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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50-1:홍중성(1728.8.23제수-동년9.17하직-1729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7.04.27 06:05:04

  예천고을원 150-1 : 홍중성(1728.8.23제수, 동년.9.17하직-1729이임) : 예천현 때의 최초의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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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중성(洪重聖, 16681735)1728(영조 4)에 서종일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1729(영조 5)에 이임한 예천 현감이다. 자는 군칙(君則, 호는 운와(芸窩), 본관은 풍산, 선공감부정 만회(萬恢)의 아들이다.

  부모 슬하에서 1696(숙종 22) 식년 진사시에 14위로 합격하였다. 1719(숙종 45) 117일에는 석성 현감을 이임하였고, 1728년에 예천 현감에 부임하였고, 그 후 판결사, 군수를 지냈다.

  명문 출생이면서 검소하였고, 문장(진체)에 뛰어났고, 저서로 운와집6권이 있다.

  홍중성이 예천고을 원으로 있을 무렵인 1729(영조 5) 729일에 사옹원 예천분원이 땔감으로 사용하던 산에 대한 면세를 받았다.

  1727년 증광 문과에 예천읍 고평리 출신 정옥이 병과 27위로 급제하여 승지, 관찰사를 지냈고, 1729(영조 5) 식년 문과에서 예천 출신 김극령이 을과 5위로 급제하여 도사를 지냈고, 남지는 병과 17위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을 지냈다.

  홍중성이 예천고을 원을 할 무렵에 용궁 현감은 박필기인데, 17283월에 부임하여 1733(영조 9) 2월에 이임하였다. 자는 경후, 본관은 반남이다. 재임 중 농사를 장려하고 학문을 진작시켰고, 가난한 백성들을 적극 도와 주었으므로 용궁현 사람들이 두고두고 칭송하는 명관 중의 명관이라고 했다. 그러나 임기가 끝났다고 과거보러 가느라고 임의로 고을을 비웠다고 물러나게 되었다.

  1729(영조 5) 5월에 조정에서는 산의 중복 이상에서의 화전 경작을 금지하였고, 12월에는 사형수에 대하여 삼복제도를 행하였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4-04-03 11: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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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성(洪重聖) : 1728(영조 4)에 부임, 1729(영조 5)에 이임한 예천 현감이다. 1668(현종 9)-1735(영조 11), 자는 군칙(君則), 호는 운와(芸窩), 본관은 풍산, 선공감 부정(副正) 만회(萬恢)의 아들, ?(?)김창흡(金昌翕)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문사(文辭)를 좋아했고, 16세 때 신?으로부터 고체시(古體詩)가 훌륭하다는 칭송과 함께 증시(贈詩)를 받았다. 부모 슬하(具慶下)에서 1696(숙종 22) 식년 진사시에 14위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열중했다. 그 뒤 세자익위사 세마, 사헌부 감찰, 호조 정랑 등을 거쳐 1719(숙종 45) 석성 현감(石城縣監)에 제수되어, 동년 117일에 이임하였다. 그 후 1728년 예천 현감으로 부임하여 1729년에 이임하였는데, 1730(영조 6) 55일에 정언 서명형(徐命珩)이 상소하기를, "홍중성은 군현의 수령에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선비 반열에서 삭제하는 법률로써 시행하소시."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정언의 말이 오히려 사리에 맞지 않으니, 서명형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그러나 홍중성의 벼슬도 단양 군수, 강화 경력, 판결사에 그쳤다. 명문 출생이면서도 검소하고, 역사에 정통하였고, (), (), (, 晋體)에 뛰어났고, 특히 시를 잘 했다. 조유수(趙裕壽), 이병연(李秉淵), 홍세태(洪世泰) 등과 시사(詩社)를 만들어 항상 수창(酬唱)했다. 문집 <운와집(芸窩集)> 6권이 있다. 1728년에 예천군(醴泉郡)은 역적의 태생읍이라고 예천현(醴泉縣)으로 강등됨에 따라 홍중성이 예천 현감으로 부임하였다.(肅宗實錄 1719.11.3, 英祖實錄, 韓國故事大典 1965, 司馬榜目)

 

  홍중성(洪重聖) : 1728(영조 4)에 예천 현감(醴泉縣監)으로 부임하여 1729(영조 5)에 이임하였다. 호는 운와(芸窩), 본관은 풍산, 1696(숙종 22)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벼슬은 군수(郡守)를 지냈다. 검소하고 시(), (), ()에 뛰어났다.

 

[저서] : 문집으로 <운와집(芸窩集)>(4047, 63, 古活字本(芸閣活字), 29.8x18.5cm, 四周雙邊, 半郭22.7x13.7cm, 1020, 註雙行, 版心上白魚尾)이 있는데, 손자 양호(良浩, 1724-1802)가 편집하여 명호(明浩)1784(정조 15)에 간행했다. 1-4에 시() 740(1183, 2187, 3181, 4189)가 있는데, 이들 시는 성당(盛唐)의 풍()을 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5에 서() 4(豊山世乘序, 南川世稿序 等), () 2(山仰齋記, 愛竹堂記), 제발(題跋) 6(鶴谷先生集跋, 題李一源海嶽傳神帖, 題金子直燕錄後, 題李德謙詩稿 等), 상량문(上樑文) 1, () 1(上南漢春), () 1(鷲巢說), () 8(與洪道長書, 上西橋書 等), 지명(誌銘) 3(李注書挺淵墓誌銘 等), 서한(書翰)에는 간략하긴 하나 시(), 문체(文體) 및 이기(理氣) 등에 관해 논의한 내용들이 일부 들어 있다. 6에 행장(行狀) 3(先府君行狀, 張監察智賢行狀 等), 제문(祭文) 5(沔川李東岳安訥祠宇奉安祭文, 五申山靈臺祈雨祭文 等), 애사(哀辭) 5(李友子深眞源哀辭, 南進士克寬哀辭 等), 부록으로 부군행장(府君行狀, 洪重聖)이 있고, 끝에 1784년에 쓴 홍양호(洪良浩)의 발문이 있다. 또한 저서로 <운와선생문집(芸窩先生文集)>(KDC 810.829, DDC 895.7, 20)이 있는데, 이는 한국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7년에 출판한 <한국역대문집총간> 2401권에 수록되었다. 507, 영인본(影印本), 23cm이고,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경북대, 경산대, 성균관대(서울), 신라대, 영남대, 원광대, 전남대, 충북대, 한양대(서울)이다.(인터넷 야후 2001)

 

  홍중성(洪重聖) : 예천 군수이다. 1668(현종 9)1735(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측(君則), 호는 운와(芸窩),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혼인한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의 손자로, 판결사 만회(萬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관찰사 명일(命一)의 딸이다. 김창흡(金昌翕)을 사사하였다. 1696(숙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군자감 주부사헌부 감찰공조 좌랑호조 정랑 등을 거쳐, 1719년 석성 현감금화 현감예천 군수단양 군수를 지낸 뒤 강화 경력(江華經歷)으로 있다가 임소에서 죽었다. 금화 현감으로 있을 때는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던 강도사건을, 옛날에 모종(模種)이 썼던 방법으로 강도가 자수하게 한 일이 있었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시에 있어서는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당시 시명(詩名)을 날렸던 조유수(趙裕壽)이병연(李秉淵)홍세태(洪世泰) 등과 시사(詩社)를 만들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는운와집6권이 있다.(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窩集, 權五虎(韓國學中央硏究院))

 

  홍중성[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823(신축) 원본669/탈초본36(20/39) 1728雍正(/世宗) 6/ 吏批, 以金浩爲執義, 柳儼爲文學, 金鎭商爲副應敎, 朴師正爲修撰, 趙迪命爲副修撰, 吳瓊爲兵曹佐郞, 李善泰爲兵曹佐郞, 尹世鳳爲直講, 洪重聖爲醴泉郡守, 宋必煥爲司僕主簿, 沈命說爲尙瑞直長, 任崇元爲宗廟副奉事, 金尙星爲兼南學敎授, 任珖爲兼司書, 徐宗玉漢學敎授單付, 潭陽府使李挺膺, 懷仁縣監卞觀夏, 麟蹄縣監趙鎭世仍任事, 承傳(www.history.go.kr 2007)

 

  홍중성[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917(갑자) 원본671/탈초본36(3/17) 1728雍正(/世宗) 6/ 下直, 醴泉郡守洪重聖, 咸悅縣監兪學基(www.history.go.kr 2007)

 

  홍중성[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010_0010_0270/ 여지도서 / 江都府誌 / 江華 / 官案 / ...李世晟 通訓乙未正月赴任戊戌二月瓜遞十七面皆有碑 呂必時 通訓戊戌二月赴任己亥二月以 大殿入耆社 推恩年七十陞資遞 元命龜 通訓 斗杓曾孫己亥三月赴任十二月 啓罷 崔星瑞 通訓庚子正月赴任辛丑四月移仁川府使因本府狀 啓仍任八月以 長寧殿修建時董役都廳陞資遞 金希魯 通訓 構之子辛丑九月赴任五月辭狀 壬寅啓罷 李廷晉 通訓癸卯壬寅五月赴任七月在 京卒 成孝? 通訓癸卯八月赴任乙巳十一月瓜遞 李秀衡 通訓乙巳十一月赴任丁未六月卒于官 鄭赫先 通訓 ?五父丁未七月赴任十月移坡州牧使 申義集 通訓 翼相孫丁未十月赴任庚戌二月瓜遞 洪晉猷 通訓 重普曾孫庚戌三月赴任十一月移高陽郡守 朴弼莘 通訓庚戌十二月赴任壬子七月卒于官 宋徵泰 通訓壬子七月赴任乙卯正月瓜遞 洪重聖通訓乙卯正月/ <상권0018-4>/ 赴任十一月卒于官 鄭述先 通訓載岱侄乙卯十二月赴任戊午三月瓜遞 李成允 奉列戊午三月赴任四月以歷淺臺疏遞 李肇元 通訓戊午五月赴任六月遭母喪 鄭欽先 通訓 述先弟戊午七月赴任辛酉二月瓜遞 沈廷采 通訓辛酉三月赴任癸亥八月瓜遞 李台鎭 通訓癸亥十月赴任甲子七月以畿伯從弟相避遞 金致謙 通訓甲子八月赴任丙寅十二月以侍從臣父年七十陞資遞 尹潗 通訓丁卯正月赴任戊辰十一月卒于官 權定性 通訓戊辰十二月赴任己巳三月移廣興倉守 林象鼎 通訓己巳四月赴任辛未二月 移掌樂院正 鄭懋先 通訓 欽先弟辛未三月赴任十一月以殺獄初檢不審狀罷 沈得賢 通訓壬申正月赴任九月因辭狀 啓罷 鄭壽仁 通訓壬申十月赴任乙亥四月瓜遞 朴師漢 通訓乙亥五月...(www.history.go.kr 2007)

 

  홍중성[記事] : 비변사등록 새창/ ID : bb_099_001_05_3220/ 기사제목 右議政 宋寅明이 입시하여 歲末에 부임한 經歷 鄭述先에게 未捧의 죄를 주지 않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 왕 재위년도 영조 12/ 월일 丙辰五月初一日/ 今四月二十九日武所命官以下請對引見入侍時, 右議政宋所啓, 江華反庫御史書啓, 臣爲覆奏辛壬條四分一未捧留守經歷竝請罷職, 已以鄭述先出現告矣, 卽見江留狀啓, 則經歷鄭述先, 以前經歷洪重聖久病身故之代, 歲末到任, 而因前留守沈宅賢馳啓停捧, 不得督捧云, 而仍陳述先守法奉公之狀, 有請仍之言矣, 臣之覆奏時, 意其未捧之罪, 前經歷當之, 而身故之人, 非可以拿問爲罪, 故請以罷職矣, 今觀現告, 鄭述先以磨勘文書之故當之, 而述先旣歲末到任, 則不捧, 非其罪, 留守狀啓, 至稱民情, 惜去文書磨勘之受罪, 亦是應行之法, 雖不可全然無罪, 姑勿罷職, 改以拿處, 爲其罪名何如, 上曰, 依爲之(www.history.go.kr 2007)

 

  홍중성[記事] : 숙종실록 64, 숙종 45( 1719 기해 / 청 강희(康熙) 58) 113일 신미 3번째 기사/ 헌부에서 조상경홍중성황일하황종의 파직을 건의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문화 현령(文化縣令) 조상경(趙尙慶)이 처()의 투기(妬忌)에 노하여 구박해서 본가(本家)로 쫓아 보냈더니, 처형(妻兄)인 석성 현감(石城縣監) 홍중성(洪重聖)도 그 쫓겨난 것에 노하여 또 몰아내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조상경의 처는문 밖에서 방황하다가 거취(去就)가 궁박해지자, 마침내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잔인하고 행실이 야박한 무리는 의관(衣冠)의 반열(班列)에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조상경홍중성을 모두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경기 감사(京畿監司) 황일하(黃一夏)는 늙고 쇠약하여 일을 할 수가 없으며, 무릇 제장(題狀)을 한결같이 청촉(請囑)에 따르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숭릉 참봉(崇陵參奉) 황종(黃琮)은 어리석고 못나 문자(文字)를 전혀 알지 못하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하였으나, 세자가 모두 따르지 않았다./ 영인본41 88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홍중성[記事] : 숙종실록 64/ 숙종 45( 1719 기해 / 청 강희(康熙) 58) 117일 을해 1번째 기사/ 헌부에서 조상경 등의 파직을 거듭 청하자 조상경홍중성을 삭거 사판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니, 세자가 단지 조상경(趙尙慶)과 홍중성(洪重聖)을 삭거 사판(削去仕版)하라는 일만 따르고, 황일하(黃一夏)는 체임(遞任)시키도록 하였다./ 영인본41 88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홍중성[記事] : 영조실록 26/ 영조 6( 1730 경술 / 청 옹정(雍正) 8) 55일 임신 5번째 기사/ 근거가 없고 역적 토벌을 싫어하는 상소를 한 서명형을 파직하다/ 정언(正言) 서명형(徐命珩)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흉역(凶逆)의 조카는 병조 참의(兵曹參議)의 직책에 염치를 무릅쓰고 있으며, 국옥(鞫獄) 죄수의 고모부(姑母夫)는 의금부(義禁府)의 죄안(罪案)을 의논하는 자리에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중성(洪重聖)의 여동생은 곧 조상경(趙尙慶)의 아내인데, 그 남편은 구박하고 그 오라비는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우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 때에 대계(臺啓)가 준엄하게 나왔으나 그 남편과 그 오라비는 마침 내 죄벌을 받지 아니하고서, 한 사람은 홍문관(弘文館)의 사이에 방황하고, 한 사람은 군현(郡縣)의 수령에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조상경은 홍문록(弘文錄)5122) 에서 제거하고 조적(朝籍)에서 삭제하며, 홍중성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로써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영남(嶺南)1()는 사람과 산물(産物)이 많고 땅이 넓어 원래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컫습니다. 새로 임명된 감사(監司) 오명신(吳命新)은 잔약(孱弱)하고 까다로우며 또 질병이 많으니, 영남 감영(監營)의 번거로운 사무를 이 사람에게 위임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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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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