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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58-13 : 김응복(1738.8.23제수. 동년.9.15하직-1740이임) : 의충사에 황사성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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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放榜)하자 온 세상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현필이 시장(試場)에 들어가기에 임하여 밤을 틈타 정승의 짐에 갔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글 가운데 송인명이 아뢴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매우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외인(外人)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의 송인명이 가르쳐 준 것으로 여겼다. 또 지부(地部)8574) 의 하리(下吏)를 불러 묻기를, 성상께서 근래에 대내(大內)로 들여간 사재(私財)가 있는가? 하였는데, 반드시 이를 기록하여 주었을 것이다. 세상에 어찌 권세가 붙좇아 종처럼 굽실거리는 비굴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 정직한 도리로 임금을 섬겨 할 말을 다하여 극력 간(諫)하는 선비가 될 수 있겠는가?
그 글의 내용을 보면 오로지 한마디 말이라도 준엄하게 하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한 가지 잘못이라도 혹시 빠뜨릴까 염려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특이하게 드러내고자 안간힘을 썼으니, 비록 하고 싶은 것이 눈앞에 있다고 해도 믿는 데가 있지 않고서는 절대로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 통분스러운 일이다. 이때를 당하여 이현필의 눈에는 단지 한 번 급제(及第)하는 것만 보였을 뿐이고 임금이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송인명이 동류를 끌어들이기에 급급하여 은밀히 마음을 써서 직언(直言)을 칭탁하여 선발함으로써 일세(一世)의 입을 막은 것은 그 정상이 이현필보다 더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도 시론(時論)을 붙좇아 아첨하는 무리들이 앞다투어 일어나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어찌 직언한 것 때문에 죄를 받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틈을 엿보고 있던 한편의 무리들은 날뛰며 서로 축하하면서 또 이를 이용하여 경알(傾軋)하려 하였으며, 또 일종의 향원(鄕愿)8575) 들은 의논하기를, 이현필의 마음은 가증스럽지만, 만약 이로 인하여 죄를 받는다면 숨김 없이 다 말하게 하는 문을 여는 방법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과연 참으로 정직한 선비가 있다고 한다면, 어찌 권문의 압객(押客)이 등과(登科)를 훔치려다가 죄를 얻은 일 때문에 드디어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이 저지당할 것이겠는가? 더구나 인심이 날로 패멸되고 강상이 날로 무너지는 때를 당하여 진실로 분수를 범하는 일을 꺼리지 않고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성취시킨다면, 그것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상서롭지 못한 것이 되는 것이 진실로 무궁할 것이다. 그리고 임금의 마음속으로 장차 사대부들의 이른바 직언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욕망하는 것이 있어서 발설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간언을 올리는 길이 이 때문에 폐색(閉索)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국가의 폐해와 사대부들의 수욕(羞辱)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이현필에 대해서는 그 급제를 삭제시키고 죄줄 것을 청하는 것이 옳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3권 22장 B면/ 【영인본】 42책 543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정론(政論) / *가족(家族) / *군사(軍事) / *풍속-예속(禮俗) / *역사-사학(史學)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註 8565]경술년 : 1730 영조 6년. ☞ / [註 8566]국휼(國恤) : 경종비 선의 왕후(宣懿王后)가 승하한 일을 말함. ☞ / [註 8567]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 / [註 8568]경술년 : 1730 영조 6년. ☞ / [註 8569]신해년 : 1731 영조 7년. ☞ / [註 8570]종사(?斯) : 《시경(詩經)》 주남편(周南篇)의 종사장(?斯章)을 가리키는 것으로, 종사는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인데 한꺼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고 함. 곧 왕실 자손의 번영을 뜻하는 말임. ☞ / [註 8571]연매(燕?) : 매(?)는 아들을 기구(祈求)하는 것이고, 연(燕)은 양(陽)을 가려서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니, 따라서 제비가 오는 날에 이를 행하는 것을 말함. 곧 아들을 구하는 말로 쓰임. ☞ / [註 8572]주차(周遮) : 말이 많은 모양. ☞ / [註 8573]익경(翊卿) : 이현필의 자(字)이다. ☞ / [註 8574]지부(地部) : 호조(戶曹). ☞ / [註 8575]향원(鄕愿) : 시골에서 군자(君子) 소리를 듣는 위선자. ☞(www.history.go.kr 2008)
김응복[記事] : 영조실록 44권/ 영조 13년(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년) 6월 22일(기묘) 3번째 기사/ 김응복․이일제․이윤신․김상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응복(金應福)․이일제(李日?)를 승지로, 이윤신(李潤身)을 사간으로, 김상로(金尙魯)․조명리(趙明履)를 교리로, 김광세(金光世)를 부교리로, 김상중(金尙重)을 수찬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윤순(尹淳)을 우참찬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서명빈(徐命彬)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어유기(魚有琦)를 북병사(北兵事)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16장 A면/ 【영인본】 42책 55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8)
김응복[記事] : 영조실록 44권/ 영조 13년(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년) 7월 27일(계축) 4번째 기사/ 정이검의 상소를 논핵하는 윤급의 상소. 조상경․박사정․김응복이 인혐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윤급(尹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이검의 상소는 명의(名義)에 죄지은 자를 두둔하여 말뜻이 방자하였으며, 그 중에도 이름이 죄적[丹書]에 실려 있는 자를 신설(伸雪)하도록 힘써 청했다는 등의 말을 홀연히 끌어들여 임금의 귀를 의심하고 어지럽게 하였으며, 선류(善類)를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는 계책을 삼았으니, 그 또한 교묘하고 참혹합니다. 대저 양신(兩臣)8700) 을 신설(伸雪)하는 의논이 진실로 대의를 밝히고 국시(國是)를 바로잡는 뜻에서 나왔다면, 돌아보건대, 오늘날 징토(徵討)하는 의논에 무슨 관계가 되기에 이에 감히 끌어다 말하여, 한편으로는 난역을 비호하는 상소를 곡진히 해명(解明)하고 한편으로는 조정에 있는 신하를 널리 무함하였는데, 양신(兩臣)을 죄주려는 것이 마침 대리(代理)8701) 를 원수로 여기는 데로 돌아가기에 족하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무엄하고 절패(絶悖)한 정상은 생각건대, 성상의 밝은 감식(鑑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몇해 전에 진신(搢紳)들의 상소하는 말석에 따라서 참여하여 간략하게 억울함을 펴도록 하는 청을 진달하였는데, 어찌 그 말이 족히 분변할 것이 없다고 해서 스스로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하였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상경(趙尙絅)․참의(參議) 박사정(朴師正)․승지 김응복(金應福)이 일찍이 진신들의 상소에 참여하였다고 하여 소를 올려 인혐(引嫌)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어제도 비답(批答)을 하지 않았다. 만약 즉시 계문하지 않았다면 그 어찌 이것으로써 지나치게 고집할 것이 있겠는가? 그 대거(對擧)한 바도 혹은 본사(本事)에 맞지 않아서 비답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자기 주장만 고집하는 것이겠는가?하고, 모두 도로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20장 A면/ 【영인본】 42책 557면/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註 8700]양신(兩臣) : 이건명․조태채. ☞ / [註 8701]대리(代理) : 경종 원년(1721)에 영조를 세제(世弟)로 세워 대리 청정하게 하려던 것을 가리킴. ☞(www.history.go.kr 2008)
김응복[記事] : 영조실록 45권/ 영조 13년(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년) 8월 8일(갑자) 4번째 기사/ 김응복․신만이 하교의 환수를 청하나, 임금이 편당을 질책하면서 응하지 않다/ 승지(承旨)의 입시를 명하니, 김응복(金應福)과 신만(申晩)이 소매에서 하교(下敎)를 꺼내어 환수하기를 힘껏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하교는 실로 조화(調和)시키려는 뜻이 아니요 장차 팔방으로 하여금 오늘날 임금이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건저 대리(建儲代理)의 일은 갑진년8726) 이전에는 말할 수 있었거니와 오늘날에는 인신(人臣)의 분의(分義)로 보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때 조태구(趙泰耈)를 따라와 굽실거리며 사례(謝禮)한 것이 이상하였었다. 이번 대고(大誥)를 내린 후에 진신(搢紳)으로 상소한 여러 신하들은 마땅히 즉시 금오(金吾)에 달려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분부를 기다려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편안히 있으니 되겠는가? 태아검(太阿劍)8727) 내 손에 있으니, 내가 또한 죽일 수가 있다. 편당(偏黨)이 필봉(筆鋒)으로 사람을 괴롭힘이 창이나 칼로 하는 것보다 더 심하다. 조현명이 아니라면 그 누가 디시 이목(耳目)이 될 것이며, 김성탁을 다시 신문(訊問)할 단서가 어디에 있겠는가? 지난번 장전(帳殿)에서 이미 부호하고 억제하는 조짐을 보았었다. 김약로(金若魯)의 상소에, 만약 김성탁을 죽인다면 해결될 것이다.고 하였으니, 아주 무상(無狀)하다. 어찌 임금에게 살륙(殺戮)을 권하겠는가? 임금의 솜씨가 교활(巧滑)하면 어렵게 된다.하니, 김응복이 힘껏 환수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은 하나인데 신하는 셋으로 나뉘었으니, 장차 어느 임금을 섬기려 하는가? 옛날에는 단지 서인(西人)․남인(南人)의 당(黨)만 있었는데, 지금은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도 부족하여 또 청(淸)․탁(濁), 완(緩)․준(峻)의 구별이 있고, 또 영인(嶺人)을 이끌어 당을 삼는 데에 이르렀다.하니, 신만(申晩) 등이 힘껏 환수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들을 잘못 기르는 것은 아비의 잘못이요, 신하로 하여금 무상하게 하는 것은 임금의 허물이다. 강한 신하에게 견제를 받아 감선(減膳)하기에 이르렀으니, 후세에 반드시 나를 나약하다고 비난할 것이나 또 내가 스스로 반성하는 고심(苦心)을 볼 것이니, 강한 신하의 손아귀에 들어 한갓 그의 농락을 받는 것보다는 조금 나을 것이다.하니, 신만 등이 굳이 청하기를 그치지 않아 거의 밤중에 이르게 되었다. 임금이 두 승지를 특체(特遞)하고 남소(南所)8728) 의 위장(衛將) 윤간(尹侃)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았다. 김응복과 신만이 물러 나오니, 강일규(姜一珪)․이익정(李益炡)으로 대신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4책 45권 4장 B면/ 【영인본】 42책 560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변란-정변(政變) /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 *식생활(食生活)/ [註 8726]갑진년 : 1724 경종 4년. ☞ / [註 8727]태아검(太阿劍) : 명검(名劍)의 이름. ☞ / [註 8728]남소(南所) : 사소(四所)의 하나. 용양위(龍?衛). ☞(www.history.go.kr 2008)
김응복[記事] :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5월 1일(임진) 5번째 기사/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의 건의에 따라 선조의 피난 어가 비용을 댄 강서 사람 김후손을 증직하다/ 특별히 강서(江西) 사람 김후손(金厚孫)에게 승정원 좌승지․사옹원 부제조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가 강서 현령 유언육(兪彦?)의 첩정에 의거해 치계하기를, 《강서읍지(江西邑誌)》에 이르기를 고을 사람 김후손은 부잣집이었다. 만력(萬曆) 임진년에 선조 대왕이 용만(龍灣)에 머물러 있다가 계사년 6월 10일에 영유(永柔)에서 본현으로 행행하여 그 해 8월 10일에야 거가가 서울로 돌아가니, 그 기간은 꼭 두달이었다. 전쟁을 치른 끝이라 고을의 물력이 바닥이 나서 수라를 마련할 길이 없었는데, 후손이 직접 어주(御廚)의 책임을 지고서 자기 집 재산을 기울여, 60일 동안 삼궁(三宮)의 어공(御供)과 거가를 호종한 여러 신료들의 접대에 드는 비용을 모두 혼자서 감당하였다. 남자들은 등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서 10리 밖까지 계속 쌀을 날랐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집앞으로 건너다닌 시내를 가리켜 천도천(千渡川)이라 이름하였다. 하였고, 그의 후손 김응복(金應福)이 편찬한 가승(家乘)에는 이르기를 강서현의 아사(衙舍)의 옛 이름은 혜선당(惠鮮堂)이었는데, 선조 대왕께서 머물러 계실 때에 동낙헌(同樂軒)이라 명명하였다. 이 당시 호종했던 신하로 찬획사(贊劃使) 이시발(李時發)과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이 서문과 시를 지어 새겨서 걸었고, 그 뒤에 동악(同岳) 이안눌(李安訥)과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화답시를 지어 걸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김후손이 일심으로 충성을 다하여 60일 동안 접대를 한 일은 한 때 임금을 호종한 노고의 정도 뿐만이 아니니, 국가에서 옛 공을 기념하고 후인을 권장하는 도리에 있어 포증(褒贈)의 은전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하니, 상이 그 장계를 예조에 내렸는데, 예조가 의당 증직의 은전을 내려야 한다고 아뢰자, 상이 의례적인 증직으로는 그의 충성을 보답할 수 없다고 여기어 특명으로 좌승지 겸 사옹원 부제조를 초증(招贈)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의 행적을 작은 빗돌에 기록하여 천도천 가에 세워서, 원근에서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표창한 본의를 모두 알게 하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33장 A면/ 【영인본】 46책 386면/ 【분류】 *인사(人事) / *재정(財政) / *왕실(王室)(www.history.go.kr 2008)
김응복[記事] : 순조실록 10권/ 순조 7년(1807 정묘 / 청 가경(嘉慶) 12년) 11월 30일(정묘) 2번째 기사/ 예조에서 고 부사 조계명의 증직을 청하다/ 예조에서 도(道)의 조사로 인해 삼가(三嘉)의 고(故) 부사(府使) 조계명(趙繼明)을 증직(贈職)할 것을 청하였다. 조계명은 문정공(文貞公) 조식(曹植)의 종손(從孫)으로서 왜변(倭變)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이 있었다. 또 효자인 영광(靈光)의 고 사인(士人) 김윤각(金允恪)과 고부(古阜)의 이익제(李翊濟), 순창(淳昌)의 김중후(金重?)를 증직하고, 김중후의 아들인 김응복(金應福)과 낙안(樂安)의 사인 박양덕(朴亮德)에게 급복(給復)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8장 B면/ 【영인본】 47책 595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 *재정-역(役)(www.history.go.kr 2008)
김응복[記事] : 순조실록 28권/ 순조 27년(1827 정해 / 청 도광(道光) 7년) 3월 14일(기축) 1번째 기사/ 지평 한식림이 진달한 글 중에 망발한 것으로 파직하다/ 승정원에서 계달하기를, 지평 한식림(韓植林)이 진달한 글이 승정원에 도착하였는데, 대신(大臣) 조태억(趙泰億)의 건백(建白)이라는 귀절이 있었습니다. 조태억이 저지른 범죄가 어떤 것이고, 그 죄명이 어떤 것인데, 주달하는 내용에 그의 관직과 성명을 거침없이 쓴 것은 만번 놀라운 일입니다. 그 원본은 방금 물리쳐 보내었습니다마는, 엄중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명령을 내려 그 원본인 글을 받아 들이라고 하령하였다. 그 글의 대략에 이르기를, 함흥(咸興)에 있는 증 판서(贈判書) 유응수(柳應秀)의 창의사(彰義祠)와 영흥(永興)에 있는 증 판서 김응복(金應福)의 정충사(精忠祠)와 경성(鏡城)에 있는 증 지평 이붕수(李鵬壽)의 창렬사(彰烈祠)는 이미 은액(恩額)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길주(吉州)의 명천사(溟川祠)는 적개 공신(敵愾功臣) 효장공(孝莊公) 허유례(許惟禮)의 사우(祠宇)인데, 허유례는 저 멀리 광묘(光廟) 정해년5025) 이시애(李施愛)의 역란(逆亂) 때 사옹원 별좌(司饔院別坐)로 있으면서 서울에 있다가 그 아비가 역적에게 붙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가겠다고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적은 이미 험준한 지세를 점령하고 있어 그 형세를 당할 수 없었으므로, 허유례는 곧바로 역적의 진중에 들어가서 간곡한 말로 유인하여 그 아비를 풀어주게 하였습니다. 경성(鏡城) 운왜원(雲倭院)에 이르러 기묘한 계책으로써 역적이 술에 취하여 조는 틈을 이용하여 장막의 새끼줄을 끊어 그를 덮어씌우고 이어 결박하여 베어 죽였습니다. 그리하여 큰 난리가 평정되고 승전 소식을 아뢰자, 그를 길성군(吉城君)으로 봉하고 옥새(玉璽)를 찍은 문서로 그 훌륭함을 포창하기를, 이미 그 아비를 죽을 땅에서 탈출시키고 또 나에게 반역(叛逆)한 자를 대적하여 난리를 평정한 그 절개는 충효(忠孝)를 모두 보전(保全)하였다.하였는데, 영묘(英廟) 정미년5026) 에, 대신 조태억의 건백(建白)에 의하여 판서를 증직하였고 효장으로 시호를 내렸습니다. 임진년5027) 왜군이 침입하였을 때에는 허유례의 증손 허진(許珍)과 현손 허대성(許大成)이 적과 싸우다 죽음으로써 순절(殉節)하였으며, 갑자년5028) 에 이괄(李适)의 변란에는 허유례의 5대손 허수민(許秀敏)과 6대손 허성일(許誠一)이 훈적(勳籍)에 이름이 실렸으니, 그들의 정충(貞忠)이 대대로 두드러져서 임금의 포상이 여러번 내렸습니다. 숙묘(肅廟) 기해년5029) 에 원우(院宇)를 훼철(毁撤)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길성군의 사우는 그 공이 사직을 보존하는데 있다고 하여 특명으로 그냥 두었습니다. 포장(褒獎)의 융숭함은 마땅히 유감스러울 것이 없으나 은액(恩額)을 아직까지 내리지 않았으니 흠전(欠典)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신은 생각건대 특별히 사액(賜額)하는 은전을 시행하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요즈음에 들어서 감시(監試)5030) 때마다 재산이 많고 무식(無識)한 무리들이 과시(科試)에 함부로 부정 합격을 하고, 빈한한 집안의 재주 있는 선비들은 거의 낙방하고 말으니, 학문을 일으키고 배양하는 도리에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올 가을 본도(本道) 식년 과시(式年科試)의 출방(出榜)할 때를 기다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면시(面試)로 취재(取才)하여 회시(會試)5031) 에 응시하게 하고, 문필(文筆)이 보잘것 없는 자는 군대에 보충시켜 징계하게 하소서. 북관(北關)은 땅이 기름져서 곡식이 천하고, 남관(南關)은 땅이 메말라서 곡식이 귀합니다. 이리하여 혹 흉년을 당하게 되면 북쪽의 곡식을 남쪽에 옮겨다가 구제하는데 이는 진실로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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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