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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55-20 : 민통수(1735.3.18제수, 동년.4.4하직-1736.3.12이임) : '영천암'을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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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수[記事] : 영조실록 49권/ 영조 15년(1739 기미 / 청 건륭(乾隆) 4년) 7월 21일(을축) 1번째 기사/ 이조 판서 조현명 등이 전랑의 통색에 관한 일 때문에 상소하다/ 이조 판서 조현명이 전랑(銓郞)의 통색에 관한 일 때문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심악과 민통수를 통의(通擬)하려 한 것은 반드시 이렇게 안배하고서야 분쟁을 그치게 하고 물정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드디어 연중(筵中)에서 번거로이 아뢰기에 이르렀습니다. 변함 없이 고심하는 것은 신명(神明)에게 질증(質證)할 수 있으나 이제 와서 이 생각을 이루지 못하고 또 망극한 분부를 받았으니, 신은 여기에 대해서도 감히 처음의 소견을 굳이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대정(大政)을 빨리 끝내는 것이 급할 뿐이므로 심악이 막히고 민통수만이 통의되더라도 참으로 한 마디 말도 다투려 하지 않았으나, 이 즈음에 오수채의 상소가 또 나왔습니다. 대개 신이 일전에 전 판서 윤혜교(尹惠敎)의 말을 들으니 오전랑(吳銓郞)이 접때 공좌(公坐)에서 뚜렷이 민통수를 막았다. 하였고, 이제 오수채의 상소에 이른바 전랑의 통의를 취사하는 사이에 담에 붙어 듣는 귀를 경계하지 못하고 무릎 앞에 다가가 하는 비밀한 말이 먼저 드러났다.라고 한 것은 바로 윤혜교가 전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그렇다면 오수채가 민통수를 막은 것은 그 시비․득실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현임으로 문필(文筆)을 잡은 자가 이미 막았으면 그 사람이 전랑 자리를 떠나기 전에는 통의할 수 없는 것이 곧 정사(政事)의 규례입니다. 어제 구대(求對)하여 감히 홍창한을 의망(擬望)하기를 청한 것은 대개 반드시 이렇게 하고서야 오수채를 구처(區處)할 수 있고 오수채를 구처하고서야 민통수를 전랑에 의망하는 것을 비로소 의논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위에서 홍창한의 의망을 윤허하시지 않았으니, 드디어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사를 파한 뒤에 신이 두 동료와 상의하기를, 엄한 하교를 받은 뒤에 다른 것은 돌아볼 수 없거니와, 민통수를 통의하고 심악을 막는 것도 다 안될 것이 없으나, 다만 전랑의 상소가 또 나왔는데 미처 구처하지 못하였으니, 굳이 의망하기 어려운 형세이다. 하였더니, 동료 당상의 뜻은 오히려 전랑의 상소에 민통수의 이름을 가리켜 거론하지 않았다 하여 반드시 의망하려 하므로, 이 때문에 반복하다가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구차하게 미봉하여 눈앞의 일이 무사하기를 바랐으나, 정사(政事)의 규례를 어길 수 없는 것을 어찌합니까? 신은 변변치 못하면서 외람되게 장석(長席)에 있거니와, 처음에는 심악과 민통수를 모두 통의하려 하였더니 동료의 의논이 막았고, 이제는 심악을 버리고 민통수를 취하려 하였더니 전랑의 상소가 견제하고 또 3백 년 동안 지켜 온 정사의 규례를 폐기할 수 없어서 동료의 말에 굽혀 따랐습니다. 동에서 거꾸러지고 서에서 부딪혀 처치할 바를 모르므로, 장차 때를 넘겨 한 달이 지난 도정(都政)이 끝날 기약이 없고 뼈를 찌르고 골에 사무치는 하교가 죄다 잡초 속에서 시들게 만들 것이니, 불충하고 변변치 못한 죄는 죽음을 피할 데가 없습니다.하고,
참판 정석오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어제 전형(銓衡)하는 일 때문에 책유(責諭)를 받고 물러간 뒤에도 서로 거절하는 의논이 오히려 하나로 돌아가지 않아서 이제 상소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 일에 대하여 실로 혐의가 있어 가부를 말하기 어려운 의논을 이미 연중(筵中)에서 죄다 아뢰었습니다마는, 중간에서 조정하여 성지(聖旨)에 우러러 부응하지 못한 죄는 신도 만 번 죽어도 갚을 수 없습니다.하고, 참의 신만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한 낭관(郞官)의 망(望)이 통하고 막히는 것이 어찌 큰 일이겠습니까마는, 일의 꼬투리가 거듭 일어나 성려(聖慮)를 번거롭히기에 이르렀습니다. 지성스럽게 반복하신 하교가, 자상한 아버지가 미혹한 아들을 가르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었으니 어둡고 완고하기가 목석과 같더라도 어찌 감격하지 않았겠습니다마는, 파대(罷對)한 뒤에 장석(長席)이 곧 새로 통의한다는 뜻으로 오수채(吳遂采)에게 서신으로 물었으나 바야흐로 당한 것이 있으므로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어서 또 물러가 대궐 밖에서 모였는데, 장석이 신에게 말하기를, 일이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것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민통수와 다른 한 사람을 오수채와 함께 구전(口傳)으로 의망하여 들여야 하겠는데, 어떠한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아주 좋다. 빨리 비의(備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더니, 장석이 또 윤혜교와 수작한 말을 거론하여 말하기를, 오수채가 이미 뚜렷이 민통수를 막았고 이제 그 상소의 말이 또 이러한데, 오수채를 구처하기 전에 민통수를 통의한다면 정사의 규례에 있어서 어떠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대개 오수채가 반드시 민통수를 막으려는 데에는 그럴 만한 곡절이 있겠으나, 장석이 이것을 빙자하여 다투는 것은 매우 마땅한 것이 아닌데, 신이 그것이 옳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면 끝없는 갈등을 일으킬 듯하므로, 다만 정사의 규례를 가지고 대답하기를, 오수채가 이제 문필을 잡고서 막을지라도 소상한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인데, 어찌 사사로운 수작과 분명히 하지 않은 상소의 말 때문에 공연히 통의해야 할 사람에게 의심을 갖겠는가? 하니, 장석이 잠시 동안 생각하고 말하기를, 이 일은 이처럼 구차하게 채울 수 없으니 내일 모일 때를 기다려야 하겠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이제 거의 순조로이 되어 가는데 또 어찌 다시 헤아릴 것이 있겠는가? 내일 다시 모이더라도 나의 생각은 이미 오늘 다 말하였으니, 다시 의논할 일이 없다.…… 하고 파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장석이 신에게 글을 보내기를, 밤새도록 반복하여 자신을 굽혀 성취할 방법을 생각하였으나 마침내 억지로 할 수 없으니, 노장(露章)9239) 하여 스스로 처리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장석의 상소는 오로지 오수채의 말을 가지고 민통수를 막는 도구[資斧]로 삼고 신을 억지로 자기 의견을 세우는 죄로 돌려서 자신을 굽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일의 꼬투리가 갑자기 변하여 상소에 갈라진 마디가 거듭 생기니, 민통수가 시론(時論)에 무슨 죄를 얻은 것이 있어서 서로 배척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참으로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 이른바 정사의 규례라는 것에는 더욱이 말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낭관의 통의는 사체(事體)가 가볍지 않으므로 반드시 현임 당상․낭청이 합석하여 결정해야 하는 것이 변함 없는 정사의 규례인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서 신들은 처음부터 오수채와 가부를 의논한 일이 없으니, 어찌 전 전장(銓長)과 수작한 말과 탄핵을 당하여 내뱉은 말을 감히 어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을 뿐더러 쟁탈하는 마당에 격돌하는 논의가 장차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까 염려되니, 신은 세도(世道)를 위하여 근심합니다.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49권 32장 A면/ 【영인본】 42책 635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註 9239]노장(露章) : 뭇사람이 알게 하기 위한 봉함하지 않은 상소. ☞(www.history.go.kr 2008)
민통수[記事] : 영조실록 49권/ 영조 15년(1739 기미 / 청 건륭(乾隆) 4년) 7월 21일(을축) 2번째 기사/ 조현명 등을 불러 전랑의 통색에 대해 묻고, 조정의 당습과 구습을 고치게 하다/ 임금이 우의정 송인명․이조 판서 조현명․참판 정석오․참의 신만을 특별히 불러 전랑의 통색에 관한 일을 묻고, 특별히 제수하여 민통수를 광주 부윤으로, 심악을 수원 부사로 삼고, 수백 마디 말을 하교하여 서로 당습을 하는 잘못을 꾸짖고, 전조(銓曹)와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구습을 빨리 고치게 하였다. 대개 전랑은 일세의 극선(極選)이다. 주의(注擬)할 때마다 피차가 서로 버티고 서로 다투므로 참으로 한 가지 깊은 폐단인데, 민통수․심악의 일에 이르러 극심하였다. 임금이 어제 이미 조현명과 신만이 말한 것을 들었고 또 그 상소를 보아서 양편이 서로 이기려고 다투어 조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송인명과 조현명 등을 특별히 불러서 물었는데, 송인명은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여 양편이 다 옳고 양편이 다 그르다 하며 임금에게 관여하지 말라고 권하였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신만의 말을 따라 민통수만을 통의하려 하였으나 오수채에게 저지되었으므로 정사의 격례를 어기면서 굳이 통의할 수 없었습니다.하고, 신만도 심악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으나 조현명이 반드시 민통수를 막으려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 임금도 민통수를 저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또 신만이 심악을 저지하는 것을 그르다 하여, 드디어 품계를 올려서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내보내라는 명이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36책 49권 33장 A면/ 【영인본】 42책 635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www.history.go.kr 2008)
민통수[記事] : 영조실록 49권/ 영조 15년(1739 기미 / 청 건륭(乾隆) 4년) 7월 29일(계유) 1번째 기사/ 광주 부윤 민통수가 상소하여 이광좌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민통수(閔通洙)가 상소하여 이광좌의 상소에 대하여 변명하기를, 이광좌의 상소는 한 편(篇)의 도리에 어그러진 이야기입니다. 이따금 말할 듯 말 듯 괴이하고 비밀하여 그 가리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그 이른바 논해서 귀양 보낸 묵은 원한을 보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은 무신년9243) 봄에 선신(先臣)이 합계(合啓) 때문에 원주(原州)에 귀양갔을 때에 이광좌가 옆에서 대간의 말을 도와서 윤허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을사년9244) 정청(庭請)할 때에 선신이 이미 이광좌를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기를 청하였고, 태학생(太學生) 정유(鄭?)가 이광좌를 토죄(討罪)하기를 청한 소(疏)에 신의 형이 실로 재임(齋任)으로서 같이 참여하였으나, 그때에 선신과 신의 형이 이광좌에게 무슨 원한이 있었겠습니까? 이광좌가 선신을 논하여 귀양 보낸 것은 그보다 4년 뒤에 있었으니, 이것으로 논하면, 신의 집에서 이광좌를 원망하여 보복하였겠습니까? 이광좌가 신의 집을 원망하여 보복하였겠습니까?
이광좌의 이 말은 할말을 찾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신은 전후 두 번 귀양갔는데, 신축년9245) 겨울에 성주(星州)에 귀양간 것은 박필몽(朴弼夢)이 아뢰었기 때문이고 이듬해 특별히 석방하였다가 도로 거둔 것은 이진유(李眞儒)가 청한 것이었거니와, 박필몽과 이진유는 그 뒤에 모두 역적으로 벌받아 죽었으나 선신이 보복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합계(合啓)로 말하면 어의(語意)가 매우 불측하되 또한 맨 먼저 발론하고 따라서 참여한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이광좌는 가장 뒤에 조언(助言)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선신은 그 맨 먼저 발론한 사람이건 따라서 참여한 사람이건 또한 개의하여 보복한 적이 없는데, 어찌 조언한 이광좌에게만 반드시 보복하려 하였겠습니까? 전하께서 이광좌의 말을 먼저 받아 들이셨으므로 일전의 비지(批旨)에 원한을 품고 보복하는 것을 상하가 다 안다.라고 말씀하였으니, 신의 마음에 부끄럽고 아픈 것이 더욱이 어떠하겠습니까? 이광좌는 선신이 성무(聖誣)를 변명한 것을 대체(大體)에 미달하다 하였습니다. 아! 한편 사람은 성무가 망극한 것을, 흉도가 핑계 삼은 것은 병환을 숨겼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마음을 썩히고 눈물을 머금으며 반드시 변명하려 하고, 한편 사람은 깊이 숨기지 못할까 염려하여 사람이 혹 말을 제기하면 반드시 죽여서 뭇사람의 입을 막으려 하니, 이것이 실로 오늘날 충역이 크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흉악한 말이 생긴 까닭과 어지로운 계제가 일어난 까닭을 통렬히 밝혀서 붙좇거나 협박받아 따른 무리가 다시는 흉적에게 근거 없는 일로 꾀임받지 않게 하고서야 기율을 범하고 순리를 범하는 자를 참으로 일소할 수 있을 것이니, 임금을 높이고 나라에 충성하는 대체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광좌는 또 신의 형이 전후에 상소한 것을 그 말을 세 번 바꾸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외방에서 전혀 들어 알지 못한 것은 설청(設廳)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설청하지 않은 것은 숨기려는 계책이었으니, 본디 같은 말인데 어찌 세 번 바꾸었다 하겠습니까? 이광좌는 근년에 스스로 설청하지 않은 까닭을 말하되 혹 전례가 망극하여 차마 거론할 수 없었다고도 하고, 혹은 다른 정승의 도움이 없어서 목이 타되 겨를이 없었다고도 하여 동에서 패하고 서로 달라며 손발이 황망하고 어지러웠으니, 이러한 것이 참으로 이른바 말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고, 신의 형의 상소로 말하면 그같은 것이 보일 뿐이고 그 바뀐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원주(原州)를 수일에 왕복한다느니 금오(金吾)를 처음부터 겸대(兼帶)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따위 말은 더욱 아이들의 말과 같아서 한 번 웃을 것도 못 됩니다. 대저 열흘 안에 있는 일이면 다 수일이라 할 수 있는데 원주처럼 가까운 곳을 어찌 수일에 왕복할 수 없었겠습니까? 그가 옥관(獄官)의 장(長)이 된 것이 혹 다섯 달 뒤에 있었더라도 그가 스스로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한 것도 다섯 달이나 오래 되었다 하였고 그가 위관(委官)으로 오르게 되어서도 시일이 더욱 오래 되어 문무 경재(文武卿宰)로서 그의 손에 죽은 자가 가장 많았으므로, 지난번 조정의 의논이 이광좌가 처음부터 끝까지 옥사를 안치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이형좌(李衡佐)의 상소로 말하면 신에게 분노하고 신을 원망하여 도리에 어그러지고 불길하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을 압박하기 위하여 힘을 다한다 하겠습니까마는, 다만 그 상소를 보면 선신과 수작하였다. 하고 또 이광좌와 왕복하였다. 하고 또 선신이 생각 밖의 일과 사실에 벗어나는 일로 이광좌를 의심하였다. 하였는데, 무릇 사람은 남이 생각 밖의 일과 사실에 벗어나는 일로 내 지친(至親)을 의심하면 말의 잘잘못과 의심해야 할 일인지를 논하지 않고 반드시 그 말을 빨리 전하여 당사자에게 알리는 것이 본디 일반적인 마음일 것입니다. 이제 선신이 말한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이며 선신이 또 이광좌에게 말을 전하기를 바랐으니, 이형조가 이미 이광좌에게 왕복하고도 다만 나라의 일을 같이하기를 권하고 선신이 말한 것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이형좌가 참으로 상소하게 하려는 일로 이광좌에게 왕복하였다는 것을 환히 알 수 있습니다. 이광좌가 선신의 말을 듣고도 오히려 태연하게 끝내 상소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을 둔 바는 뭇사람의 손이 가리킬 만한 것9246) 이 아니겠습니까? 그 수작하고 왕복한 실상은 절로 이처럼 엄폐할 수 없는데 도리어 신을 황당한 이야기로 돌리려 하니, 그 계책이 엉성합니다. 대개 당시에 수작한 것은 역변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있었으므로, 이형좌가 선신에 대하여 말한 것은 전에 상소하여 아뢴 것에 그칠 뿐이 아니며, 또한 이형좌만이 그러하였을 뿐 아니라 그때의 한 무리가 대저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심(聖心)이 변하지 않고 징토가 엄하지 않았으니 반년 뒤에 다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하였거니와, 이제는 모두 덮어 숨기려는 것입니까? 이광좌가 병환을 숨겨 어지럽게 만든 정상은 본디 희미해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때 설청하지 않았을 뿐더러 주원(廚院)9247) 에 이직(移直)한 것도 이미 망극한 지경에 이른 뒤에 있었고, 독삼차(獨蔘茶)로 말하더라도 다음(茶飮)이라고 소보(小報)에 쓰여져 나왔습니다. 선신이 성주(星州)의 적소(謫所)에 있을 때에 갑자기 국상(國喪)을 듣고 곧 주성(州城)에 들어가 그대로 머물러 성복(成服)할 즈음에 지난 조지(朝紙)를 얻어 보았더니 대점(大漸) 전일의 소보 가운데에 다음을 하셨다.는 등의 말이 있으므로, 선신이 괴이하게 여겨 이것은 어떤 다음인데, 다명(茶名)을 쓰지 않았는가? 하였습니다. 을사년9248) 조정에 돌아온 뒤에 내국(內局)에서 돌아와 신에게 말하기를, 성주에 있을 때에 소보 가운데에서 본 이른바 다음이라는 것은 이제 약원 일기(藥院日記)에서 상고하니 독삼차였다. 그때 소보에 다음(茶飮)이라고 한 것은 매우 괴이하다. 하였습니다. 대저 약원의 규례는 임금이 드시는 약은 소엽(蘇葉)․금은화(金銀花) 같은 것일지라도 반드시 그 이름을 쓰는 것인데, 이제 독삼차를 사용하고도 범연히 다음이라 칭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렇게 하고도 모두 조보(朝報)에 내서 온갖 사람에게 분명히 알렸다.고 한 것은 누가 속이는 것입니까? 소보에 난 것이 이러하므로 서울에 있는 조사(朝士) 중에도 성후(聖候)가 독삼차를 쓰기에 이른 것을 모른 자가 있었습니다. 신이 기유년9249) 에 우연히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와 그때의 일을 언급했을 때에 어유귀가 슬피 말하기를, 그때 내가 사친(私親)의 복을 입었으므로 대궐 안에 출입하지 못하고 내간(內間)에서 전하는 것에 따라 성후가 위중함을 알기는 하였으나 조보에 쓴 것이 대수롭지 않으므로 드시는 약물은 막연히 몰랐는데, 하루는 삼차(蔘茶)를 달려 드셨다는 말을 듣고 내국(內局)9250) 에 물었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어서 부부인(府夫人)을 재촉해 들어오게 하라는 명이 있으므로 못 견디게 놀라서 대궐로 달려갔는데, 이날 밤에 큰 슬픔을 당하였다. 내가 국척(國戚)으로서 서울에 있었는데도 알 수 없었으니, 중외(中外)에서 모르고서 놀라 의혹한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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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