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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58-12 : 김응복(1738.8.23제수. 동년.9.15하직-1740이임) : 의충사에 황사성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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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복[記事] : 영조실록 31권/ 영조 8년(1732 임자 / 청 옹정(雍正) 10년) 윤5월 7일(임진) 2번째 기사/ 이자․유건기․송성명․이진망․이유․이종백․김재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자(李滋)를 장령으로, 유건기(兪健基)를 지평으로, 송성명(宋成明)을 판윤으로, 이진망(李眞望)을 참찬으로, 이유(李瑜)를 이조 참의로,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정랑으로, 김재로(金在魯)를 판돈녕부사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로, 박사수(朴師洙)를 동지춘추관사로, 김응복(金應福)․이일제(李日?)를 승지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4책 31권 25장 B면/ 【영인본】 42책 305면/【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8)
김응복[記事] : 영조실록 41권/ 영조 12년(1736 병진 / 청 건륭(乾隆) 1년) 6월 25일(무자) 2번째 기사/ 《오대사》를 강하다가 조명겸이 풍도를 명인이라 하자 김응복이 분개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오대사(五代史)》를 강(講)하다가 검토관(檢討官) 조명겸(趙明謙)이 〈후주(後周)의〉 풍도(馮道)8318) 를 대단하게 칭송하면서 풍도가 아니었다면 오대(五代)의 백성들은 간뇌 도지(肝腦塗地)8319) 가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어떤 임금을 섬긴들 나의 임금이 아니며 어떤 백성을 부린들 나의 백성이 아니랴? 하는 뜻으로서 스스로 이를 그때의 명인(名人)으로 여겼으며, 또 말하기를, 세 번 쫓겨나도 유감(遺憾)이 없었으니, 탐(貪)하거나 연연(戀戀)해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하니, 임금도 엄히 배척하지 못하였는데, 승지(承旨) 김응복(金應福)이 파태(罷對)하고 사모[帽]를 벗어 땅에 던지며 분개하여 부르짖기를, 풍도가 바로 명인이란 말인가?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조명겸의 이 말은 그의 심술(心術)을 단정하기에 충분하며, 감히 이 말을 연석(筵席)에서 진언(進言)하였으니, 소인(小人)으로서 꺼려함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김응복이 임금 앞에서 대면하여 배척하지 못하고 물러난 뒤에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그의 거조(擧措)를 관찰하면 역시 그가 소박하고 강직함을 볼 수 있다. 뒤에 임금이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풍도가 거란(契丹)의 태부(太傅)가 되는 데 이르렀으며 그가 임금을 팔고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늙어 갔으니, 참으로 역적이다.하였는데, 듣는 이가 통쾌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37장 A면/ 【영인본】 42책 510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 *정론(政論)/ [註 8318]풍도(馮道) : 중국 오대(五代) 때 후주(後周)의 사람으로, 왕조가 다섯 번 바뀌었으나 사성(四姓) 십군(十君)의 임금을 섬기면서 20여 년 동안 상위(相位)에 있었으므로, 후세에서 비루하게 여겼음. ☞ / [註 8319]간뇌 도지(肝腦塗地) : 참살(慘殺)을 당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진다는 뜻. ☞(www.history.go.kr 2008)
김응복[記事] : 영조실록 43권/ 영조 13년(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년) 2월 6일(갑자) 1번째 기사/ 김우철․김상로․김기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우철(金遇喆)을 장령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정언으로, 김기석(金箕錫)을 사간으로, 조명겸(趙明謙)을 헌납으로, 남태온(南泰溫)․김응복(金應福)을 승지로, 조상명(趙尙命)․유건기(兪健基)를 교리로, 윤광의(尹光毅)를 사서로, 유경장(柳經章)을 강계 부사로, 정우량(鄭羽良)을 수원 부사로, 이조 참판 윤혜교(尹惠敎)를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3권 13장 A면/ 【영인본】 42책 53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8)
김응복[記事] : 영조실록 43권/ 영조 13년(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년) 3월 26일(갑인) 2번째 기사/ 급제 이현필이 송인명과 친함을 믿고 임금의 과실을 지적하였는데 임금이 알았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급제(及第) 이현필(李顯弼)이 고관(考官)과 사친(私親)이 있어 직언(直言)으로 반드시 합격한 계책을 세울 것을 요구하고는 대책(對策)의 편두(篇頭)에서부터 전적으로 임금의 과실을 말하였는데, 말에 패만(悖慢)한 것이 많았으므로 임금이 마음속으로 미워하였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신(群臣)을 대할 적마다 수심에 잠겨서 즐거운 빛이 없었으므로 조정이 두려워하여 어수선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나아가 아뢰기를, 이번에 이현필이 대책(對策)에서 전적으로 성궁(聖躬)을 공척했는데, 예로부터 책규(策規)는 반드시 폐단에 근원하여 군덕(君德)을 논하면서 숨김없이 직절(直截)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그렇지 않고 편수(篇首)에서부터 종편(終篇)에 이르기까지 조목별로 궐실(闕失)을 논열(論列)했는데, 간혹 사실과 틀린 것도 있었고 억측에 관계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도 가리지 않고 썼는데, 고관(考官)이 이를 뽑은 것은 숨김이 없이 아뢴다는 문을 열려고 한 것에 불과하지만 신은 이 일로 인해 크게 뒷날의 폐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의 말이 그릇되고 망령된 것이야 성덕(盛德)에 무슨 손상이 있겠으며, 또한 어찌 연충(淵衷)에 개의(介意)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근일 성상의 사교(辭敎)가 화평함을 잃고 상하가 막혀 있으며 성의(聖意)에 맺힌 것이 있는데도 발설하지 않는 것 같은 점이 있으니, 뭇신하의 우민(憂悶)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분명한 하교를 내리소서.하고, 우의정 송인명은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게 시사(試事)를 관장했었는데, 이에 이런 일이 있게 되었으니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신이 그의 글을 상세히 살펴보았더니 두 조항이 가장 눈에 걸렸습니다만, 어찌 털끝만큼이나마 성덕에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 하나는 봉작에 대한 일인데, 경술년8565) 의 국휼(國恤)8566) 이 경자년8567) 과 달랐던 것은 군신의 복제에 불과했으니, 작품(爵品)을 전례에 의거하여 승배(陞拜)한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또 하나는 복성(卜姓)에 관한 일인데, 우리 조정은 본디 예의지방(禮義之邦)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만, 성이 같고 본관이 다른 경우의 혼인은 선배․명현들 사이에도 많이 있어 왔습니다. 신의 외조(外祖)인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은 시례(詩禮)의 대가로서 유현의 법도가 되었습니다만, 외조모도 성이 이(李)씨였으며, 고 상신 김우항(金宇杭)도 내외(內外)가 같은 성(姓)이었는데, 이밖에도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근래의 사대부들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점을 말하는 것을 힘써 명절(名節)로 삼고 있으므로 이 일이 연석(筵席)이나 소장(疏章)에서 여러 번 발론되었는데, 그 사람이 혹 다른 일로 인하여 성지(聖旨)에 거스름을 받으면 문득 성상께서 이 말을 들은 것을 싫어하는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조금이나마 과감히 말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번 고관(考官)들 가운데 이현필(李顯弼)의 글을 뽑을 수가 없다고 한 이가 많았습니다만, 신이 문득 생각하건대, 이 글이 비록 척출(斥黜)된다 하더라도 사자(士子)들이 반드시 그 내용을 전파할 것이니, 차라리 선입(選入)하여 성상께서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덕을 드러내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 결국 선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여러 번 한숨을 쉬면서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경들이 한 말은 가려운 곳을 긁은 것과 같다. 내가 일찍이 임금의 자리를 찬탈하려 하는 역적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여겼으니, 임금이 되면 무슨 즐거운 것이 있는가? 필부(匹夫)는 오욕을 받으면 반드시 이를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남의 말을 듣고 스스로 변해하려고 하면, 문득 용납하여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니, 평일 원통한 마음을 눌러 삼킨 것이 임금 같은 경우가 없는 것이다. 나는 성품이 조급하여 실정 외의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견디지 못한다. 경들이 분명한 하교를 내릴 것을 청하고 있지만, 내가 말을 하면 반드시 변명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니,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 이번에 정문(庭問)한 것은 백성을 구제할 방책에 대해 듣고 싶었는데, 이에 이현필에게 욕을 당하였다. 무신년의 난(亂)을 겪은 뒤로 변괴 또한 고루 겪었기 때문에 마음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 한 사람이 붓으로 쓰는 것은 용이한 것이지만 뒷날의 폐단은 마땅히 어떤 지경에 이르겠는가? 현빈(賢嬪)을 간택할 적에 국가를 위하여 연장자(年長者)를 얻으려 했었고, 또 그 부형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풍릉(?陵)의 집으로 정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자못 다행스럽게 여겼었다. 그리하여 송신(宋臣)이 아뢴 네 조항을 제목으로 걸고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더니, 우생(優生)들 가운데 글을 짓지 않은 사람이 많았는데, 그 의도가 이상하였다. 경술년8568) 옥사(獄事) 때 정순명(鄭順明)이란 자가 여러 번 해괴한 말을 했었는데, 그뒤 밤중에 내린 하교(下敎)를 여러 신하들이 상세히 듣지 못하고서 한바탕 광요(?撓)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를 보면 세도(世道)를 알 수 있다.
지나간 해에 유언국(兪彦國)이 절일제(節日製)의 시권(試券)에, 부마(駙馬)의 혼례(婚禮) 때 그 동리(洞里)에 들어서니 이미 술과 고기의 냄새가 났다. 했는데, 그의 말이 지나치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발탁하여 급제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여 보니 거자(擧子)들이 위에서 하는 것을 보고 신기(新奇)하게 하기를 힘쓴다면, 뒷폐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정지했었다. 그러나 우상(右相) 풍원(?原)이 이름 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면하지 못하겠으므로 이 글을 뽑았던 것이다. 신해년8569) 의 정대(庭對)에서는 내가 직언(直言)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더니, 이광덕(李匡德)이 말하기를, 후궁(後宮)의 봉작(封爵)에 관한 일을 말했으나 떨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하였으며, 고 상신 이집(李?)은 단지 말하기를, 그 글은 격식에 어긋나서 빼버렸습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진실로 아름다웠다. 왕년에 이병태(李秉泰)가 유신으로 처음 연석(筵席)에 올라와서 이 일에 대해 말하기를, 이 뒤로는 복성(卜姓)하시기 바랍니다. 했는데, 내가 가납(嘉納)했었다. 이 봉조하(李奉朝賀)가 뒤에 그 말을 듣고 이병태를 명신(名臣)이라고 했으니, 내가 어찌 이 말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이제 방중(榜中)의 성씨를 살펴보건대, 이사관(李思觀)의 외조도 성이 이(李)씨이다. 봉작(封爵)한 일에 이르러서는 지금 바야흐로 종사(?斯)8570) 의 경사가 있기를 크게 바라고 있기 때문에 분만하기 전에 봉작한 것은 실로 종사(宗社)를 위해 연매(燕?)8571) 하는 뜻에서 나온 조처로서, 새로 선발된 후궁(後宮)에게 한 것과 같은 경우가 아니다. 내가 듣기 싫어했다면 이광덕(李匡德)을 또한 어찌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발탁해서 임명했겠는가? 다만 오늘날의 사체는 전과 다른 점이 있는데, 신하가 되어 어찌 다시 거론할 수가 있겠는가? 궁인(宮人)을 선발하여 들이는 것에 이르러서는 내가 본디 이런 일을 좋아하지 않는데, 지난번 자전(慈殿)께서 면전(面前)에서 부릴 사람을 초입(抄入)하라는 명이 있었고 대신의 말이 있었으므로, 내가 우러러 동조(東朝)께 핑계대고 싶지 않아서 곧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제 이현필이 이를 주차(周遮)8572) 라고 하였으니, 곧 한낱 가소로운 일이다. 별군직(別軍職)에 사정(私情)을 썼다는 이야기는 더욱 무상(無狀)한 말이다. 나의 외친(外親)에 대해서는 경들도 응당 알고 있는데, 어찌 이 직임에 합당한 사람이 없겠는가마는, 또한 임명한 적이 없다. 이밖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가? 이현궁(梨峴宮)에 대한 일은 탁지(度支)를 번거롭히지 않으려는 뜻으로 일찍이 하교한 적이 있었고, 예전대로 수보(修補)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는 사친(私親)을 깊이 생각하는 뜻에서 나온 조처인데, 이 일 또한 사의(私意)에 돌렸으므로 지금까지 마음에 맺혀 있다. 그런데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뒤로는 왕자(王子)․왕녀(王女)가 초사(草舍)나 토막(土幕)에서 살더라도 내가 알 바가 아니다.하고,
이어 눈물을 흘려 목이 메어 울며 말하기를, 내가 평일에 마음속에 맺힌 것이 있으면 털어버리지 못하였으므로, 근일에 목구멍에 환약만한 담(痰)이 엉겨 있다. 임금 노릇하기가 참으로 또한 괴롭다.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고 난 다음 다시 입시한 승지 김응복(金應福)을 불러놓고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지금까지 참아 온 것은 불평을 가슴속에 쌓아 두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듣건대, 까마귀와 소리개가 상처를 받으면 봉황(鳳凰)이 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현필을 아껴서가 아니라 참으로 정직한 선비를 아끼고자 하는 것이다. 나 또한 어찌 이름 내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잠시 전에 대략 하교했지만 모호하고 빠뜨린 점이 있었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만일 이현필을 참으로 직언(直言)하는 선비로 여기고 나를 허물을 변명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도리어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다시 이렇게 하교하는 것이니, 기거주(起居注)는 그 일을 상세히 기록하도록 하라. 첫머리의 두 조항에 대해서 나는 소홀하게 여겼으나, 대신들은 자못 신중하게 보았다. 조신(朝臣)이 말하였으니 진실로 직언(直言)이 되겠지만, 이 말이 점차 옮겨져서 전파된다면 오히려 무궁한 근심이 있게 될 것이다.
이병태(李秉泰)의 말도 첫 번째는 옳았으나 두 번째는 옳지 않았었다. 더구나 지금의 사체는 전보다 크게 다른데 어떻게 감히 번번이 거론하여 언급할 수가 있겠는가? 나의 동생(同生)으로 출제(出題)한 것은 곧 경솔한 것이었는데, 호남의 유생들은 오히려 깊이 살펴보고 직언하려 했으니, 어쩌면 지존(至尊)을 위하여 휘(諱)하는 의리가 그리도 없는가? 이들 무리가 반드시 옥하(屋下)에서 사사롭게 이야기하면서 항상 전설(傳說)했기 때문에 그러하였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실은 세도(世道)를 깊이 생각해서인 것이다. 사친(私親)의 궁(宮)에 대한 일은 선조 때 태조(太祖)의 어필을 봉진한 것이 있었는데, 이를 옹주(翁主)에게 하사하자, 상신 서종태(徐宗泰)가 이로 인하여 진계(陳戒)했으므로 여기에 감동되어 마침내 하교했던 것이다. 이는 사친의 궁이 세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이 또한 사친의 구궁(舊宮)이기 때문에 왕녀(王女)에게 하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속담에도 노래가 아무리 좋아도 늘 들으면 싫증이 난다.고 했는데, 이 일이 정대(庭對)하는 글에 오르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개연(慨然)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저 음식과 여색은 사람의 본성(本姓)이니,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내가 젊었을 적에 오랫동안 시탕(侍湯)하면서 궐내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근래 광식(廣植)의 말에서도 감동을 받았다. 마침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고 봉작한 일이 있었는데, 6백 명의 궁인(宮人)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한 이야기는 진실로 나의 본심이 아니었다. 자전(慈殿)께서 혹 궁인을 초입(抄入)하게 하시면서도 매양 하교하시기를, 만세 후에는 마땅히 모두 방송하라.고 하셨다. 이현필도 반드시 궁인이 어느 궁전으로 예속되었는가를 알았을 것인데, 오히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호판과 별군직에 대한 일을 마치 궁중에 사경(私徑)이 있는 것처럼 말하였으니, 진실로 통분스러운 일이다. 호판을 전조로 옮긴 것은 본래 특이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별군직에 제수된 자가 또한 많았는데, 그 가운데 이세기(李世琦) 같은 자가 있었던 것은 반드시 그의 성이 이(李)이기 때문에 후궁의 족속이 되는 것으로 의심했겠지만, 마침 그의 거주지를 물어보았더니, 곧 강상(江上)에 사는 사람이었다. 송(宋)나라 때 왕소(王素)는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은 이름을 모르는 사람으로 쓸 것을 청하였었다. 아조(我朝)의 가법(家法)은 매우 엄중하여 전대(前代)보다 훨씬 뛰어난 때문에 원래 이런 폐단이 없었다. 내가 비록 부덕하다 하나,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향낭(香囊)에 대한 일 또한 가소로우니, 풍원(豊原)이 이름 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여항의 사람들은 의복이 아름답지 않으면 그 허물을 가모(家母)에게 돌리지만, 대내(大內)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각기 관장하는 곳이 따로 있기 때문에 중궁(中宮)은 알 바가 아니다. 더구나 향낭은 본래 상방(尙方)에서 직조(織造)하는 것이겠는가? 내가 처음에는 그 글을 향유(鄕儒)가 지은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개탁하여 보니 곧 이현필이 지은 것이었다. 이는 오로지 교묘한 방법으로 과제(科第)를 점유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심술(心術)을 볼 수가 있다.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현필(李顯弼)이 송인명(宋寅明)에게 아첨하여 붙좇아 항상 야밤에 왕래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상문(相門)의 압객(押客)이라고 하였다. 송인명도 항상 말하기를, 익경(翊卿)8573) 을 이조 참의로 삼는다면 나의 일은 성취된 것이다. 하였으니, 그들의 친밀함이 이러하였다. 장시관(掌試官)이 됨에 이르러서는 이현필의 시권(試券)이 서두에서 끝편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과실을 논하면서 작은 일까지 낱낱이 거론하였는데, 그는 본래 글재주가 없어서 그 내용의 구성이 비루하고 졸렬한데다가 간간이 패만(悖慢)한 것도 많아서 거의 여항(閭巷)의 사람들이 서로 꾸짖으면서 욕하는 것과 같았으므로, 고관(考官)들 가운데 뽑지 않으려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 송인명이 유독 개연(慨然)한 작태를 지으면서 고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지위가 여기에 이르도록 하고 싶은 말을 아직도 감히 죄다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거인(擧人)이 이에 이렇게 하였으니, 어찌하여 뽑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조현명(趙顯命)은 기괄(機括)이 숨겨져 있는 줄도 모르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상공(相公)의 말이 사람을 감복하게 합니다. 하고, 드디어 고제(高第)에 올리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감히 다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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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