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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51-16 : 이광보(1728.11.25제수, 동년.12.17하직-1730.12.10이임) : 도승지에 오른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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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보[記事] : 영조실록 15권/ 영조 4년( 1728 무신 / 청 옹정(雍正) 6년) 1월 17일 무진 1번째 기사/ 서소문 괘서의 변고에 대한 처리를 논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유신(儒臣) 이광보(李匡輔)와 강박(姜樸)이 문의(文義)를 진달하기를 마치자, 지경연사(知經筵事)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금월 11일에 서부(西部)의 관원이 와서 말하기를, 서소문(西小門)에 괘서(掛書)의 변고(變故)가 있으니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하므로, 신이 불사르도록 하였더니, 부관(部官)을 부리(部吏)를 보내어 수문(守門)하는 자의 입회(立會)하에 불살라 버렸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흉서(凶書)의 내용이 전주(全州)의 괘서와 일반이라고 하였습니다. 호남(湖南) 사람으로서 목격하지 않은 자가 없어 전하는 말이 이와 같은데, 대저 전주에서 일이 생기더니 또 남원(南原)의 시장(市場)에 흉서가 걸렸고, 도성(都城)의 문(門)에 또 이러한 변고가 있었습니다. 이제 만약 범인을 잡지 않는다면 이런 변괴가 장차 잇따라 일어날 것이니, 상금(賞金)을 걸어 잡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이미 대신과 상의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주의 괘서는 작년 12월 12일에 있었고, 남원의 변고는 그 달 14일에 있었는데, 이제 또 도성(都城)의 문에 흉서를 걸었으니, 그 정도(程道)의 날짜를 계산해 보건대, 한 사람의 소생인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흉당이 서울과 외방에 숨어 있다가 출몰(出沒)하며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전주의 흉서는 전에 이미 불살라 버렸는데, 이제 어떻게 상금을 걸어 잡을 수 있겠는가? 옛날 선조(先朝) 때에 연은문(延恩門)에 흉서가 걸렸었는데, 여러 해를 두고 잡으려 했으나 끝내 정범(正犯)을 찾아내지 못했으니, 이제 잡지 말라는 하교는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혹시라도 사소한 원한을 갚으려고 무고(誣告)한다면, 장차 애매하게 결려들 걱정이 있으니, 잡지 않는 것만 못하다.하였다. 김동필이 말하기를, 경향(京鄕) 세 곳의 괘서는 연은문의 변고보다 더욱 심한데, 지금 만약 내버려 두고 잡지 않는다면 흉악한 무리들이 더욱 거리낌이 없을 것이니, 마땅히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상금(賞金)을 걸어 잡도록 하여 법을 바루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금을 걸어 잡게 하더라도 끝내 효과는 없이 한갓 나라의 체통만 손상(損傷)하게 될 것이니, 다만 좌우 포청(左右捕廳)으로 하여금 비밀히 살피도록 하되 경이 모름지기 대신을 직접 찾아가서 대신으로 하여금 포장(捕將)에게 분부토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42 책 4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법-치안(治安)(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영조실록 15권/ 영조 4년( 1728 무신 / 청 옹정(雍正) 6년) 1월 20일 신미 2번째 기사/ 차대에서 연은문의 괘서와 민진원․임징하의 정배에 관해 논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차대(次對)3451) 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북경(北京)에 이자(移咨)할 초본(草本)을 올리니, 임금이 펼쳐 본 다음 미진(未盡)한 구절(句節)을 개정(改正)하라고 명하였다. 이광좌가 괘서(掛書)의 흉적(凶賊)을 상(賞)을 걸고 잡을 뜻으로써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2품직(二品職)과 천금(千金)의 상을 내가 아끼는 것은 아니나, 만약 원범(原犯)을 잡지 못하고 혹시라도 애매하게 걸려드는 폐단이 있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이광좌가 굳이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은문(延恩門)의 괘서는 흉악한 무리들이 한때 저지른 일에 지나지 않는데, 이번에는 남원(南原)과 전주(全州)에 흉서(凶書)를 걸었고, 또 도성(都城)에도 흉서가 걸려 있어 어맥(語脈)과 자획(字?)이 한 손에서 나온 듯했으니, 내가 이미 하늘을 이고 땅을 딛고 살면서 어찌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연은문의 괘서와는 다름이 있으니, 대신의 소청(所請)을 알지 못함은 아니지마는, 이제 비록 상을 걸고 잡는다 하더라도 또다시 괘서의 변고(變故)가 없을 것을 어찌 알겠는가?하고, 인하여 여러 신하로 하여금 각기 소견(所見)을 진달하게 하였다. 판윤(判尹) 김동필(金東弼)과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삼(李森)이 말하기를, 세 곳에 흉서(凶書)가 걸렸을 적에 반드시 그 정상을 아는 자가 있었을 것이니, 상을 걸어 잡게 한다면 고발(告發)할 자가 있을 듯합니다.하고, 인하여 힘껏 청하였으며,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이진(權以鎭)과 정언(正言) 정우량(鄭羽良), 장령(掌令) 박준(朴埈)은 말하기를, 상을 걸고도 범인을 잡지 못한다면 한갓 나라의 체통만 손상됩니다.하였으며, 옥당(玉堂) 이광보(李匡輔)는 대신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결코 효과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순문(詢問)한 것이다. 영상(領相)의 작년 겨울 상소에 흉서를 물이나 불을 던져 버린다면 저절로 무료(無聊)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그러하다. 이제 이 변괴는 모두 세도(世道)가 괴란(乖亂)된 소치이니, 내가 상을 걸어 잡는 것을 지난(持難)하는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다시는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하였다. 이광좌가 포청(捕廳)에 신칙하여 특별히 기포(譏捕)할 것을 다시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나라 일을 위하여 힘써 반드시 그 책임을 다할 것을 이광좌에게 면려(勉勵)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은 항상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고, 또 일을 잘하려는 뜻도 있으나, 재주와 식견(識見)이 무디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전곡 출납(錢穀出納)의 문부(文簿)를 기회(期會)3452) 하는 사이에 비록 전혀 깨달아 살피지 않는 것은 아니나, 매번 적당함을 잃는 탄식이 있습니다. 또 오늘날 나라의 일을 비유하건대, 패국(敗局)과 같아 한 가지 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실로 손대기 어렵습니다.하니, 임금이 모름지기 겸양(謙讓)하지 말라고 누누이 하교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먼저 큰 근본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으니, 큰 근본이 이미 서게 된다면 작은 것이야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탕평은 지극히 아름다운 일이니 탕탕평평(蕩蕩平平)은 곧 홍범(洪範)3453) 에 이른바 왕도(王道)의 극치(極致)입니다.
우리 조정으로 말한다면, 동서(東西)의 편당(偏黨)3454) 으로 나뉜 지 거의 2백 년에 마침내 서로 살상(殺傷)하기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서인(西人)은 불행히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나뉘어 또 서로 살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피차(彼此) 서로 원수로 여기며 서로 질시(嫉視)하여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이 물불과 같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도 물불과 같이 되어 있으니, 이 어찌 장구(長久)한 방도가 되겠습니까? 아래에 있는 사람이 비록 각기 당색(黨色)이 있다 하더라도 임금이 굽어본다면 똑같은 신자(臣子)이니, 어찌 피차에 사랑하고 미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남인(南人)․서인(西人)․노론(老論)․소론(少論) 등 여러 색목(色目)을 만약 한마음으로 혼합하여 막힘이 없이 탕평할 수 있다면, 나라가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후에 탕평의 규모가 오히려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무릇 탕평의 도(道)는 진실로 허물을 씻어 모두가 면모를 일신(一新)하는 데에 있으나, 대강령(大綱領)에 관계되는 곳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그 옳고 그름을 밝힌 후에야 사람의 도리(道理)가 서서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리(倫理)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로지 탕평에만 힘쓰기 때문에 물리친 자에 대해서는 관계된 바가 비록 많더라도 일체 너그럽게 용서하시니, 저번 송인명(宋寅明)의 상소 가운데 장심(將心)3455) 있는 자를 주토(誅討)한다는 것은 대개 연차(聯箚) 등의 일을 지적한 것입니다. 남의 신하가 되어 장심(將心)이 있다면 어떻게 숭품(崇品)의 관직을 보존할 수가 있겠습니까? 민진원(閔鎭遠)의 일은 저번에 연석(筵席) 가운데에서 전하께서 선후(先后)를 추념(追念)하여 눈물을 흘리시면서 목이 메어 하교하시기를, 내가 슬프다.는 말씀까지 있었으니, 한없는 효성을 누가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생각건대, 이는 효성의 작은 것입니다. 옛날 한 문제(漢文帝) 때에 박소(薄昭)3456) 가 한(漢)나라 사자(使者)를 죽이자, 문제가 사람을 시켜 곡(哭)을 하게 하고 핍박하여 죽였으니, 어찌 그 외숙(外叔)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마는, 만약 기강(紀綱)을 범한 신하를 용서한다면 한조(漢朝)의 법이 무너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민진원의 죄는 실로 선왕(先王)을 범하여 심지어 고묘(告廟)하고 반시(頒示)하자는 의논까지 있었는데, 다행히 거룩하신 성덕(聖德)을 힘입어 그 말이 실행될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먼저 그 죄를 바루어야만 인륜(人倫)이 설 수 있게 될 것인데, 전하께서 이미 살인(殺人)을 즐기지 않으시는 것으로써 규모(規模)를 삼아 이제 비록 살리자는 의논에 붙였으나, 절해(絶海)의 고도(孤島)에 귀양 보내어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하여야만 인심이 복종할 것입니다. 임징하(任徵夏)에 이르러서는 그 죄가 어찌 주륙(誅戮)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성교(聖敎)가 해와 별같이 밝아 신이 참으로 흠탄(欽歎)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힘껏 다투어 아직도 법을 바루지 못하고 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순(舜)임금이 사흉(四凶)3457) 을 처벌(處罰)하여 천하가 모두 복종했으니, 신은 전하께서 세 사람에게 죄를 주신다면 온 나라가 모두 복종할 것이라 생각합니다.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박소(薄昭)를 한 문제(漢文帝)가 자살하게 하였는데, 사관(史官)의 판단에는 어떻다 하였는가?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민진원의 죄는 박소에 비교하여 실로 갑절이 되는데, 처분은 박소에 미치지 못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출척(黜陟)하는 즈음에 등용할 자는 등용하고 등용하지 않을 자는 등용하지 않을 뿐이다. 대저 충신(忠臣)이란 이름을 사람마다 더할 수가 없고, 역적이란 이름을 사람마다 더할 수가 없는 법인데, 당론(黨論)이 횡행(橫行)하여 충․역(忠逆)을 경솔하게 더하고, 충․역 두 글자를 예사롭게 말하여 장차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한 데에 이를 것이니, 말류(末流)의 폐단이 마땅히 어떻겠는가?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命)은 그 일가(一家)가 역옥(逆獄)에 많이 들어가 있으며, 조태채(趙泰采)는 다만 연차(聯箚)의 한 가지 일에 관련되었을 뿐인데, 경(卿)은 연차의 한 가지 일에 장심(將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싶다.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그때에 신이 정청(庭請)에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 거조(擧措)를 살펴보았더니, 말하는 사이에 장심(將心)을 가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조태채는 이미 옥사(獄事)에 관계되지 않았으며, 또 시임(時任)과 원임(原任)은 차이(差異)가 있어 구별(區別)이 있어야 마땅하나, 그가 두 마음을 품은 것은 명백하니, 숭품(崇品)의 관질(官秩)에 끝내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민진원의 수차(袖箚)는 경(卿)도 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의 경솔함이 이와 같으니, 위로 종묘(宗廟)에 고유(告由)하고 아래로 팔방(八方)에 반포(頒布)하자는 청은 대개 한편의 사람들을 모두 기망(欺罔)의 죄과(罪科)에 몰아넣으려고 한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성인(聖人)도 또한 뜻하지 않은 질병이 있는데, 선왕(先王)의 성덕(聖德)에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으니, 어찌 경솔하지 않겠는가? 다만 계교(計較)하여 무슨 일을 배포(排布)할 사람은 아니니, 그 사람이 경묘(景廟)에 대하여 어찌 깊은 뜻이 있었겠는가? 생각하지 않은 소치(所致)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경묘에게 불리(不利)하게 했다고 한다면 그 본심(本心)이 아니니,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자는 청이 어찌 지나치지 않겠는가?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임징하(任徵夏)에게 죄를 준 후에 민진원이 함께 죄를 받겠다는 청이 있었으니, 이에서 민진원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글에 써서 임징하와 함께 죄받기를 청했으니, 선왕(先王)을 향하여 어찌 여지(餘地)가 있었겠습니까? 반드시 처분이 있은 후에야 천고(千古)에 환히 교훈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진원은 단지 그 앞만 보고 뒤를 보지 못했으니, 임징하와 함께 죄주기를 청한 데에서 그 경솔함을 볼 수 있다.하니,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민진원의 고묘(告廟)하고 반교(頒敎)하자는 등의 말이 어찌 신자(臣子)로서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이미 대의 명분(大義名分)을 범한 것인데, 사은(私恩)으로 공법(公法)을 굽힐 수는 없으니, 엄중한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권이진(權以鎭)은 말하기를, 선왕께서 동궁(東宮)에 있은 지 30년 동안 저들에게 온갖 핍박을 받아 왔고, 침척(侵斥)하고 헐뜯는 말이 임징하의 소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에 〈선왕께서 세상을 떠나〉 만사(萬事)가 이미 끝난 후에도 군부(君父)를 무욕(誣辱)했으니, 실로 천지 사이에 용납하기 어렵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조태채의 일로 김동필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조정에서 조태채의 죄안(罪案)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연차(聯箚)의 일이니, 숭품(崇品)의 관질(官秩)에 끝내 그대로 두기는 어렵습니다.하였다. 이광좌가 조태채와 민진원의 일로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의 기강(紀綱)은 손익(損益)을 따지기 어려우나 당론(黨論)에 있어서는 손익이 있어야 마땅하니, 살벌(殺伐)한 나머지 화평과 온건(穩健)에 힘써 과중(過重)한 일은 일체 하지 말아야 한다. 이광덕(李匡德)이 말하기를, 옳고 그른 것은 엄정하게 밝히지 않을 수 없고, 형벌은 너그럽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이치가 있다. 민진원은 처지(處地)가 자별하고 경의 말은 성실하여 다른 뜻이 없는데, 어찌하여 과중한 일을 가지고 나를 인도하려 하는가? 조태채는 함께 관직을 추탈(追奪)하였고, 임징하의 일은 극형(極刑)을 중난(重難)하게 여기는 뜻으로 아직 윤허를 내리지 않고 있는데,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며, 합계한 일 또한 비답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이광좌가 윤득징(尹得徵)․김유경(金有慶)의 찬배(竄配)는 끝내 과중한 데에 속한다고 하여 용서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양사(兩司)【장령(掌令) 박준(朴?)과 정언(正言) 정우량(鄭羽良)이다.】에서 중도 부처(中途付處)3458) 한 죄인 정호(鄭澔) 및 급제(及第) 민진원을 모두 원방(遠方)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호가 당론(黨論)에 고질적인 것을 내가 일찍이 알고 있으나, 나이 이미 늙었으니 깊이 책망할 것이 못된다. 다만 그 말한 바가 결코 그 혼자 지어낸 것이 아니므로, 삭출(削黜)했던 것이다. 민진원에 이르러서는 그 뜻이 자기 당파를 두둔하고 남을 배척한 데에 지나지 않는데, 그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미친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니, 이 또한 경망(輕妄)한 소치이다. 이번의 소청이 원래 과중한 형벌이 아닌데 한결같이 윤허하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을 모르는 자는 혹 처분이 엄정하지 않다고 할 것이니, 이 어찌 내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뜻이겠는가? 분의(分義)를 범하는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징계(懲戒)될 줄을 알지 못한다면 또한 기강(紀綱)을 세우는 도리가 아니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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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