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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53-33 : 조태언(1731.4.28제수, 동년.5.17하직-1734이임) : 이인좌의 난 잔당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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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윤급이 거의 장차 10여 년이 지난 뒤에 답습(踏襲)해 썼는데 진신(搢紳)들이 연명(聯名)하여 떼지어 일어나 그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맨 먼저 발언한 신은 재채기나 기침을 하는 재앙도 없는데, 답습해 쓴 윤급은 유리(流離)의 재액(災厄)에 몹시 시달리고 있으니, 신의 마음이 부끄럽고 위축됨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붕당과 시비(是非)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시비와 공사(公私)의 구문에 대해 다시 분명하게 살피고 정밀하게 관찰하지 않으시니, 호오(好惡)가 중정(中正)을 잃고 취사(取捨)가 합당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아울러 사람들의 마음속에 시비를 가리는 천성(天性)까지 민멸시키려고 하십니다. 사리를 분별함이 없이 우물쭈물 넘기며 기미(羈?)하고 겸제(鉗制)함으로써 온 세상을 흑백(黑白)과 음양(陰陽)이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 놓이게 하다가, 마침내 다른 제목과 새로운 의리를 만들어내어 혼돈(混沌)을 개벽(開闢)한다고 이르고는 드디어 사람들을 태초의 홍몽(鴻?)한 가운데 가두어 지난날의 일을 마치 전생의 일처럼 격리해 놓고 계십니다. 주자(朱子)가 산꼭대기에 있는 소라 껍질을 보고, 이는 선천(先天)의 물건이다.라고 했었습니다.
대저 지금 천지가 참으로 개벽된다 해도 선천 시절의 옛 물건들을 마멸(磨滅)할 수 없는데, 하물며 작금(昨今)의 귀에 쟁쟁하고 눈에 선하던 것들을 곧장 천지가 개벽될 때의 세계로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말씀만 하시면 뭇신하들이 호응하여 혹자는 영웅의 수단이라고 하기까지 하니, 아첨을 유도하는 폐습(弊習)이 너무 심합니다. 송(宋)나라에서는 건중(建中) 초기에 일찍이 참작하여 임용하였는데, 그 뒤에 채경(蔡京)8970) 이 다시 정승이 되면서 천하가 파괴되었습니다. 군자와 소인(小人)이 함께 진출하면 항상 이기는 형세가 반드시 소인들에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옛날의 일과 견주어 보면, 전하께서 반드시 그 시비와 취사를 아실 것입니다. 이진유(李眞儒)를 신설(伸雪)하자는 논의가 세상에 크게 행해지더니, 어느 새 이광찬(李匡贊)이 과연 전시(殿試)에 부거하였습니다. 징토(懲討)가 엄중하지 못하고 제방(?防)이 크게 무너진 까닭에 흉패하고 추악한 여얼(餘孼) 그들이 감히 다시 달리 마음먹게 되었는데도 대관들은 기세를 돕고 대간(臺諫)은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세도(世道)가 근심스러워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또한 전하께서 불러들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관대하게 용서하고 총애하여 임용하는 일은 기강을 범한 족속들에게 많이 베풀어지고, 최격(?擊)하고 진노하시는 일은 매양 과감하게 말하는 사류(士類)에게 돌아갔으므로, 이 무리들이 주무(綢繆)하고 약속하여 많은 편당의 협조를 끼고 하루의 편의(便宜)함을 엿보고는 차례로 역적들을 신구(伸救)하는 계제로 삼고 있으니, 뜻을 받드는 무리들이 또 당후관(堂后官)으로 제일 먼저 천거하고 방색(榜色)으로 특별히 선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안위(安危)의 기틀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이어 면계(勉戒)할 일을 진청(陳請)하기를, 대덕(大德)을 확장하여 경솔하게 사령(辭令)을 발표하는 일을 삼가고, 염치를 배양(培養)하여 쇠퇴한 세속을 한번 변화하도록 힘쓰며, 유술(儒術)을 높여 숭상하고 궁료(宮僚)들을 잘 선발하소서.하고, 또 말하기를, 옹주(翁主)의 이강(釐降)을 되도록 간소하게 하여 지난날의 화순 옹주(和順翁主)의 혼인 때와 같이 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부언하여 진달한 말을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이어 원소(原疎)를 유중(留中)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14장 B면/ 【영인본】 42책 590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고사(故事)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왕실-비빈(妃嬪)/ [註 8969]경술년 : 1730 영조 6년. ☞ / [註 8970]채경(蔡京) : 송(宋)나라 철종․휘종(徽宗) 때의 정치가. 숭녕(崇寧) 원년(1102년)에 재상이 되어 구법당을 철저하게 탄압하였음. 장돈(章惇)과 함께 동문방옥(同文謗獄)을 조작하여 사마광(司馬光)․유지(劉摯)․양도(梁燾)․여대방(呂大防) 등을 살해 축출하였음. ☞(www.history.go.kr 2008)
조태언[記事] : 영조실록 47권/ 영조 14년(1738 무오 / 청 건륭(乾隆) 3년) 5월 16일(정묘) 3번째 기사/ 송인명이 근래 흑산도로 정배하는 일이 많으니 타당하지 않다고 아뢰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옛부터 흑산도(黑山島)에 귀양 보낸 사람은 오직 갑술년8981) 의 유명천(柳命天)과 경종조(景宗朝)의 고 참판 홍계적(洪啓迪) 두 사람뿐이었는데, 작년 가을 이후에 정배(定配)된 사람이 세 사람이나 됩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이 길에 형극(荊棘)을 비로소 열어 놓았으니, 저 죄를 짓고 귀양 가는 사람들이 비록 스스로 천망(天網)에 걸렸다 하나, 근대에 와서 법망이 점점 엄밀해지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흑산도란 섬은 본래 경솔하게 귀양 보낼 곳이 아닌데 성상께서는 누차 귀양 보내고 계시니 어찌 타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호리(狐狸)가 울부짖고 추선(??)이 춤을 춘다고 했는데 이성해에게는 마땅히 이 문구를 사용해야 한다. 지난해에 조태언(趙泰彦)을 응견(應犬)이라 하여 팽형(烹刑)에 처하려 했는데, 김한철(金漢喆)이 이 뒤에도 이렇게 하면 마땅히 극률(極律)에 처해야 한다.고 했었다.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22장 B면/ 【영인본】 42책 594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註 8981]갑술년 : 1694 숙종 20년. ☞(www.history.go.kr 2008)
조태언[記事] : 영조실록 48권/ 영조 15년(1739 기미 / 청 건륭(乾隆) 4년) 1월 14일(신유) 1번째 기사/ 당쟁의 실상에 대한 정언 홍정보의 상소문/ 정언(正言) 홍정보(洪正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것은 당동 벌이(黨同伐異)이고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탕평(蕩平)입니다. 1백 년 동안 묵은 버릇이 이미 고질이 되어 하루 아침에 크게 바뀌어지기를 요구하기 어렵다면 여유를 두고 점점 물들여서 사라지기를 기다려도 본디 안될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 집안의 계책으로 삼아서 끝내 따르지 않는 자라면 참으로 이른바 굳이 친목하지 않는 자이니 성인이 맡게 되더라도 강단으로 다스릴 것인데, 전하께서는 그러지 않고 처음에는 문을 닫고 그들이 스스로 따르기를 바라시고, 문을 닫아도 고치지 않으니 이어서 음식을 물리치시고, 음식을 물리쳐도 따르지 않았기에, 이런 천만 뜻밖의 거조(擧措)가 있으셨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본디 만 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는데, 임금으로서 그 신하를 따르게 하지 못하고 어제와 같은 일을 하기까지 하셨으니, 또 그것이 어떠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십수 년 이래로 사대부의 풍습이 더욱 변하고 심술(心術)이 더욱 무너져 청탁(淸濁)이 중간에서 혼동되고 하찮은 일로 서로 다툽니다. 다들 당(黨)이 없다고 하나 실은 모두 당을 짓고 있어 예전에는 오히려 서넛이었던 것이 이제는 대여섯이 되어 가지가지로 온갖 괴이한 꼴을 보이니, 이들은 전하의 조정을 하나의 희극(?劇) 마당으로 만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지나친 거조를 하시면 조금 스스로 움츠려지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또 전의 버릇대로 따르니, 신은 오늘 이후에도 반드시 조금이라도 보람이 있지는 못하고 전하의 지나친 거조만 연장될까 염려됩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명백히 그 죄를 바루어 그 나머지를 격려해야 하고, 또 연약한 조태언(趙泰彦) 같은 자를 법을 세우는 본보기로 삼아서는 안될 것입니다.하였는데, 비답(?答)하기를, 그 뜻이 처음 정사하는 때를 위한 것일지라도, 감히 대여섯이라는 따위의 말을 임금에게 다시 아뢸 수가 있는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48권 4장 A면/ 【영인본】 42책 611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司法)(www.history.go.kr 2008)
조태언[記事] : 영조실록 48권/ 영조 15년(1739 기미 / 청 건륭(乾隆) 4년) 2월 22일(기해) 3번째 기사/ 우의정 송인명이 청대하여 동조에 진연하기를 청하니, 따르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청대(請對)하여 동조(東朝)에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한 일을 자성(慈聖)께 아뢰어 다행히 애써 허락을 받았다.하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길일을 잡아서 거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민형수(閔亨洙)의 소(疏)를 들여오라고 명하고 신하들은 합문(閤門) 밖에 물러가 있게 하였다가 이윽고 다시 대신(大臣)․경재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처분한 뒤로 여러 신하들의 마음에 전보다 고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이 소가 있으니, 또한 나라의 변란이다.하자, 송인명이 먼저 민형수 등이 그 선부(先父)의 심사를 밝히려 한 것을 말하고 신구(伸救)하려는 뜻을 조금 보이고, 이어서 민진원(閔鎭遠)․이광좌(李光佐)의 일을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갑진년9115) 에 병환을 숨겨서 봉조하(奉朝賀)에게 의심받은 것은 그때 놀랍고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지나지 않고 그 마음은 참되어 다른 뜻이 없었으니, 전하께서 이것으로써 영상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봉조하는 귀양가서 외방(外方)에 있을 때에 전파된 흉악한 말을 들었으므로 무신년9116) 이후에 드디어 그 처사가 진선(盡善)하지 못한 것을 의심하고 그래서 의심하여 멀리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쳤으니, 전하께서 이것으로 봉조하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대개 두 사람의 마음은 비록 같지 않았더라도 다 나라를 위하는 공심(公心)에서 나왔으니, 치우치게 돕거나 치우치게 억눌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 민형수가 그 아비를 위하여 심사를 밝히되 과격한 말이 많았으므로 이것이 비록 그르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스스로 확실히 알아서 굳게 지킬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9일 하교에 이미 모두 말하였다. 경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도 생각 밖으로 버려두려 하였다. 경의 말은 양편의 다툼을 분해(分解)하는 것이라 하겠다.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은 오늘날 당론에 처한 자는 백정이 소를 해체하고 공수(?遂)가 엉클어진 노끈을 풀듯이9117) 각각 그 사리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늘 생각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9118) ․임인년9119) 당시에는 영상뿐만이 아니라 모두 다 사정에 어두웠고 그 뒤에 영상이 그 잘못을 스스로 하소연하였으므로 그 마음에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 수 있는데, 갑진년의 일을 뒤미처 제기하니, 내 마음이 더욱 감상(感傷)된다. 곧바로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은 것을 죄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그때의 일은 내가 친히 본 것이고 옛 기록에도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은 때가 많이 있으며 내가 당하였더라도 설치하지 않았을 것인데, 나를 불충(不忠)하다고 할 것인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을 등용한 것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 하여 죄준다면 영상도 할 말이 없겠으나,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은 것을 죄로 삼는 것은 매우 법문(法文)을 엄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당시 흉당(凶黨)이 흉악한 말을 유포하였으니, 갑진년의 일이 없었더라도 그 뒤에 난역(亂逆)이 있었을 것은 틀림없다. 당초에 시약청을 설치하였다면 이것을 죄로 삼았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영상이 이 때문에 번민하여 죄를 칭하려 하니, 이것을 어찌 따를 수 있겠는가? 아까워하는 것은 영상이 색목(色目)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색목이 아니면 남에게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찌 확실한 소견이 있겠는가? 늘 버릇된 것을 벗어나기 어려워서 먼저 들어온 것을 주장 삼아 점점 굽은 길로 들어가므로, 봉조하가 스스로 당(黨)이 아니라고는 하나 의심하는 것이 너무 지나쳤던 것이다.
모든 일은 작더라도 서로 닮은 것이 있는데, 봉조하가 영상을 보는 것은 오원(吳瑗)이 오광운(吳光運)을 보는 것과 같아서 사람의 기품(氣稟)이 본디 같지 않고 시론(時論)이 또 따라서 그르친다. 봉조하의 마음을 내가 이미 알았으므로 좌우로 손을 잡은 것이고 피차가 당수(黨首)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니, 이제 민형수가 매우 그르다. 민형수는 사람됨이 자못 너그럽다고 들었는데 역시 그러한가? 지난번 부부인(府夫人)이 자전(慈殿)을 뵈었을 때에 내 마음이 기쁘고 옛일을 뒤미처 생각하였다. 이제 부부인이 의지하는 자는 민형수 형제만이 있을 뿐인데 그들이 이와 같으니, 내가 이 때문에 민형수를 불효자라고 하는 것이다. 남이 맞대어 거론하면 도리어 그 아비를 욕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그 아비의 심사를 밝히기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난번 난역은 이제 이미 모두 다스렸으니, 효경(梟?)9120) 같은 무리가 있더라도 어찌 감히 다시 범할 수 있기에 갑진년의 일을 말하는가? 서덕수(徐德修)의 일은 처분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제 와서 감히 말을 제기하니, 또한 국모(國母)를 위하고자 함이 아닌가? 봉조하가 살아서 이 소를 올렸더라도 매우 지나친 것일 터인데, 더구나 민형수는 그 아비가 멀리 귀양갔다 하여 영상에 대하여 원한이 뼈에 사무쳐 여러 재상들을 증거로 삼았으니, 더욱이 매우 해괴하다. 조태언(趙泰彦)도 내가 오히려 삶아 죽이려 하였는데, 삶아 죽이는 법을 민형수에게 쓰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배윤명(裵胤命) 못지 않은데 이러한 자를 묻지 않고 어찌하겠는가?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 어찌 국문(鞫問)할 만한 자이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성후(聖后)에 대하여 감복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이러한 것이다.
민형수의 죄는 삶아 죽여 마땅하다. 예전에 이른바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편다는 것을 또한 민형수에게 쓰겠는가?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인심은 인현 성모(仁顯聖母)에 대하여 백세(百世)토록 잊지 못하고 또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과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은 다 사류(士類)가 추중(推重)하는 바이니, 이제 민형수의 일은 지나쳤을지라도 성상께서 성후를 추모하시는 도리로서는 특별히 법을 굽히고 은혜를 파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각각 소견을 아뢰는 것이 마땅하겠다.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민진원(閔鎭遠)의 마음은 오로지 고심(若心)과 단충(丹忠)에서 나왔는데, 이제 민형수가 그 아비의 심사를 밝히려고 그 근저(根?)를 극력 말하였으니, 어세(語勢)가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교(聖敎)는 도리어 민형수가 서덕수에 대한 처분을 보고 기회를 타서 불쑥 일어난 것으로 여기십니다마는, 이는 신이 그렇지 않은 줄 압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처분할 때에 호판(戶判)이 먼저 눈물을 흘리고 진정(陳情)하기에 내가 이 뒤에는 다 전의 버릇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오늘 임금에게 말하는 것은 민형수를 그르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신이 처음에는 봉조하와 서로 친하지 않았으나, 그 뒤에 나랏일을 맡게 되어 함께 일을 같이 하고서는 그가 나라를 위하여 고심하는 것을 깊이 알았습니다. 민형수는 그 아비의 마음을 밝히려 하였을 뿐이고 결코 때를 타서 유감을 부리려는 뜻이 아닙니다.하고, 송인명과 비국 당상(備局堂上) 서종옥(徐宗玉)이 또 인현 성묘와 동조께 진연할 것을 다시 말하고 그 죄를 가볍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굳이 따르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버려두고 묻지 않고 다만 그 소를 돌려 주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48권 18장 A면/ 【영인본】 42책 618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변란-정변(政變)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註 9115]갑진년 : 1724 경종 4년. ☞ / [註 9116]무신년 : 1728 영조 4년. ☞ / [註 9117]신은 오늘날 당론에 처한 자는 백정이 소를 해체하고 공수(?遂)가 엉클어진 노끈을 풀듯이 : 공수(?遂)는 한(漢)나라 남평양(南平陽) 사람으로, 선제(宣帝) 때 벼슬이 수형 도위(水衡都尉)에 이름. 도적(盜賊)을 평정하고 스스로 검약(儉約)하며 백성에게 농상(農桑)을 권하매, 백성들이 매우 부(富)하였다고 함. 발해(渤海)에서 도둑이 도처에 일어나 다스리지 못하게 되자, 선제가 공수를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삼고 도둑을 없앨 방책을 물으니, 공수가 신이 듣건대, 어지로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엉클어진 노끈을 푸는 것과 같아서 급박하게 하여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오직 늦춘 뒤에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고사임. ☞ / [註 9118]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 [註 9119]임인년 : 1722 경종 2년. ☞ / [註 9120]효경(梟?) :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 먹는 파경(破?)이라는 짐승. 흉악하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임. ☞(www.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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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