어제 밤에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받고 보니 한결같이 억지로 떠들어댄다는 것 또한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아침에 차자를 올려 앙품(仰稟)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우상(右相)의 입대(入對)로 인하여 같이 들어와 뵙게 되니, 신 등의 극력 간쟁하지 못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ꡓ하였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ꡒ오늘 천안(天顔)을 뵙게 된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신은 비망기가 갑자기 내려져 중외(中外)가 경황(驚惶)한다는 것을 듣고 감히 스스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은 입장에 있다고 해서 물러나 향려(鄕廬)에 있을 수만은 없기에, 성(城) 밖에 와서 엎드려 있으면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며 진달하였으나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갑자기 대신(大臣)이 이미 정청(庭請)을 정지시켰다는 것을 듣고서 신은 가슴이 무너지는 절박함과 놀라움을 견딜 수 없기에 사생결단하고 반드시 간쟁하고자 감히 와서 청대(請對)하여 전하의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니, 이것은 신(臣)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바로 나라 사람들의 말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화열(火熱)이 오르내리는 것으로 인해 기무(機務)를 그만두려고 하시지만, 화열이 올라올 때에는 잠시 재결(裁決)을 중지하셨다가, 화열이 내리기를 기다려 마음이 안정되고 뜻이 편안해지면 저절로 화기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안개처럼 흩어져 지려(志慮)가 청명(淸明)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을 때 사물이 닥쳐와서 거기 순응(順應)하게 된다면 사무(事務)가 지체됨이 없을 것이니, 질병을 다스리는 일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병행되어 어그러짐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국가(國家)는 전하의 국가가 아니고 바로 조종(祖宗)의 국가입니다. 영고(寧考)께서 전하께 부탁한 것이 어떠하였으며, 신인(神人)이 전하께 의귀(依歸)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대보(大寶)의 위(位)는 군주가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지난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군주(君主)가 한갓 자기 한 사람의 사정(私情)을 따라서 마음내키는 대로 곧장 실행하는 것이 전하께서 오늘날 하는 바처럼 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백수(白首)의 노신(老臣)이 선대왕(先大王)께서 승하하신 날 죽지 못하고 차마 오늘의 이러한 일을 보게 되었으니, 신이 이 일에 있어 능히 광구(匡救)하지 못한다면, 비단 전하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또한 선왕(先王)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신이 산들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일 반한(反汗)의 명을 얻지 못한다면 죽음이 있을 뿐이니, 청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감히 물러가지 않겠습니다.ꡓ하고, 이어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시었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차례대로 되풀이하면서 진청(陳請)하였고, 이광좌․유복명이 더욱 극력 간쟁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ꡒ어제의 비지(批旨)에는 더욱 차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었습니다. 밤이 깊은 뒤라 문자(文字)로 다시 진달하기가 어려웠고, 또 절차(節次)가 점차 증가하여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까 두려웠기 때문에 감히 절목(節目)을 거행하자는 뜻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었던 것이니, 실로 마지못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내리신 분부를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니, 반드시 환수하게 하려는 뜻이야 신 또한 어찌 여러 신하들과 다르겠습니까? 이제 만일 일전에 내리신 비지를 도로 거두신다면, 신이 비록 만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사피(辭避)하겠습니까?ꡓ하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ꡒ날마다 청대(請對)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소견을 아뢴 계사(啓辭)는 아침에 들어갔는데 저녁에야 비답(批答)이 내려왔으니, 이와 같은데 어찌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어젯밤에 내리신 전교(傳敎)는 전고(前古)에 듣지 못하던 일이라 바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2품 이상의 관원을 불러모아 의견을 물었더니, 말하는 바가 각자 같지 않았습니다. 신 등은 거듭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계책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들으니, 을유년285) 선대왕(先大王)께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셨을 때 고(故)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이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서신(書信)을 보내 말하기를, ꡐ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쟁하더라도 만일 혹시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우선 승순(承順)하여 사무(事務)에 참결(參決)하기를 청하는 것이 이득(利得)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하다.ꡑ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여러 대신들과 서로 의논하여 차자(箚子)로써 진달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의 청을 굽어 따르시어 조속히 성명(成命)을 회수 할 것을 명하신다면, 어찌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ꡓ하였다. 최석항이 부연하여 말하기를, ꡒ선왕조(先王朝) 을유년의 전선(傳禪)하려 한 일 또한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쟁하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움으로 인해서 곧바로 도로 중지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계술(繼述)의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ꡓ하니, 김창집이 말하기를, ꡒ오늘의 일은 바로 대리(代理)하는 것인데, 최석항이 부연하여 이에 을유년의 일에 비교하니, 인심(人心)이 어찌 더욱 놀라고 의혹스러워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비망기를 환수하기를 청할 마음이야 어찌 여러 사람들보다 못하겠습니까?ꡓ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시 서로 잇따라 극력 간쟁하여 수작(酬酢)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답하지 않았다. 김창집이 말히기를, ꡒ억지로 떠들어댄 것이 몹시 황공스러운 일인 줄 알지만, 신이 극력 간쟁하지 못한 죄를 먼저 다스린 후에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ꡓ하고, 이이명은 말하기를, ꡒ신 등이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누차 청대(請對)하였으나 한 번도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이것은 모두 신 등이 성의가 천박한 죄입니다.ꡓ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ꡒ전후의 비망기를 쾌히 환수할 것을 허락한 후에야 온 나라의 파탕(波蕩)된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ꡒ알았다.ꡓ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ꡒ사관(史官)을 보내 전후의 비망기를 가지고 들어와 성상 앞에 올려놓도록 하소서.ꡓ하고, 조태구가 말하기를, ꡒ이제 대신(大臣)의 말로 인하여 이러한 환수하라는 분부가 있게 되었으니, 인심이 이제 진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물러나 구학(丘壑)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ꡓ하였다. 김창집․이이명․조태구가 잇따라 ꡐ자주 의관(醫官)의 입진(入診)을 허락하여 증상에 따라 약(藥)을 의논할 것ꡑ을 청하고, 민진원 또한 ꡐ자주 신료(臣?)를 접견하여 가부(可否)를 상제(相濟)할 것ꡑ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간 뒤에 승지(承旨)와 삼사(三司)에서는 남아서 일을 아뢰었다. 홍계적 등이 나와 말하기를, ꡒ본원(本院)에서 바야흐로 우상(右相)이 함부로 들어와 청대(請對)한 잘못을 배척하여 계품(啓稟)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인견(引見)하신다는 분부를 갑자기 내렸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디로부터 우상이 들어왔다는 것을 들으셨는지요? 군주의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어찌 내외(內外)로 하여금 방비가 없도록 하고 곁으로 사경(私逕)을 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입고(入告)한 사람을 명백하게 적발하여 후일의 폐단을 영구히 막아서 군정(群情)의 의혹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ꡓ하고, 어유룡․박치원․신무일․황재 등이 아뢰기를, ꡒ조태구는 대각(臺閣)에서 죄를 성토하는 시기에 당하여 이에 감히 궐문(闕門)으로 함부로 들어와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나라의 기강이 비록 여지(餘地)가 없다 하지만 하루라도 나라가 있는 이상 그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우선 멀리 귀양보내소서.ꡓ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ꡒ조태구가 선인문(宣仁門)을 통해서 들어와 청대(請對)하였으나, 승정원에서는 대계(臺啓)가 바야흐로 진행 중에 있기 때문에 품달(稟達)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사알(司謁)이 입시(入侍)하라는 일을 전교(傳敎)하였습니다. 대저 신린(臣隣)을 접견함에 있어서 후사(喉司)를 경유하는 것은 바로 3백 년 동안 시행해 온 정규(定規)입니다. 이제 대신(大臣)이 어떤 사경(私徑)을 통해서 미품(微稟)하여 들어왔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으니, 이런 길이 한 번 열린다면 비록 북문(北門)의 변(變)286) 이 있다 하더라도 방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승전색(承傳色)과 사알을 잡아다 문책하여 엄중하게 다스리소서.ꡓ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박치원이 아뢰기를, ꡒ최석항이 연중(筵中)에서 진달(陳達)하면서 곧바로 오늘날 대리(代理)의 명(命)을 을유년 전선(傳禪)의 일로 지적하여 인심을 놀라게 하고 의혹스럽게 만들려는 계획을 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당초 비망기가 깊은 밤중에 내려졌을 때 최석항은 혹시나 다른 사람이 같이 들어갈까 염려하였는데, 대신이 막 나아가자 곧바로 스스로 독대(獨對)하여 여려 신하들이 극력 간쟁할 수 있는 길을 미리 막았고, 자기 혼자서 처리하려는 자취를 자랑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정태(情態)는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바가 있으니, 청컨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ꡓ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ꡒ병을 숨길 수 있는가? 성인(聖人)도 또한 질병이 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의 고명편(顧命篇)에 이르기를, ꡐ이제 하늘이 나에게 질병을 내려 장차 일어나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ꡑ 하였으니, 이것은 성왕(成王)이 그 병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임금이 질병이 있으면 신하가 숨길 수 있겠는가? 늘 있는 병은 실덕(失德)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경》의 금등편(金?篇)에 이르기를, ꡐ너희 원손(元孫) 모(某)가 나쁜 병을 만났다.ꡑ고 하였으니, 이것은 주공(周公)이 무왕(武王)의 병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대저 임금에게 불행히 병이 있는데, 좌우(左右)에서 나라의 주권을 도둑질하여 사직(社稷)이 장차 망하게 되었다면, 비록 즉위(卽位)한 원년(元年)일지라도 저사(儲嗣)를 세울 수가 있는 것이고, 저사를 이미 세웠다면 어찌 국정(國政)을 섭정(攝政)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군주가 병이 있는데도 동궁(東宮)이 섭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난신(亂臣)이고, 군주가 병이 없는데도 동궁이 섭정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난신이다. 아! 임금께서 병이 있는가, 병이 없는가? 최석항이 전상(殿上)에서 모시고 있는데 임금이 그를 국문하라 명하시고 신치운(申致雲)이 전상에서 모시고 있는데 임금이 그를 가두라고 명하신 후에야 저들의 무리가 비로소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ꡐ성상의 질병을 끝내 숨길 수 없다.ꡑ고 할 것이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사대신(四大臣)이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린 것이 어찌 신하의 절개가 없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대신들은 나라가 반드시 멸망할 것을 보고도 오히려 일조(一朝)의 화(禍)를 고려하여 능히 왕세제(王世弟)를 높여서 떠받들어 국정(國政)을 섭정하기를 청하지 못하였다면, 그들의 불충(不忠)한 죄가 저들의 무리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조태구 등이 승정원을 경유하지 않고 들어옴에 미쳐서 위기(危機)가 위로 동궁(東宮)에게 닥쳐서 실로 말하기 어려운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김창집 등이 이에 창황히 따라 들어가 같은 목소리로 환수(還收)를 청하였으니, 또한 그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그들이 멋대로 장살(狀殺)을 행함에 있어서 오로지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죄안(罪案)으로 삼았고, 을사년287) 이후에 이르고 나서는 스스로 연명 차자에 위배한 자가 도리어 그들의 역안(逆案)이 될 줄을 알았기 때문에 드디어 삼변(三變)의 설을 만들어내어 처벌하였다. 삼변은 바로 정청(庭請)․연차(聯箚)․수환(收還)이다. 이른바 ꡐ삼변ꡑ이란 것은 그것이 변한 것이 아니고 단지 충성을 하는 데 한결같았던 것을 볼 수 있다.ꡓ./ 【영인본】 41 책 354 면/ 【분류】 *정론(政論)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285]을유년 : 1705 숙종 31년. ☞ / [註 286]북문(北門)의 변(變) : 중종(中宗) 14년(1519)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을 모함하여 사사(賜死) 또는 유배(流配)하게 된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말한 것. 북문은 경복궁(景福宮)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 / [註 287]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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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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