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게시판

이곳에 올려진 내용은 예천군청과는 무관하오니 이점 양지하시고, 본 게시판을 이용해 게시자가 허위 과장광고나 사기성 게시물을 올릴 수도 있으니 사용자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 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고을원153-31:조태언(1731.4.28제수-동년5.17하직-1734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8.01.10 07:15:38

  예천고을원 153-31 : 조태언(1731.4.28제수, 동년.5.17하직-1734이임) : 이인좌의 난 잔당 체포

---

 

  배[]는 임금에게 비유할 수 있고 물은 백성에게 비유할 수 있는데, 주즙(舟楫)이 정제되지 않고 사공이 흩어지면 물이 비록 고요하더라도 배가 운행하기 어렵고, 배가 비록 운행하려고 하더라도 물이 없으면 어찌 운행하겠는가? ! 오늘이 바로 이와 같다. 정석(鼎席)8757) 에서 공()을 먼저 하고 혐의를 뒤로 하며, 조정에서 당습을 버리고 인협(寅協)한다면 아! 그 나라가 어찌 잘 되지 않겠는가? 좌의정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이미 환히 알고 있지만, 이미 내려 준 밥을 받았고 전석(前席)에서 유시(諭示)를 들었으니, 집에 돌아가 조용히 생각해 보면 반드시 각오하였을 것이다. ! 마음을 너그럽게 갖는 것은 조정뿐만이 아니다. 장차 능()에 참배하려 하니, 그윽이 느낌이 많다. ! 여러 신하들은 교목 세신(喬木世臣)8758) 인데 사()로 인해 나를 괴롭힘은 또한 무슨 마음인가? 개탄함으로 인해 하교한 것 가운데 너무 중도에 지나친 것도 많았는데, 지난 일을 다시 말하지 말라. 비록 다시 유시하지 않더라도 억지로 수라를 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수식(修飾)한 것이겠는가? 이미 다시 보고자 하였으니, 또 어찌 무심히 여기겠는가? 군신(君臣)이 한 전당(殿堂)에서 문답하고자 한다. ! 여러 신하들은 중외(中外)를 논하지 말고 2품 이상과 옥서(玉署)8759) 대신(臺臣)은 거둥[幸行]이 지나기를 기다려 모두 경사(京師)로 나오고 오직 우리 삼공(三公)이 거느리고 기다렸다가 알현(謁見)한 후 일제히 모이게 함은 또한 뜻이 있는데가 있는데, ! 창업(創業)이 기다려 모두 겸사(京師)로 나오고 오직 우리 삼공(三公)이 거느리고 기다렸다가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세대가 점차 멀어져 위 아래가 함께 홀만하게 여기니 비록 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멀리서 능()의 송백(松柏)을 바라보라. 정원(政院)에서 먼저 포고(布告)해 들어서 알도록 하라.󰡓하였다./ 태백산사고본344512A/ 영인본42564/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식생활(食生活) / *어문학(語文學) / *역사-고사(故事)/ [8756]건도(乾道) : 송나라 효종(孝宗)의 연호(年號). / [8757]정석(鼎席) : 삼공(三公)의 자리. / [8758]교목 세신(喬木世臣) : 집안 대대로 중요한 지위에 있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 / [8759]옥서(玉署) : 홍문관. (www.history.go.kr 2008)

 

  조태언[記事] : 영조실록 45/ 영조 13(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 827(계미) 1번째 기사/ 파직된 자들을 서용해서 내일 조참에 참석시키려고 조현명 등에게 직첩을 주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청대(請對)하여 함께 입시했다. 사간(司諫) 조상명(趙尙命)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김성탁(金聖鐸)을 전례에 의해 엄히 국문(鞫問)해 쾌히 왕법(王法)을 바루소서.󰡓하니, 답하기를, 󰡒김성탁의 무상(無狀)함은 이미 알았으니 후일 곧 하교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태언(趙泰彦)은 여러 아랫사람들이 초조해 하고 당황해하는 날을 당하여 오히려 구습(舊習)을 일삼았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필(何必)󰡑이란 두 글자 때문에 섬에 위리 안치[?]시켰으니, 죄는 가볍고 벌은 중합니다. 환수하기를 청합니다.󰡓하니, 답하기를, 󰡒왕자(王者)의 상벌(賞罰)은 권선 징악(勸善懲惡)하기 위한 것인데, 비록 영상의 차자로 인해 목숨을 살려 주기는 했으나 섬에 위리 안치하는 것을 어찌 그만 두겠는가?󰡓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이행민(李行敏)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조현명(趙顯命)이연덕(李延德)조영국(趙榮國)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려고 하니 두 대신 및 대제학 이덕수(李德壽)는 그대로 머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널리 유시하고 전일의 일을 이미 혼돈(混沌)에 부치려고 하니, 파직한 여러 사람을 모두 서용(敍用)해서 내일 조참(朝參)에 참석하게 해야 한다. 조현명(趙顯命)김취로(金取魯)박사수(朴師洙)오광운(吳光運)은 모두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하고, 정이검(鄭履儉)은 특방(特放)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호서(湖西) 내포(內浦) 18개 고을이 이미 적지(赤地)로 판명되었으니, 청컨대 박사창(朴師昌)을 어사(御史)로 파견해 떠도는 백성을 안집(安集)시키고, 수령(守令)을 염찰(廉察)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가 각 고을에서 조적(??)8767) 하면서 모곡(耗穀)을 파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고, 또 청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오명서(吳命瑞)는 일찍이 병으로 체직을 허락하였는데 가을이 되어 병이 회복되었으니, 우선 유임시키소서.󰡓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지난밤 주전(紬廛)과 면포전(綿布廛)이 화재를 당했으니, 호조로 하여금 넉넉히 구휼해 주게 해야 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344514A/ 영인본42565/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재정(財政) /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금화(禁火)/ [8767]조적(??) : 환곡(還穀)을 방출하고 수납하는 것. 즉 봄에 백성들에게 나라 곡식을 꾸어 주는 것을 조(?)라 하고, 가을에 백성에게서 봄에 꾸어 주었던 곡식에 10분의 1의 이자를 덧붙여 거두어들이는 것을 적(?)이라 함. (www.history.go.kr 2008)

 

  조태언[記事] : 영조실록 45/ 영조 13(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 92(정해) 2번째 기사/ 영상이 절약과 원경하의 호남 별견 어사 제수를 청하다. 이병상이 실언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영작(營作)을 파하며, 사여(賜與)를 신중히 하고 복식(服飾)을 검소하게 하기를 우러러 힘쓰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라의 저축이 가난한 집의 살림살이와 같아 나에게도 세탁한 옷이 있고 매양 상사(賞賜)할 일을 당해도 혹은 참고서 중지하기도 한다.󰡓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입지(立志)가 굳은가 굳지 않은가에 달려 있으니, 이제 만약 당을 깨뜨릴 수 없다면 도리어 난망(亂亡)을 재촉하게 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에 있었던 때를 잊지 말라8788) .󰡑 하였으니, 나는 마땅히 밥을 먹지 않았던 일을 생각해야 하고, 여러 신하들은 어선(御膳)을 물리쳤을 때를 잊지 말아야 한다.󰡓하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원경하(元景夏)를 호남 별견 어사(湖南別遣御史)로 삼으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공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이 말하기를, 󰡒신의 정세(情勢)는 전에 이미 우러러 진달하였는데, 전하께서 비록 이미 선천(先天)에 붙이셨으나 천지(天地)는 같은 천지이고 사람 역시 같은 사람인데 어찌 선천(先天)후천(後天)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조정에 가득한 사람들이 또한 어찌 같은 마음과 같은 의논으로 거취를 함께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지하라. 공조 판서는 아주 그르다.󰡓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내가 공조 판서의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는 사리에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대개 진정(鎭定)하고자 해서이다. 그는 사람이 매우 고집스럽고 막혀 있다. 참으로 물러가고자 하면 광유(廣諭)했을 때에 술을 마시지 않았으면 되었는데, 어찌 같은 천지요 같은 개인이라는 말로 스스로 당수(黨首)가 되어 군부에게 대항하는가? 이후에 만약 옛 습관을 이루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문()에 임해 고가(藁街)에 목을 베어 달겠으니, 경들은 지나치다고 말하지 말라.󰡓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말씀을 어찌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까?󰡓하였다. 정언(正言) 유언협(兪彦協)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조태언(趙泰彦)을 섬에 위리 안치[?]하라는 명을 환수하라는 데 이르러서는 답하기를, 󰡒혼돈(混沌)과 개벽(開闢)은 흑()과 백()처럼 판이(判異)하게 틀린데 사람은 개벽하지 않는다는 말이 전에 조태언에게서 있었으니, 빨리 정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하라.󰡓하였다./ 태백산사고본344517B/ 영인본42567/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司法)/ [8788](?)에 있었던 때를 잊지 말라 : 춘추 시대(春秋時代) ()나라 환공(桓公)이 그의 형인 양공(襄公)이 문란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므로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거(?)로 달아나 고초를 겪다가 양공이 무지(無知)에게 죽고 무지도 옹름(?)에게 죽은 뒤에 거에서 제()로 돌아와 임금이 되었는데, 환공이 관중(官仲)에게 묻기를,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까?󰡓 하니, 관중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 거(?)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마소서󰡓 하였음. (www.history.go.kr 2008)

 

  조태언[記事] : 영조실록 45/ 영조 13(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 914(기사) 2번째 기사/ 김성탁윤급조태언이병상 등의 일과 재변을 연계시키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사(知事)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천도(天道)는 현묘(玄妙)하고 심원하여 비록 무슨 일 때문에 재변을 부르는 단서가 되는지 모르나, 8월 이후로 형정(刑政)이 중도(中道)를 잃음이 많았으니 오늘의 재변이 혹 반드시 이에 말미암지 않은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하고, 검토관(儉討官) 조영국(趙榮國)은 말하기를, 󰡒김성탁(金聖鐸)을 죽기를 한하고 형신(刑訊)한 것은 끝내 지나친 일이었는데,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윤급(尹汲) 등이 유독 서명(胥命)하지 않았으니, 유방(流放)함은 본디 애석할 것이 없으나, 국청(鞫廳)을 설치한 데 이른 것은 역시 지나쳤습니다. 안세복(安世福)은 한낱 천인(賤人)인데, 이미 국청을 설치하였으면 마땅히 양조 대면(兩造對面)8847) 하여 질문하게 했어야 하는데, 유독 안세복만 물고(物故)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런 일은 끝내 형정(刑政)이 공평함을 잃은 것입니다.󰡓하였으며, 조현명이 말하기를, 󰡒윤급(尹汲)한익모(韓翼謨)의 설국(設鞫)은 이미 아주 지나쳤고, 위리 안치한 것도 역시 중()을 벗어났으며, 조태언(趙泰彦)이병상(李秉常)의 일도 역시 아주 지나쳤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진달한 안세복의 일은 참으로 옳지만, 윤급한익모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그때에 어찌 감히 서명(胥命)하지 않았는가? 조태언󰡐하필(何必)󰡑이란 두 글자에 실로 무한한 뜻이 있었는데 신임하는 원보(元輔)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단지 위리 안치의 율을 베푼 것이다. 이병상에 이르러서는 비록 중신(重臣)이기는 하나 어찌 국법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에게도 안정(顔情)이 없지 않아 너무 관대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형정(刑政)이 엄하지 못해 지금 재변을 부른 단서가 되었다고 여기는데 경은 바로 과중(過中)하다고 하니, 실로 내 뜻과 상반된다.󰡓하였다./ 태백산사고본344529B/ 영인본42573/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사법(司法)/ [8847]양조 대면(兩造對面) : 원고(原告)와 피고(被告)가 대면하는 것. (www.history.go.kr 2008)

 

  조태언[記事] : 영조실록 46/ 영조 13(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 1014(무술) 1번째 기사/ 미봉책을 쓰지 말고 시비를 분명히 해야만 당파가 없어진다는 이석표의 상소/ 부교리(副校理) 이석표(李錫杓)가 상소하기를, 󰡒대저 대신은 백관의 우두머리로서 비록 죄가 있어 죽이는 경우라도 역시 반수가검(盤水加劒)8879) 의 예우가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얼굴을 맞대고 꾸짖고 욕하는 것이 노복에게 하는 것보다 심하며, 어제 파직시켰다가 오늘 임명하는 것이 말단 관료에게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는 대신들이 평소 임금에게 경시를 당해 온 소치이니, 창랑(滄浪)의 물빛에 따라 거취를 결정한다면 무슨 원망이나 탓이 있으리요마는, 오직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제부터 진실로 자중자애하는 선비가 있어 자신의 몸과 이름을 아낀다면, 누가 달가운 마음으로 전하의 앞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며 전하의 굴레에 매여 출입하겠습니까? 그들 중 의관이 부서지거나 찢어지지 않고 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필경 전하의 뜰에 서는 사람이란 부귀를 탐내는 무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생존한 대신으로 전하에게 임용(任用)되고 있는 자이지만 4대에 걸쳐 예우를 받던 선정신(先正臣)8880) 의 경우에 이르러서도 명자(名字)가 배척해 불리어지고 당파의 괴수로 단정되니, 이는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 나라의 당론은 이미 3백 년 동안의 고질이요 선정신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엎치락뒤치락하며 날로 심화된 것은 지금 사람들의 죄에 지나지 않는데, 하필 이미 백골이 된 사람의 행적을 끝없이 캐들어가 주심(誅心)의 의리를 억지로 단절하십니까? 성기(聲氣)의 폭발과 말씀을 가려서 하시지 않은 그것이 전하의 덕에 누가 되는 것이 한두 가지에 그치는 것이 아닌데, 그날 묘당(廟堂)과 삼사(三司)에서 한 사람도 전하의 잘못을 바로잡아 구제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전하께서 꾸짖어 질타하고 업신여겨 짓밟으심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름도 당연합니다. 부끄럽게 여길 만한 일은 한쪽의 유자(儒者)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평상시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어지럽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자는 청을 중외(中外)에서 번갈아가며 상소를 올리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한마디도 변명하여 논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날 선비의 기풍 역시 모두 죽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신이 홀로 근심하고 너무나도 염려되는 것이 있으니, 전하께서 폐합(閉閤)하신 뒤에 당파가 없어질 것 같았는데 없어지지 않았고, 대고(大誥)하신 뒤에도 당파가 없어질 것 같았는데 또한 없어지지 않았으며, 밤에 유시하신 뒤에도 당파가 없어질 것 같았는데도 끝내 없어지지 않아서 마침내 각선(却膳)하시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각선하신 뒤에도 역시 끝내 당파가 없어지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외관상으로 본다면 평소 당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는 사람도 어전(御前)에 나아와 절하며 뵙고 지난날 역적을 비호한다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석(筵席)에 나아와 마치 옛날의 원한을 서로 잊고 묵은 감정을 모두 풀어버린 듯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울타리를 오히려 마음속에 설치해 놓고, 컴컴한 곳의 무기는 선웃음을 치는 즈음에 먼저 갈무리해 두며, 머리를 숙여 공손히 하고도 물러나서는 주먹을 부르쥐고, 한자리에 앉아 즐기면서도 속으로는 활에 화살을 먹여 당기려 하니, 이는 단지 기회를 타서 유리한 방편을 미처 얻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편안한 마음으로 스스로 기뻐하시고 번민 속에서도 만족하시면서 진실로 탕평(蕩平)이 되고 크게 보합(保合)을 이루었다고 여기시나, 다만 당파를 깨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뭇신하에게 기만당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시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광유(廣諭)를 처음 내리시던 날에는 중외의 인심이 크게 진동하여 눈을 부비고 마음에 새겨 두루 묵은 감정을 말끔히 씻어 없애고 국면을 새롭게 전개하는 공을 이 기회에 결단할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아니함이 없더니, 막상 당하고 보니 승지가 소리 내어 읽고 백관은 네 번 절하고 물러가는 데 불과하였으며, 유시하신 내용 역시 전후의 사륜(絲綸)에서 이미 익히 말하고 익히 들었던 것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거조는 천둥과 바람이 휘몰아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며, 말씀은 애절하게 거듭거듭 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 안타깝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그 당시에 옥음(玉音)으로 조서(詔書)를 반포하시되 당론이 결국은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애통하게 말씀하시어 백관과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명확하고 상세히 듣게 하시었다면, 어찌 환하게 밝으며 깨끗하고 시원하게 되어 비록 평소에 파당적인 인습에 고질이 된 사람이라도 역시 어찌 마음을 뜯어고쳐 융합 동화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한편으로는 각선(却膳)하시고 한편으로는 선온(?)하시니, 존엄을 깍아내리는 거조가 하당(下堂)8881) 보다 심하며 유감을 풀라는 하교(下敎)가 애걸에 가깝습니다.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