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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51-23:이광보(1728.11.25제수-동년12.17하직-1730.12.10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7.07.07 06:34:02

  예천고을원 151-23 : 이광보(1728.11.25제수, 동년.12.17하직-1730.12.10이임) : 도승지에 오른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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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이 이윽고 하교하기를, 󰡒민창수는 무군(無君)무엄(無嚴)하고 당심(黨心)을 참지 못하며 의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자하게 투장(投章)하여 국시를 현란시킨 죄상을 또한 이미 지만(遲晩)하였다. ! 임금을 무시하고 당습을 달갑게 여기는 무리는 비록 대훈이 있기 이전이라도 그 머리를 거리에 내걸어 많은 사람을 후일까지 징계하여야 마땅하거늘, 하물며 대훈이 반포된 뒤이겠는가? 그 마땅히 백관과 군민(軍民)을 모으고 당인(黨人)의 머리를 매다는 것을 모두 시원히 보도록 해야 하지만, 지난날을 추념해서 보면 감회가 더욱 간절하여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펴서 비록 죽음만은 용서하지만 어떻게 예사로이 작처할 수 있겠는가? 죄인 민창수를 특별히 감사(減死)하여 대정현(大靜縣)에 정배하라.󰡓하였다./ 영인본43 48 /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9922]척완(戚琬) : 임금의 외척. / [9923]임인년 : 1722 경종 2. / [9924]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정조실록 44/ 정조 20( 1796 병진 / 청 순치(順治) 1) 327일 계유 2번째 기사/ 유원명이 상소하여 신축년 무고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선조의 일을 아뢰다/ 주서 유원명(柳遠鳴)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의 선조는 포의(布衣)였기에 세상과 관계됨이 없었고 황천에 간 지 이미 7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친인척이 되는 사람이라도 그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는데, 저 대신(臺臣)의 말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신축년의 무고(誣告)에 걸린 것을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 신의 선조가 그때에 당한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평생을 근신하게 산 조행 때문에 흉적에게 제일 미움을 받아 뜻밖에 변서(變書) 가운데 이름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오서종(吳瑞鐘)과 서로 해명한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낙착되었고, 그때 대신(臺臣) 이광보(李匡輔)가 다른 의견을 극력 주장함으로써 끝까지 조사하였으나 시종 허위로 드러났는데, 다만 무죄로 석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나주(羅州)에 찬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선대왕이 등극하신 첫 해에 이르러 즉시 은사를 입었으니, 신의 선조의 전후 본말은 여기에 불과합니다. 목호룡(睦虎龍)에게 무함을 받아 당시에 유배되었다가 을사년에 풀려나왔으니, 누가 옳고 누가 그름은 많은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환히 알 수가 있습니다. , 신의 선조가 무함을 받은 것은 오로지 묵호룡이 거짓으로 얽은 데서 나온 것인데, 이제 이 대신이 어찌하여 다시 이처럼 허위날조된 말을 한단 말입니까.󰡓하니, 전교하기를, 󰡒고서(告書)에 이름이 든 자는 충신이고 공초에 이름이 나온 자는 역적이니, 이 두 가지에서 흑백을 알 수가 있다. 그후 당쟁의 화가 점차 요원의 불길처럼 성하였으니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이 서로 부호하고 억누르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일은 알기가 어렵지 않다. 심지어 그 여파가 친족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고 상신 이천보(李天輔)는 힘껏 구원하였고, 고 상신 조재호(趙載浩)와 고 판서 심각(?)은 이의를 제기하여 상소를 올렸으니, 누가 그 전말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그가 어찌 감히 지레 금문(禁門)을 나가 상소하여 체직을 청한단 말인가.󰡓하였다./ 영인본46 643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순조실록 16/ 순조 12( 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 118일 정축 2번째 기사/ 이조 판서 조윤대가 유정양의 상소에 대해 변명한 상소/ 이조 판서 조윤대(曹允大)가 상소하여 유정양(柳鼎養)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탁원(李鐸遠)은 바로 고 판서 이진검(李眞儉)의 현손입니다. 출계(出系)한 형 이진유(李眞儒)가 불행하게도 근래에 역률(逆律)을 추시(追施)당했지만 이진검은 관작이 예전 그대로이며, 그의 아들 이광태(李匡泰)도 이어서 침랑(寢郞)을 제배하였고, 그의 육촌 동생 이진원(李眞源)이진수(李眞洙), 칠촌 조카 이광세(李匡世)이광보(李匡輔)도 후에 모두 현관(縣官)이 되었으며, 그때 유복친(有服親) 역시 모두 방애됨이 없었습니다. 이제 5대가 지난 후에 어찌 흠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또 이는 방손(旁孫)인데 어찌 후예라고 하겠습니까? 그와 같은 처지에서 화관 요직(華官要職)을 지난 자가 전후로 어찌 한정이 있기에 유독 이 사람만 저지 당해야 하겠습니까? 심영석(沈英錫)은 바로 고 판서 심단(沈檀)의 증손인데, 신축년3211) 섣달에 심단이 빈객이 되어 울면서 충언을 진달해 힘껏 흉악한 환관을 성토함으로써 영고(英考)께서 포상하고 매양 그 간절한 충성을 칭찬하여 그 자손에 이르기까지 권우(眷遇)하심이 특이하여 그의 팔촌 손자 심각(沈慤)을 약원 제거(藥院提擧)에 특제(特除)하셨습니다. 그때 하교하시기를, 󰡐심각이 누구의 손자인가? 그의 종조 심단이 성정각(誠正閣)에서 아뢴 일편 단심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경신년3212) 여름에 이르러서 신이 지신사(知申事)가 되고, 심영석이 기주관(記注官)으로 경연에 들어갔는데, 선조(先祖)의 성교(聖敎) 중에 성정각의 고사를 특별히 들어 공을 수립한 것이라고 하교하셨으니, 이는 신이 친히 들은 바로서 전후의 사실이 모두 승정원일기에 기재되어 있으며, 또 그의 종숙(從叔)인 심단의 사손(祀孫) 심박(沈璞)은 일찍이 대각(臺閣)에 통망(通望)되었지만 정정(訂正)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손자에 있어서는 구애됨이 없었는데, 그의 증손에 있어서는 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고는, 곧바로 체면(遞免)하기를 구하니, 비답하기를, 󰡒과연 경의 말과 같다면 유신(儒臣)의 말이 지나쳤다.󰡓하였다./ 영인본48 38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3211]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3212]경신년 : 1800 정조 24. (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승정원일기/ 숙종 36512(병자) 원본454/탈초본24(31/31) 1710康熙(/聖祖) 49/ 疏頭 명단/ 疏頭朴弼琦兪勉基尹天復․李匡輔․盧以章柳潛盧斗望潘榮來趙器全崔鳳儀蘇斗元李世柱李之鼎李萬序柳之春南鶴增李喜春盧述李重觀趙泰東韓師億李瑞龜李時潤李時芳閔瑗李之蓂李之莢李之栽許蔓成珉崔璜趙珀金以震?兪彦輔徐命杰盧命錫李養大沈宗海申命?金始兌李復陽柳萬榮梁世員鄭重朝金起西金益謙金文夏金振秋金夏英成德海徐命幹安允喆李宜壽洪啓業金瑞甲庾斗玉庾濟華?李始春李徵秀李德季沈墺[沈澳]鄭秀賢鄭昌周鄭昌徵姜泰興尹明佐沈沃金浩兪健基兪運基尙絢尙縞尙雲河崔世泰?鄭世輔鄭世範鄭世?鄭世輯朴萬世朴旻沈尙周姜必起權昉洪聖耈尹就三宋泰弼宋遠宋相趙李普協李普英閔源洙閔鎭衡韓師卨韓師益趙宅命李普成李普禎徐命維李世說金鐸金鎭李應元李廷錫李廷一李廷根李寅徽李翼徽鄭道恒庾益濟朴圭煥李普興尹勉鄭龜徵鄭鳳徵成晉錫趙弘宇趙挺宇柳縡洪友泰金尙鼎尹時殷尹天休金時瑞趙重濟金芳國?康世鼎李得春金潤河李澄林華朴弼興盧昌世鄭東潤李漢揀禹舜相?李光國金萬佑朴徵賓李復齡李重白尹勛燼餘(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승정원일기/ 숙종 40328(기사) 원본482/탈초본26(10/12) 1714康熙(/聖祖) 53/ 李匡輔등은 直赴殿試하고 朴弼夔 등에게 각각 一分을 지급하라는 비망기/ 備忘記居首進士李匡輔, 直赴殿試, 之次進士李匡德, 直赴會試, 三下幼學朴弼夔, 生員趙文彬, 進士柳運, 幼學李挺白, 生員李眞洙, 各給一分(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승정원일기/ 숙종 401030(무술) 원본486/탈초본26(8/13) 1714康熙(/聖祖) 53/ 賜柑 製述 등에서 성적이 좋은 具命圭 등에 대해 增廣 別試 文科 殿試應試하게 할 것을 청하는 禮曹의 계/ 禮曹啓曰, 癸巳十二月賜柑製述居首, 幼學具命圭, 甲午三月節製居首, 進士李匡輔, 同年九月儒生製述居首, 幼學鄭必寧等, 直赴殿試事, 命下矣依前例, 竝許赴於今增廣別試文科殿試, 何如? 傳曰, (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승정원일기/ 숙종 40115(계묘) 원본486/탈초본26(4/17) 1714康熙(/聖祖) 53/ 所見을 진달하는 金演의 상소/ 禮曹參判金演上疏大槪, 略陳淺見, 冀蒙裁察事入啓答曰, 省疏具悉節製賜第人李匡輔, 以其被罰於泮儒, 不得赴試云旣已賜第之後, 則雖未唱名, 不可以儒生待之, 施以儒罰, 事體未安?卽解罰, 一體許赴, 而自今定式, 賜第之人, 毋得施儒罰, 爲宜矣(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승정원일기/ 숙종 40119(정미) 원본486/탈초본26(9/15) 1714康熙(/聖祖) 53/ 李匡輔에게 應試하게 한 것으로 儒生에게 들어갈 것을 권할 閔應洙 등이 引入한 것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成均館의 계/ 成均館官員, 以知館事大司成意啓曰, 因禮曹參判金演疏陳, 節製賜第人李匡輔, ?得解罰, 一體許赴事, 命下矣依聖敎以卽爲解罰之意, 送言于兩齋任, 則東齋掌議閔應洙以爲, 引嫌呈單, 今已有日, 西齋掌議韓配斗以爲, 見差之後, 旣不行公, 斷無入泮之勢, 爲辭, 而成命之下, 已至累日, 尙未擧行, 事體至爲未安齋任兩人, 俱爲引入, 逐日敦勉, 無意奉承, 此莫非臣等不善勉出之致, 亦不勝惶恐, 何以爲之? 敢稟傳曰, 成命之下, 尙不擧行, 殊涉未安使之卽爲解罰, 可也(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승정원일기/ 숙종 401111(기유) 원본486/탈초본26(8/18) 1714康熙(/聖祖) 53/ 韓配斗가 李匡輔에게 應試하게 한 것은 부당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成均館의 계/ 成均館官員, 以大司成意啓曰, 臣等謹以聖敎辭意, 更爲送言于兩齋任, 自朝至暮, 反復敦勉, 則齋任閔應洙, 猶執前嫌, 終始引入, 齋任韓配斗, 謂有意見, 書納所懷以爲, 李匡輔解罰事, 旣有成命, 事當?卽奉行, 而第誣毁先正, 自是士子之悖行, ?大義, 實關世道之大變, 而今此匡輔, 承望大臣之旨意, 憑藉祭?之文字, 乃敢侵辱先正, 不有餘力, 竝與大義, 而視若弁?其潛斥陰譏, 情態可惡, 則當初施罰, 實出於士林之公論況匡輔, 雖蒙賜第之恩, 未及唱名之前, 自是儒巾下人也論以儒罰, 未爲不可, 則施罰解罰, 當付儒生, 而自朝家勒令解罰, 亦非聖世之美事今若迫於嚴命, 徑先解罰, 則太學風規, 其將從此而?損矣聖敎雖勤, 公議亦嚴, 雖被罪罰, 決難承命云, 而累次聖敎之下, 亦無奉承之意, 鎭日勸勉, 終不回聽臣等言辭未暢, 不能善爲開諭, 致使成命, 不卽擧行, 益不勝惶恐何以爲之? 敢稟傳曰, 朝家處分, 事體得宜, 而成命之下, 終不奉承, 安有如許道理? 殊極未便使之卽速解罰, 一體赴試, 可也(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승정원일기/ 숙종 401112(경술) 원본486/탈초본26(6/21) 1714康熙(/聖祖) 53/ 한결같이 韓配斗가 李匡輔에게 應試하게 한 것은 부당하다고 하면서 公務를 행하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成均館의 계/ 成均館官員, 以知館事同知館事大司成意啓曰, 臣等, 昨伏承草記批旨, 更以聖敎辭意, 反覆開諭, 使之卽速擧行, 則齋任閔應洙, 膠守前見, 一向引嫌, 韓配斗, 今又書呈所懷以爲, 李匡輔不可解罰之由, 旣有備陳, 而聖批嚴峻, 又復如此, 則不得不更此煩暴焉夫醜正蔑義, 此何等悖妄, 而匡輔兼而有之, 則其在憂世道正士習之道, 不可不一番相規, 而此固士林之事, 則元非朝家之所可干涉也況且匡輔雖已賜第, 而未及唱名, 則其赴殿試, 當着儒巾, 試券書名, 亦當以進士稱之其身自是儒籍中人, 施以儒罰, 小無不可, 則宰臣之投疏煩聽, 抑獨何哉, 而聖上勒令解釋, 其果得宜乎? 竊聞仁廟朝故名臣金德?爲大司成也, 儒生之罪關名義, 而在削籍停擧者, 館中任意解罰, 故德?疏陳自劾, 則仁廟特遣承旨鄭廣成, 以御?罰飮泮儒先輩之重名義, 先王之扶正論, 至於如此此豈但當時之美事, 實是後來之所當法者也今者匡輔所犯, 非止於誣毁先正, 莫念大義之不可?, 則其得罪於士林, 固已不輕矣, 而反自朝家, 有此迫促解罰之命, 實非臣意慮之所到也今若?於朝命, ?解罰, 則臣身之貽羞士林, 顧不足恤, 而泮宮流來之規, 未免爲聖朝之所壞損也, 豈不寒心哉? 所懷如此, 寧被譴罰, 不敢承命云, 而終始違拒, 斷無承命之意章甫之徒, 旣難容易開悟, 又難迫脅威制, 徒煩稟啓, 尙未奉行, 揆以事體, 誠極未安, 而反覆思惟, 善處無路, 何以爲之? 敢啓傳曰, 賜第後施罰, 曾所未聞從今定式, 又有成命, 而終始違拒, 無意奉承, 士習豈容如是? 齋任韓配斗, 停擧可也(www.history.go.kr 2008)

 

  이광보[記事] : 승정원일기/ 숙종 401112(경술) 원본486/탈초본26(7/21) 1714康熙(/聖祖) 53/ 李匡輔에게 應試하게 한 것과 관련하여 李匡輔試券安寶한 뒤에야 應試하게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禮曹의 계/ 禮曹啓曰, 節製居首賜第人李匡輔, 解罰許赴事命下, 而因太學齋任不爲行公, 未卽擧行, 成均館以此意草記, 更有卽爲解罰之命, 齋任書納所懷, 無意承命毋論其所執之如何, 在前殿試及庭謁聖, 元無儒罰拘?之規甲子年間, 始有定奪, 而至於賜第後儒罰, 乃是無前之事, 而況從今定式, 又有特敎, 則事體自別今若以儒罰之不解, 終至寢閣成命, 則殊無別爲定式之本意應赴之人試券, 必於今日安寶, 然後方可赴試, 何以爲之? 敢稟傳曰, 不可以無前之事, 寢閣定式, 成命許赴, 可也(www.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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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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