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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49-1:서종일(1727.3.1제수-동년.4.16하직-1728.7.22이후 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7.02.21 07:00:36

  예천고을원 149-1 서종일(1727.3.1제수, 동년.4.16하직-1728.7.22이후 이임) : 이인좌의 난 평정 1등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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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종일(徐宗一)1727(영조 3)에 이사일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1728(영조 4)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서울 사람, 본관은 대구, 통덕랑 문도(文道)의 아들, 종척종제(군수)종신종협의 동생, 치홍의 아버지이다.

  1727년에 예천 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예천군과 용궁현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문경새재(조령성)를 지켰다.

  이때 예천군의 장위규를 별군관으로, 임원발을 별장 겸 유진장으로 삼아 적의 두목인 세추와 세모 및 그 종 익남 등을 용문면의 산골짜기에서 사로잡아 충주 도순무사에게 압송했다.

  1728(영조 4) 424일 영남 안무사 박사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예천의 군사 박국지가 조령을 지키다가 종기가 터져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예천군수 서종일이 집에 돌아가 병을 조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박국지는 마땅히 지키던 곳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끝내 가지않고 있다가 그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마땅히 그의 집을 돌보아 구휼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관찰사로 하여금 돌보아 구휼하게 하였다.

  예천군 현동면(현 의성군 다인면 봉정1) 대곡사 입구에 서종일 군수 선정비가 세워졌고, 예천 사람이 이인좌의 난에 들어가 예천군이 예천현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이임하였다.

  172946일에 병조판서 조문명과 9일에 무록훈 도감이 임금에게 아뢰어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아들인 치홍은 1763년 증광 생원시에 39위로 합격하였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4-02-20 10: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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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일(徐宗一) : 1727(영조 3)에 부임, 1728년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서울 사람, 본관은 대구(大丘), 통덕랑(通德郞) 문도(文道)의 아들, 종척종제(宗悌, 1656, 字孝叔, 生員, 郡守)종신(宗愼)종협(宗協)의 동생, 치홍(致弘)의 아버지이다. 이인좌의 난(1728)이 일어났을 때 용궁과 예천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조령성(鳥嶺城)을 지켰다. 이 때 예천군의 장위규(張緯奎)를 별군관(別軍官)으로, 임원발(林元發)을 별장 겸 유진장(別將兼留陣將)으로 삼아 적추(賊酋)인 세추(世樞)와 세모(世謨) 및 그 종 익남(益南) 등을 북삼면(北三面, 現 龍門面)의 산골짜기에서 사로잡아 충주 도순무사(忠州都巡撫使)에게 압송했다. 1728(영조 4) 424일 영남 안무사(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왕에게 아뢰기를, "예천의 군사 박국지(朴國只)가 조령을 지키다가 종기가 터져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예천군수 서종일(徐宗一)이 집에 돌아가 병을 조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박국지는 마땅히 지키던 곳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끝내 가지않고 있다가 그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마땅히 그의 집을 돌보아 구휼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관찰사로 하여금 돌보아 구휼하게 하였다. 예천군 현동면(醴泉郡縣東面, 現 多仁面 鳳井1) 대골 대곡사(大谷寺) 입구에 1740(영조 16)에 세운 선정비(碑銘 : 郡守徐侯宗一愛民善政碑 庚申 十月 日立)가 있는데, 이 마을 대곡절(大谷寺)은 서울로 통하는 역로(驛路)의 길목이었으므로 오가는 손님 눈에 잘 보이도록 선정비를 세우게 되었다. 원래는 역로 여러 곳에 있던 비들을 1980년에 면장이 대곡사(大谷寺) 입구에 모아 세웠다. 그러나 1728(영조 4)에 예천 사람이 이인좌의 난에 들어서 예천군(醴泉郡)이 예천현(醴泉縣)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서종일 군수는 이임하였다. 1729(영조 5) 46일 병조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왕에게 말씀드리기를, "예천의 전 군수 서종일(徐宗一)은 변(이인좌 난)이 발생한 초기를 당하여 공로가 없지 않았는데도 원종공신(原從功臣)에서 누락되었으니, 의당 원종공신 1등에 추가로 등록해야 됩니다." 하니, 윤허하였고, 동년 49일 구무녹훈도감(舊武錄勳都監)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전 군수 서종일을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추가하여 녹훈(錄勳)하도록 만장일치로 부표(付標)하여 올립니다." 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아들 치홍은 1763(영조 39) 증광 생원시에 39위로 합격하였다.(襄陽耆舊錄, 英祖實錄, 司馬榜目)

 

  서종일(徐宗一) : 1727(영조 3)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였다. 1728(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용궁(龍宮)과 예천(醴泉)의 병사를 이끌고 조령성(鳥嶺城)을 지켰다. 이 때 예천군의 장위규(張緯奎)를 별군관(別軍官)으로, 임원발(林元發)을 별장 겸 유진장(別將兼留陳將)으로 삼아 적추(賊酋)인 세추(世樞)와 세모(世謨) 및 그 노비 익남(益男) 등을 북삼면(北三面, 現 龍門面)의 산골 중에서 사로잡아 충주 도순무사(都巡撫使)에게 압송했다. 그러나 1728(영조 4)에 예천 사람이 이인좌의 난에 들어서 예천군(醴泉郡)이 예천현(醴泉縣)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서종일 군수는 이임하였다.

 

  서종일[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331(무자) 원본634/탈초본34(13/24) 1727雍正(/世宗) 5/ 有政吏批, 行判書沈宅賢受由在外, 參判金有慶進, 參政李箕鎭進, 行都承旨趙榮福進兵批, 行判書金興慶陳疏受由, 參判李裕民病, 參議趙鳴鳳病, 參知慶聖會進, 左副承旨羅學川進吏批啓曰, 守令多?, 今當差出, 而近來州郡之望乏少, 守令中有聲績人, 竝擬何如? 傳曰, 兵批啓曰, 新除授碧團僉使張萬甲, 母年八十有三, 美錢僉使李在錫, 母年七十一, 而他無兄弟, 廢茂山萬戶崔道昌, 父年七十有二, 而亦無兄弟, 俱以不忍遠離赴任之意, 呈狀乞遞邊將之親年七十五歲以上者, 及七十歲以上而無兄弟獨子, 則許遞其任, 已有定式碧團僉使張萬甲, 美錢僉使李在錫, 廢茂山萬戶崔道昌, 竝令姑改差, 何如? 傳曰, 又啓曰, 新除授高嶺僉使鄭智呈狀內, 衰老之中, 加以水土所傷, 疼風之症, 時時發作, 卽今病勢, 旬月之內, 差復無期, 決無赴任之望, 斯速入啓處置云聞其病勢, 果是實狀, 決難等待其差復, 今姑罷黜, 准期不敍, 何如? 傳曰, 吏批, 以申昉李鳳翼爲承旨, 朴弼正爲獻納, 鄭匡濟爲弼善, 柳謙明爲文學, 趙命臣爲工曹參議, 宋秀衡爲兵曹佐郞, 金侃爲兵曹佐郞, 兪宇基爲工曹佐郞, 趙廷涑爲監察, 鄭來周爲安州牧使, 李雨臣爲富平府使, 徐宗一爲醴泉郡守, 金趾慶爲義興縣監, 黃龜河爲司譯提調, 平原都正標爲司饔副提調, 司僕僉正金後衍, 仍任事承傳兵批, 副護軍趙命臣林柱國, 副司直朴弼正申魯姜一珪等單付(www.history.go.kr 2007)

 

  서종일[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3322(기유) 원본634/탈초본34(3/18) 1727雍正(/世宗) 5/ 金致?啓曰, 今日醴泉郡守徐宗一肅拜單子入啓之後, 謂有身病, 不爲入來雖未知病狀之如何, 而其在事體, 殊甚未安, 推考警責, 何如? 傳曰, (www.history.go.kr 2007)

 

  서종일[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3416(임인) 원본637/탈초본34(2/24) 1727雍正(/世宗) 5/ 下直, 醴泉郡守徐宗一, 陰城縣監朴震亮(www.history.go.kr 2007)

 

  서종일[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225(병오) 원본656/탈초본35(29/33) 1728雍正(/世宗) 6/ 泰億啓曰, 臣以司饔院職掌事, 有所仰達矣司饔院折受醴泉屯田處所收稅穀, 曾前則自本院, 定送差人, 以錢文四百五十兩, 每年收捧矣昨年因本郡報狀, 監司狀聞, 自本院勿送差人, 自本郡依定式收稅上納事定奪, 而卽接醴泉郡守牒報, 則以爲本屯稅穀, 元數九百餘石, 而減價三分之一, 以錢收捧, 則先捧者一千三百餘兩, 未捧者百餘兩, 都合則其數一千五百五十餘兩, 而只送五百兩, 其餘千餘兩, 則以補官用云蓋此屯, 旣是本院折受之處, 則當初以四百五十兩收稅定式者, 全出於往來差人輩, 瘠公肥私之計, 誠爲可痛本官, 旣請寢差人, 從實收稅, 隨其所捧, 盡數上送, 事理卽然, 只以五十[]兩加送, 千餘兩則自用, 誠爲不當矣所當自本院, 發關盡推, 而聞醴泉, 自失此屯, 邑事, 大不如前, 今又以賑民爲言, 則不可無參酌許給之道大抵折受, 爲外方之弊, 醴泉北三面, 折受本院後, 本邑, 大不如前云若自國家罷折受, 盡歸戶部, 本院所用, 自戶部移給則似好, 而不然則令本官, 就其所捧, 折半上納, 折半許補官用事, 定式知委, 何如? 上曰, 首相之意, 何如? 光佐曰, 其事細?, 未足以煩上聽, 一該司之事也其邑, 得差人所食, 而不欺, 盡報本院, 本院如欲用則用之, 其餘, 給本郡則好矣泰億曰, 其事, 臣亦非不知細?, 而此是昨年, 因本道狀聞, 榻前回啓之事, 今當有變通事, 何可不仰達乎? 折半屬本院, 半屬本郡, 似好矣上曰, 予意與領相同矣但此等事, 可不稟而行之, 罷折受處, 盡歸戶部, 未知其何如, 而左相之欲一稟定者, 蓋慮不爲定式, 則其守令遞去後, 或有後弊故耳折半或加給, 自本院, 參商爲之, 可也光佐曰, 折半出給似好, 而今年所出, 適至於一千數百兩耳若自廚院, 不問??, 常依其數徵之, 則亦恐爲外方之弊矣上曰, 酌量爲之, 可也出擧條(www.history.go.kr 2007)

 

  서종일[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311(신유) 원본657/탈초본36(25/25) 1728雍正(/世宗) 6/ 今三月十一日巳時, 上御?政堂, 嶺南別遣御史朴文秀留待引見入侍時, 御史朴文秀, 都承旨李廷濟, 假注書鄭道殷, 記事官李宗白李周鎭諸臣以次進伏訖文秀起拜曰, 如臣無似, 猥當委寄之命, 自踰嶺以後, 每當所過邑, 村民未知御史之過去, 或有未及呈狀者, 先爲發關於所經處, 使以御史某日當到之意, 各別知委民間, 故所到之地, 來訴者小則八九百名, 多則千餘名聚會臣以聖上軫念之意, 縷縷曉諭, 而此不過以空言慰撫而已, 姑無實惠及民之事, 是實可悶臣復諭以國家惻念窮民, 非不欲多給還耗, 而汝等受食各年還穀, 多不備納, 其數不知幾萬石, 以此之故, 所給甚小然國家顧恤之意, 大出尋常, 汝等能知之云, 則民之聞之者, 尤有感戴之意, 此不無收拾人心之效, 誠爲多幸, 而至於弊?, 則或有大同之弊, 或有一邑之弊, 其端不一故略有所笏記者, 請一一奏達, 何如? 上曰, 依爲之文秀曰, 道內守令之善治者十分之一, 僅成貌樣者十分之七八若竝與此等守令而遞罷, 則後來者未必勝於前, 初不如姑置之爲愈矣臣於今日, 當略陳所經各邑守令之能否, 而其最不治者, 不可不變通矣上曰, 依爲之文秀曰, 梁山金山居昌等邑, 則或已請罪, 或已封庫, 今不必仰陳, 而至於龍宮慶山, 則道臣雖已啓罷, 臣亦當告其不治之狀矣慶州府尹崔宗周, ?任不久, 故治績姑無可稱尙州牧使趙榮祿, ?剛精明, 其爲治法, 極有條理, 土豪稍?, 小民皆安星州牧使李普赫, 周通贍敏, 剖決如流, 軍額多充, 民役多?, 到任未久, 民譽載路安東府使李廷?, 爲治不猛, 姑無民稱, 當觀前頭, 可論能否仁同府使成致績, 至誠恤民, 且勤賑政, 小欠明斷, 民不爲病善山府使朴弼健, 忠厚惇謹, 慈愛惻?, 視民如傷, 可謂良吏柒谷府使柳東茂, 政先充額, 民乃安堵, 明剖秋毫, 奸莫逃形, 曾過其境, 無一狀訴, 治法旣成, 民頌喧耳蔚山府使李萬維, 非不至誠求治, 而昏不省事, 吏緣爲奸, 貽害小民之端甚多, 請李萬維罷職,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文秀曰, 東萊府使趙榮世, 才足以爲邊?, 而閉閤携妓, 以此爲事, 然小民則惜其去矣密陽府使李敬?, 廉謹自持, 循蹈規矩, 奉法甚勤, 愛民亦切順興府使李聖至, 頗有民譽, 當觀將來大丘判官尹潚, 初當大邑, 人器不稱, 非不欲治, 全不解事, 雖責來效, 萬無其期, 請尹潚罷職,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文秀曰, 興海郡守許樑, 初不爲治, 聞有暗行, 加意愛民, 民頗有譽淸道郡守鄭錫範, 旣通事務, 且多計慮, 剛明精密, 治法有度, 民不見吏, 闔境晏然?基郡守沈一羲, 爲治平順, 無德無害榮川郡守尹昌來, 老昏且病, 閉閤而臥, 民不見面, 奸吏縱橫, 故臣初欲論遞, 而監司先已啓罷, 今無可言矣前草溪郡守朴鳳彩, 極力爲治, 頗有民譽, 且設雇馬廳, 邑賴其惠多矣永川郡守朴弼謨, ?自持, 吏民俱畏, 而如此之際, 上下之情, 恐有不通之慮矣醴泉郡守徐宗一, 長處甚長, 短處甚短, 或譽或毁, 人言不一, ?甚均, 充額旣多, 氣則有餘, 明則不足, 而奉公之心, 亦足可尙前陜川郡守金鼎運, ?民役, 治亦有譽, 暫時請由, 民或恐失開寧縣監宋?, 文雅爲治, 吏民亦安, 意外身死, 一境嗟悼河陽縣監李敬臣, 慈良愷悌, 爲治亦勤, ??[?]飢民, 如保赤子, 民曰父母, 闔境騰頌奉化縣監李龜齡, 平順之治, 吏民俱便淸河縣監權世隆, 安詳慈仁, 且有內助, 臨民甚勤, 民樂其惠, 一境無事咸昌縣監李顯道, 平順爲治, 別無可稱安陰縣監吳遂郁, 處事旣公, 愛民亦勤, 民皆稱有士夫之風前玄風縣監洪致厚, 爲政詳明, 吏民俱便, 一境晏然, 皆惜其去禮安縣監呂命周, 頗有雅治, 懶於視民, 數近酒盃, 濫杖有妨延日縣監安宗國, 誠心爲治, 民頗賴安?縣監高重明, 治效未著, 別無大害昌寧縣監李義濟, 平順爲治, 別無可稱機張縣監全聖賚, ?官以來, 恐或生事, 別樣操心, 官吏頗橫, 威或見損, 然愛民旣至, 民亦有愛慈仁縣監南國翰, 知識旣不明白, 酒盃一傾數壺, 吏樂民怨, 更無可論, 請慈仁縣監南國翰罷職上曰, 依爲之出擧條文秀曰, 前慶山縣令尹?, 在官旣久, 治無可稱, 吏奸民怨, 都無可言, 前龍宮縣監鄭湜, 老病臥閤, 詩酒爲事, 不干民政, 殆如過客, 吏橫民怨, 一境莫保, 而此皆已遞之官, 今無可論矣臣於入京後, 得見前梁山郡守安鍊石原情, 則以刷馬價不給事, 有所發明, 而觀其爰辭, 窘遁莫甚, 梁山民聚錢, 備立統馬, 使應公行刷馬, 而路貰則計程出給, 自是前例, 他邑亦然矣蓋朝家凡有調發刷馬之擧, 必以大同, 劃給其價, 而鍊石則不爲出給, 盡下雇馬廳及官廳而私用之, 其文書俱在, 焉敢欺乎? 且梁山之距安東十三站, 京城三十站, 前後累度, 私自刷馬, 而鍊石一不給價矣都承旨李廷濟曰, 各邑之設儲置米, 正爲此等用也至如進上靑大竹等物, 運致之際, 朝家皆以儲置, 劃給其價, 而守令間多有無據者, 或移用於官廳, 不爲出給, 或出給, 而該吏中間花消者甚多, 事極可駭, 此後則各別申飭, 何如? 上曰, 朝家不欲空役於民, 故自祖宗朝, 皆已劃給, 而爲守令者, 反爲私用, 則雖用以大同偸竊之律, 亦未爲過, 申明定式, 可也廷濟曰, 然則以此意行關諸道乎? 上曰, 依爲之出擧條文秀曰, 趙鼎彬之不爲原情, 是由於國綱解弛之致若有可訟之事, 則鼎彬別爲自暴, 猶或可也, 而御史啓其不法之事, 至有拿問之擧, 則問目內辭緣, 何可全然不對乎? 朝家之別遣御史之意, 果安在哉? 若有一分畏國之心, 決不當若是, 此路一開, 後弊有不可勝言矣廷濟曰, 玆事關係國綱, 其時金吾堂上, 所當更請嚴問, 而不此之爲, 遽然勘罪, 實爲未安矣上曰, 渠之當初所爲絶痛, 而更問之際, 徒傷國體, 故卽爲投?所達誠是, 更爲拿來, 以御史文書捧招, 而問目外辭緣, 切勿受納事, 分付金吾, 可也出擧條廷濟曰, 朴文秀起伏之際, 頻頻仰視, 極爲未安, 推考, 何如? 上曰, 此是朴文秀之性品也, 勿推, 只申飭, 可也文秀曰, 道內七十一邑, 折受處五十一邑矣各宮導掌, 各司差人, 各軍門別將, 其所濫捧, 比諸各邑, 必加倍入焉以醴泉北面司饔院折受處言之, 一年所捧, 少不下千餘兩, 而所納則不過四百餘兩由是言之, 其餘則差人盡爲肥己, 可知矣官家失此之後, 不成貌樣, 今則使本官, 收納本院, 故頗有剩餘, 本官以此添爲賑資, 且助官家應用矣大抵折受, 毋論宮家久近, 元無次次革罷之事, 每有漸漸加給之擧, 今年如此, 昨年又如此若國家萬年無疆, 則八道當盡入於折受, 而地部則殆不入一包米, 以此思來思去, 不覺發笑, 可謂長歌甚於痛哭矣大王九代孫, 有克定軍額之規, 則久遠宮家折受, 何獨不罷乎? 且本道, 以海路抵京, 比湖南湖西, 非但道里絶遠, 海路所經處極險故元無京中士夫農庄, 各邑守令之貪虐者, 以船路之如此, 約京商貿錢下來者, 其錢則留置京第, 而空手來受官錢, 每於年?之時, 十斗之米, 換錢一貫, 出賣百斛, 僅得百餘兩官家雖曰有裕, 一時數三百石, 豈可容易辦出? 以此貪吏, 比諸他道, 則頗少矣道內之穀, 出於道內, 盡於道內故雖値凶荒, 民不至於流散, 而國家太平旣久, 私家所費, 比諸國初, ??以此推之, 宮中所用, 亦必如此, 猝然省減, 固似未易我國三隅面海, 最有魚鹽之利, 諸宮家, 諸上司, 諸營門, 各有所占, 橫侵狼藉今若盡爲革罷, 而以備局堂上提調, 兼管魚鹽事, 使之都摠, 優數計給各處所入, 其餘則劃送地部, 如是爲之, 則各宮各司各營門差人肥己之資, 必爲剩餘魚鹽之稅, 雖至半減, 似無國用不足之患, 臣意如此, 而不敢請行者, 臣之所見, 未必十分的當, 故不過仰達而已矣此外所見聞, 竝當詳細書啓, 而御史書啓, 必皆親書云, 臣於退出後, 當卽修納矣上曰, 盡欲親書, 則必費多日, 何必親書乎? 從速修啓, 可也廷濟曰, 朴文秀以安鍊石不法之狀, 至於袖進所折價之鰒魚, 此何欠敬於至尊之前, 推考, 何如? 上曰, 事欲眞實之致, 此何妨乎? 勿推文秀曰, 慶州, 卽新羅故都也幅員甚廣, 一邊距東海, 一邊距靑松, 人物又繁, 最號難治, 而近來爲此州者, 皆是文蔭文則必是曾經承旨侍從之人, 蔭亦南行之年老而至堂上者故率多閑臥宴樂, 以爲休息之所, 初不留意於民事, 而其州中所謂神光竹長杞溪三面, 距州治最遠故風約輩, 任意橫侵, 民不堪命朝家於慶州, 則尤不可不?擇其守宰矣廷濟曰, 小臣曾按嶺南, 故慶州事, 亦頗詳知矣物衆地廣, 最是嶺南大處, 而邑弊民?, 不一其端, 實爲難治之邑, 日後交遞時, 必以望實俱著者, 愼擇以送之意, 預爲申飭銓曹, 何如? 上曰, 其言俱好矣各別申飭, 可也出擧條 上曰, 京畿則無抽?之邑耶? 文秀曰, 龍仁縣令宋性源, 非但不治, 陵幸擧動時, 多定路炬, 每炬一柄, 捧錢二兩, 其數不知其幾且田政, 多有民怨, 從當査?, 而臣之不爲書啓者, 因賑事甚急, 急於復命, 未及出頭査問, 故不爲仰達矣聖敎及此, 侍臣皆已聞知, 不可置之, 請宋性源姑先罷職, 何如? 上曰, 其言是矣爲先罷職, 而所犯若重, 則從後査問, 可也出擧條文秀曰, 竹山府使崔必蕃, 田政軍政, 俱有怨謗, 而田政則下吏受田夫之錢, 單子之虛災者, 一竝受納云必蕃?不覺察, 其他治蹟, 從可推知矣上曰, 向者臺臣, 以必蕃之不治, 至於論劾, 而道臣則又狀褒其善治, 何相反之至此也? 文秀曰, 臣亦慮其所聞之或不眞的, 下去之時, 將欲査實, 査實後, 當又狀聞矣上曰, 依爲之廷濟曰, 小臣, 向以武科科場申飭事, 有所疏陳矣試以今番關西武科事言之, 因淸北擧子作?, 至於翌日設場, 極可駭然淸南人之稱以父子相避, 移赴淸北者, 若止數人, 則淸北擧子雖無識, 豈至此境耶? 頃日聖敎, 實有明見萬里之事矣近因西來之人聞之, 則淸南移赴之類甚多, 而安州爲尤多云淸北擧子之憤鬱, 亦有其由諸試官旣有拿問之擧, 宜令平安兵使, 收聚淸南北錄名單子及前後公移, 詳査移赴之類, 一一啓聞後處之因飭日後, 似爲得宜, 故惶恐敢達上曰, 其言是矣, 依爲之出擧條廷濟曰, 翊衛尹東源, 數三出入召對, 講說精深云, 裨益聖學必多, 同朝喜甚, 但每當召命, 過爲謙?, 又復言病不入矣東源非山林隱遯之士, 乃世祿之臣, 先正之孫, 何自過謙如此乎? 臣實慨矣而衛率朴弼傅, 卽先正臣朴世采之孫, 曾入諮議之望, 因吏曹判書李台佐所達, 陞拜桂坊, 而尙未入來供職, 顧此兩臣, 皆是先正之孫, 先正未究於當日者乃效於殿下, 則豈不忠孝兩美乎? 當此聖上鎭日開筵, 一心講道之日, 雖草野讀書之人, 宜思幼學壯行之義, 皆願出入於補導之地況兩先正之孫, 何可每每執謙, 不爲赴召耶? 朴弼傅, 亦依尹東源例, 使之催促入來, 以爲出入兩筵之地似好, 故惶恐敢達上曰, 所達?好矣朴弼傅亦依尹東源例, 自政院, 催促入肅, 可也上曰, 嶺南湖南兩道御史, 曾於春坊時, 予已知其爲人, 而湖南頃日上來時, 凡所奏對, 纖悉無遺漏, 其人之詳密, 尤可知矣湖西御史李道謙, 予實初見, 只因大臣陳達而知之, 蓋其爲人, 極似周密矣嶺南御史則予但恐其有嫉惡太過之弊, 且予於三道御史, 將欲久任, 非期一二年, 亦不當過自驅馳, 以損筋力, 須量而爲之, 是所望也館職亦已出肅, 因爲留直, 凡於召對時, 亦爲出入陳達, 可也文秀曰, 自上至慮臣之有損筋力, 感惶何喩? 至於嫉惡太過之敎, 尤當銘佩, 而但臣性本柔善, 又看人之弊, 太爲曲盡, 凡於嫉惡等事, 實多不及之弊矣上曰, 後日次對時, 御史亦同入, 可也諸臣遂退出(www.history.go.kr 2007)

 

  서종일[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424(갑진) 원본660/탈초본36(48/55) 1728雍正(/世宗) 6/ 戊申四月二十四日未時, 上御?政堂, 嶺南按撫使朴師洙請對入侍時, 同副承旨趙顯命, 記注官閔珽, 記事官李周鎭, 假注書尹宗夏, 竝入侍師洙進伏曰, 宗社靈長, 兇賊掃平, 今已告廟頒慶, 下情?, 何可勝達? 小臣, 頃當變亂罔極之日, 主辱臣死, 義不欲生, 不揆才分, 妄自請行, 受命踰嶺, 幸見寇賊旋平, 安撫之事, 此正其時, 而猝聞母病甚重, 方寸靡定, 自大丘疾歸安東, 仍承召命, 星夜作行, 凡所經度之事, 無所施措, 一皆抛置而來, 不勝惶恐自安東離發也, 敢上待罪狀啓, 入京後, 始承勿待罪有旨, 尤切惶恐矣上曰, 賴祖宗之黙佑, 臣民之效力, 嶺諸賊, 幸已掃平, 而驚痛之心, 夫豈少已? 嶺南旣平, 而聞卿有母病, 故召還, 而今日雖知入來肅拜, 慮卿方寸必亂, 不爲賜對矣今卿請對, 嶺南事, 大抵如何? 師洙曰, 臣於發行時, 入侍帳殿, 得聞賊招中, 嶺南兵數萬, 越來之說, 而直路則盜賊充斥, 不得不從原州及四郡狹路作行, 道路傳聞?, 人心騷動, 其時憂慮, 何可勝言? 踰嶺之時, 尙未聞官軍安竹勝捷之報, 旋値下道賊變猝地, 嶺外人心, 亦極波蕩, 莫可鎭定矣聞臣之來, 士民爭來, 問京中消息, 臣又多般曉諭, 使之鎭定, 入安東, 又爲招集境內有名稱朝士儒生, 坐置城中, 曉以逆順之辨人情, 皆有係屬之處, 此則朝廷之差遣安撫使, 不無其效渠輩, 亦皆發文通曉於境內, 倡起義旅, 觀其言辭擧措, 則皆若有向上之心, 且以大體言之, 下道之俗獰悍, 上道之人質樸, 安東, 尤是士夫之鄕, 故臣初以下道可憂, 上道無可憂之意, 馳啓矣嶺南之人, 中下道則論議岐貳, 士民中往往有義兵爲賊兵之說, 臣不勝驚駭, 試爲詳察, 則大抵曺李三賊之姻黨戚屬, 多在安東及他邑, 此輩, 擧懷疑懼, 而其中或有來附義兵, 以爲自效之計者, 如此之類, 臣若以爲汝邑逆賊之姻親, 而顯言斥黜, 則亦非鎭定之道, 故置而不問但嚴飭諸處義兵, 使之切勿妄動, 更觀賊勢緩急進止, 旣聞平賊之報, 卽皆傳令罷之, 此等事狀, 皆已陸續馳啓, 聖鑑必已下燭矣臣在安東時, 則猶未詳知物情, 及到大丘, 按問罪人等, 且得賊中書札, 則熊輔, 三月初, 來留安東, 仍向安陰, 明白無疑, 如是之際, 安東之人, 亦豈無知情者乎? 以此言之, 臣之當初狀聞中上道無憂之說, 實涉率爾, 極爲惶恐臣自大丘歸安東, 始聞熊輔, 來留於安東?山縣而去, 醴泉郡守徐宗一, 亦言近日, 始聞三月十三日, 熊輔輩數三人, 過登邑內燕賓樓, 飮酒而去云且以鄭賊與其子書中, 花伯籠鷄之說觀之, 此賊, 初欲擧事於上道可知, 而大抵安東之人, 勇悍不如下道, 雖有知情者, 似不能應手, 故伊賊, 還向安陰而起矣趙顯命曰, 此言與鞫廳所聞, 略同矣師洙曰, ?, 乃安東望士也臣之初入府, 卽爲書邀, 使之來集城中, 而未及至矣, 禁府都事, 以拿?事下來, 見臣而小紙書名, ?乃煦, 然安東本無權煦爲名之人, 同志者, 只是權?, 故臣發軍付都事, 出送其家矣?於都事發去之後, 請謁於臣, 臣招入着枷, ?之辭色不變, 自謂與李麟佐相識, 此外無他罪, 上京, 可以伸理, 故付都事上送後, 聞安東之人所傳, 則熊輔, 來說?共擧事, ?言吾頭可斷, 不可從也, 熊輔, 忿怒而去云矣及入京中, 得聞參鞫諸臣之言, ?也元無直告之語, 但云年前與麟佐, 相遇於書院云, 與臣在安東時所聞大異, ?, 亦甚詐, 不可信也況伏聞?蒙放釋之後, 安東人, 亦多出於賊招, 而自上一切不許拿問云, 其在獄體, 何可以嶺南人, 而掩置不問乎? 上曰, 嶺南事, 誠可慮也?, 以賊招中換書名字之故, 不但諸臣, 皆欲原釋, 予亦見其所供, 只謂曾與麟佐子, 相見於書院, 似非同謀者, 故放之, 獨大司諫宋寅明, 請姑仍囚, 而予不從之矣其後, 又復緊出於諸賊之招, 卿言又如此, 予今悔不用大諫之言, 然旣已放釋, 更拿, 似涉顚倒權德秀柳夢瑞, 尤爲緊出賊招, 而釋?而拿此輩, 亦涉不均且此有異於元犯, 若以知情不告官論之, 則不但嶺南, 三南盡然, 若皆拿問, 恐致騷擾, 李宗城, 欲以蕩滌鎭定爲主, 不無所見矣顯命曰, 如此者無數, 盡用知情之律, 誠難矣師洙曰, 蕩滌鎭安, 豈非好道理, 而一切掩置, 置之??之中, 獄體斷不如此, 其中緊出者, 一倂拿問, 若有無所犯而橫罹者, 則辨別放釋好矣上曰, 辨別, 豈不難乎? 旣已拿來之後, 告者已死, 辨質無路, 加刑則有死而已, 此予所以持難者也師洙曰, 柳夢瑞權德秀, 則旣已緊出賊招, 尤不可不問, 夢瑞, 是故相臣柳成龍兄雲龍後孫也柳成龍子孫, 皆謹飭自守, 而雲龍後孫, 未必皆然, 權德秀, 頗豪强於鄕里, 臣曾爲安東府使時, 嘗欲以法治之而未果矣大抵夢瑞德秀, 皆自中有鄕望之人, 而金弘壽, 亦嘗素有名稱, 今番爛煥爲逆, 常時名稱, 何可信也? 上曰, 權德秀與權?, 爲人, 何如? 師洙曰, ?, 以學行著稱, 德秀, 好爲偏黨言論者也此等人, 終不可不一問, 請更詢大臣而處之, 何如? 且臣, 初以搜訪人才, 薦聞獎授之意, 馳啓, 而嶺人之出於賊招者如此, 姑不可容易薦聞, 當待事定獄畢後, 擇其不干連可用者而仰聞矣上曰, 嶺南穡事, 何如? 師洙曰, 雨澤周洽, 兩麥登熟, 極爲多幸上曰, 卿來, 從湖南路乎? 師洙曰, 不由湖南, 由鳥嶺忠州上來矣忠州以上畿內諸邑, 旱乾頗甚, 麥農不實, 極爲可慮今玆凶逆之變, 出於士大夫之間, 極爲憤痛, 而小民軍兵, 則皆有向上之心, 所在散軍, 少無逃散之患, 無敢或後, 人心如此, 誠無可憂矣大抵民風素朴直, 頗賴北道, 安東俗尤儉嗇, 臣於平日, 嘗欲從容一達而未果, 今始仰陳矣安東之民, 務麥農, 以夏間所收之麥, 能繼深秋之糧, 新穀不卽收獲, 故種早稻者絶少, 收穫之後, 計其所出, 若不足於明春, 麥前農糧, 則秋冬間, ?節不妄費, 多有食粥者, 米則以其用貴之故, 必食雜穀臣嘗見畿內兩湖, 則秋冬費穀無算, 沿海之民, 飯稻羹魚, 所食?, 一遇凶歲, 則飢餓流散, 死亡相續, 而安東近處之民, 以其常時節用忍飢之故, 凶歲流亡甚少, 飢民亦多生活此等事, 自上, 誠宜下燭, 而國家亦宜取倣其節用之法雖以軍兵言之, 耐寒耐飢爲上, 安東則米貴, 故大同儲置米, 或以田米捧留, 今番軍糧, 亦半給田米, 而民無怨言, 誠可使之卒也湖之軍, 豈能食田米, 而赴戰陣乎?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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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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