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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59-20:신처수(1740.3.12제수-동년5.2하직-1740.11.23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8.06.25 20:43:07

  예천고을원 159-20 : 신처수(1740.3.12제수, 동년.5.2하직-1740.11.23이임) : 과거에 장원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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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로가 아뢰기를, 󰡒이것이 신의 의견입니다.󰡓하고, 판의금 김동필(金東弼)과 동의금 김시형(金始炯)은 아뢰기를, 󰡒이관후는 끝내 실정을 숨기고 있고, 또 의심스런 단서가 많습니다. 당초에 사주한 사람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옥체(獄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하고, 수찬 조상명(趙尙命), 장령 이중경(李重庚), 헌납 윤득징(尹得徵)도 모두 쟁집(爭執)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법을 집행하는 사람의 말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지만, 왕자(王者)가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원정(原情)에 의거하여 정죄(定罪)해야 하는 것이다. 이관후를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도록 하라.󰡓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허추의 공사(供辭)는 꾸며낸 말이 많으니 매우 간사하다. 그러나 부도한 말을 조신들도 모두 깨닫지 못했었는데, 어떻게 유독 허추만이 알았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가 말한 것에 대해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노중련전(魯仲連傳)을 상고해 보았더니 󰡐문자는 좋지 않다.󰡑고 하였으니, 좋지 않은 문자를 쓰는 것은 인신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옥사를 성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배윤명이 이미 무함임을 자복했으니, 지금 국문하는 것은 지엽(枝葉) 가운데 지엽인 것이다. 허추를 방송(放送)시키도록 하라.󰡓하였는데, 김재로가 말하기를, 󰡒완전히 석방시켜서는 안 됩니다.󰡓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국문하는 일을 이미 마무리 하였으니, 이시희도 마땅히 방송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는 종파(宗派)인데, 어떻게 남인(南人)서인(西人)의 색목(色目) 가운데 부침(浮沈)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돌이켜 보면 조심스럽고 걱정스럽다.[自反而?]󰡑라는 다섯 글자를 이관후의 소장 내용에서 지우고 고친 것은 극도로 음참한 일이었다. 이를 엄중히 조처하지 않는다면, 뒷날에 하는 짓이 반드시 이관후보다 더할 것이다.󰡓하고, 특별히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국사(鞫事)에 의거 죄주지 않았는데, 종파라는 것 때문에 가죄(加罪)한다면 처분이 마땅하지 못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시희가 망측한 소장의 내용을 지우고 고쳐서 일세(一世)의 눈을 속이려 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는가? 그러나 정배시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하니 삭직(削職)시키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김시형(金始炯)이 인하여 진계(進戒)하기를, 󰡒배윤명이 감히 흉계를 품은 것은 실로 조정이 존엄하지 못한 소치이니, 상하(上下)가 마땅히 더욱 힘써 칙려(飭勵)해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태백산사고본32424B/ 영인본42512/ 분류*사법-재판(裁判) / *정론(政論)/ [8339]조보(朝報) : 승정원(承政院)에서 매일 아침 그 전날 조정에서 처리된 일들을 적어서 돌리는 일종의 관보(官報). 조지(朝紙). / [8340]대려(帶礪) : 임금이 공신(功臣)의 집안을 영구히 변치 않고 대접한다는 맹세의 말. ()나라 고조(高祖)가 봉작(封爵)한 서사(誓辭),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평지가 되도록 나라에서 영구 보존하리라.[使黃河如帶 泰山如礪 國以永存]󰡑한 데에서 나온 말. / [8341]무신년 : 1728 영조 4. / [8342]을묘년 : 1735 영조 11. / [8343]경술년 : 1730 영조 6. (www.history.go.kr 2008)

 

  신처수[記事] : 영조실록 43/ 영조 13(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 310(무술) 4번째 기사/ 현기가 이명언이하택을 무고한 것이 밝혀졌으니 이들을 죽이지는 않고 나누어 정배하다/ 이명언(李明彦)이하택(李夏宅)을 절도(絶島)에 나누어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명언이하택을 위원(渭原)에 정배했었는데, 현기(玄機)의 공초(供招)에 나오기에 이르러 본부(本部)에 명하여 잡아다가 추국(推鞫)하게 하였다. 이하택에게 신문하기를, 󰡒네가 역적의 공초에 긴요하게 나온 것이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옷속에 서찰을 숨긴 것만으로도 단안(斷案)이 되기에 충분하다. 여러 사람들의 계사(啓辭)에서 네가 역적의 괴수가 된다고 지목하여 금방 윤허했다가 즉시 정지시키는 까닭에 대악인(大惡人)이 법망을 빠져 나가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해정(海正)의 공초에 옷을 주고 유숙(留宿)하게 하여 적진(賊陣)을 왕래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모두 근거가 있는 것이니,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도록 하라.󰡓하니,

 

  이하택이 공초하기를, 󰡒신이 무신년에 무함을 받은 것은 이일좌(李日佐)의 공초에 그런 실상이 없음을 갖추 말했고,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통촉하셨으며, 옥안(獄案)이 모두 남아 있는데도 오히려 긴요하게 나왔다고 하니, ! 또한 너무합니다. 옷 속에 서찰을 숨겼다는 일은 손수 참여하여 쓰고서 연명(聯名)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그때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으나, 모두 의심스러운 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뒤 시기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의서(擬書)를 가지고 의심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옷을 주고 유숙(留宿)하게 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채지홍(蔡之洪)이 상소하기를, 󰡐2월 그믐 무렵의 새벽녘에 어떤 사람 2인이 신과 함께 유숙하였는데 옷을 벗어서 주었다.󰡑고 하면서 신의 비부(婢夫)인 해정(海正)을 증인으로 세웠습니다만, 신의 집을 하동(河東)에서 철거하여 청우(淸寓)로 돌아온 것이 227일이었고 달이 작어서 다음날이 끝이었습니다. 이 하루 사이에는 비록 지친(至親)일지라도 오히려 미처 알 수가 없는 상황인데 무슨 왕래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집은 물의 남쪽인 서촌(西村)에 있고, 해정의 집은 성밑 저자 거리에 있으므로 대낮에 왕래하는 사람도 분변하여 알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이른 새벽이겠습니까? 채지홍이 또 말하기를, 󰡐집에 편안히 앉아서 역적과 왕복하였다.󰡑 했습니다만, 신은 변란(變亂)이 발생하던 날 밤에 이일제(李日?)의 집과 서로 이웃인 우사(寓舍)에서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이일제가 밤에 좀을 보내어 급히 부르기를, 󰡐성중(城中)에 적변(賊變)이 발생하였으므로 나는 지금 피하여 산으로 올라간다.󰡑 하므로, 신이 놀라 일어나 창문을 열고 보았더니, 화광(火光)이 충천하였고 온 성중이 물끓듯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잠결에 창황히 목주(木主)를 짊어지고 가족을 이끌고 짧은 홑옷을 입은 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일제와 거기서 서로 만나 두 집이 허둥지둥 오리(五里)쯤 달려가다가 서운사(棲雲寺)라는 작은 절을 찾아서 자취를 숨기게 되었고 목주(木主)는 절 뒤에 묻었습니다. 이어 이일제와 함께 낮에는 숨고 밤에는 가고 하면서 어렵게 연기(燕岐)의 산골에 당도했다가, 적변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함께 돌아왔습니다. 당시 난을 피하여 나갔던 증거는 이처럼 환합니다. 그리고 신의 고향 집에 상량(上樑)한 것이 곧 316일이었습니다. 신이 만약 통모(通謀)한 일이 있었다면, 어찌 흉적이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상량(上樑)하는 날로 잡아놓고 밤중에 피하여 달아났겠습니까? 청주(淸州)는 본래 적당(賊黨)에 대해 준엄한 고장이므로, 신에게 의심스러운 자취가 있었다면 반드시 기화(奇貨)를 얻은 것같이 여겼을 것인데, 이에 4년이 지난 뒤 비로소 산림(山林)의 사람을 빌어서 헛된 말을 만들어 내어 입증(立證)할 계책을 세우겠습니까? 고 상신 오명항(吳命恒)이 청주에 왔다가 사정을 상세히 듣고서 신의 부자(父子)를 위해 남김없이 신폭(伸暴)했던 것은 성명(聖明)께서도 반드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하였다.

 

  이명언에게 신문하기를, 󰡒너는 신하로서 섬기지 않을 마음을 품은 지 오래 되었다. 갑진년8557) 에 올린 한 소장은 이미 너무도 흉참한 것이었다.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거취를 같이하겠다고 한 말은 그 심중을 숨기기가 어렵다. 먼 변방에 귀양가 있다가 방면되었는데도 머뭇거리면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미 의심스러운 단서가 많았다. 그리고 오래 폐기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었는데도 으레 올리는 소장을 진달하지 않아서 뚜렷이 헤아릴 수 없는 의도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지난번 연신(筵臣)들이 신하의 절개가 없다는 의논을 제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부자(父子)의 이름이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고, 오랑캐의 옷을 입고 거사(擧事)하겠다는 이야기는 원래 갑자기 만들어 낸 말이 아니었으며, 서찰을 넣고 옷을 꿰맨 계책은 진실로 급박한 사태에 임하여 면하기를 도모할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너의 부자가 난만(爛慢)하게 동참한 일이 없었다면, 역적의 공초에서 끌어들이는 것이 어찌하여 이렇게 낭자하겠는가? 그리고 조세추(曹世樞)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말을 바꾸지 않은 것이 더욱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지금 현기(玄機)의 공초 내용에 무신년에 법망에서 누락된 적승(賊僧) 최학(最學)이 현기의 사승(師僧) 법훈(法訓)과 금강암(金剛菴)에 함께 거처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또 약과(藥果)를 만들어 너의 적소(謫所)에 보냈다고 하였으며, 너의 종 석남(石男)이 너의 서찰을 가지고 4, 5차례 왔었으며, 학승(學僧)이 소주(燒酒)건잠(乾蠶)약환(藥丸) 세 개를 사서 보내면서 이어 석남과 함께 같이 위원(渭原)으로 갔었다고 했다. 이런 전후 정절(情節)에 대해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라.󰡓하니, 이명언이 공초하기를, 󰡒신하로서 섬기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무슨 일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인신(人臣)으로서 이런 말을 들으니 곧바로 가슴을 갈라서 밝히고 싶은 심정이나 할 수가 없습니다. 갑진년 겨울에 올린 한 소장은 스스로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말하면서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에 붙인 데 불과합니다. 역적 김일경과 거취를 함께 하겠다고 한 말은 무신년 겨울 신이 공초에서 남김없이 변파(卞破)한 것이 국안(鞫案)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귀양에서 방면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은 것과 으레 올리는 소장을 진달하지 않은 일은 신이 정미년8558) 가을에 다행히 은유(恩宥)를 받았으나 그때 대간이 상소하여 배척하기를, 󰡐3년 동안 찬적(竄謫)시킨 것으로는 속죄(贖罪)하기에 부족하다.󰡑고 했으므로, 감히 갑자기 돌아오지 못하고 두어 달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동말(冬末)에 이르러 변무(卞誣) 때문에 부사(副使)로 특별히 서용하고 역말을 보내어 불렀을 적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의(私義)를 가지고 소장을 진달할 경우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친다는 의리가 아닐 듯하여 감히 소장을 진달하지 못하고, 일을 끝내고 돌아온 뒤를 기다리려 했었는데, 이것이 도리어 죄가 될 줄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연신(筵臣)이 신하의 절개가 없다고 한 말은 사람들이 전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신이 사진(仕進)하지 않은 한 조항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물러가게 해주기를 청한 것은 선조(先朝) 때 있었고, 갑진년8559) 사복(嗣服)한 처음에는 신이 잇따라 도헌(都憲)으로 있었고, 또 산릉(山陵)의 역사(役事) 때문에 조정에 나아갔으며, 일을 끝마치고 복명(復命)하고서야 비로소 진소(陳疏)하고 물러갔었습니다만, 대계(臺啓)가 이미 뒤따라 발론(發論)되었던 것입니다. 부자(父子)가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에 나온 것은 또한 무신년의 공초에서 이미 상세히 변해하였습니다. 오랑캐의 옷을 입고 거사하겠다고 한 말은 당초 조세추가 공초하기를, 󰡐부사(副使) 이가(李哥)가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사성(李思晟)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같이 오기로 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평안도의 군사를 오랑캐의 옷으로 입혀 꾸며서 오려 했다.󰡑 하였는데, 이른바 오랑캐의 옷이란 곧 역적 이사성의 흉도(凶圖)를 가리킨 것으로 신과는 전혀 서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성상의 하교에 󰡐옥하관(玉河館)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의주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했으니, 오랑캐 옷을 입혀 거사하려고 했다는 말이 과연 이치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금부 당상이 신을 잡아오기를 청했을 적에 입시했던 대신들이 말하기를, 󰡐이미 조세추에게 형신을 가하도록 명하여 그것이 무고(誣告)라는 공초를 받아내었으니, 이제 와서 잡아오기를 청하는 것은 국체(國體)에 어긋난 처사입니다.󰡑 하였고, 성상께서도 하교하기를, 󰡐진실로 그렇게 해야 거의 일세(一世)의 의혹을 모두 없애게 될 것이다.󰡑 했는데, 대신(臺臣)이 이에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은 무엇을 근거하여 발론한 것입니까? 옷에 서찰을 넣고 꿰맸다고 한 일에 이르러서는 신의 아들 이하택 한 사람이 스스로 변해할 것이 아니니, 이미 연명(聯名)하여 이를 한 사람이 있고 또 중간에서 전한 사람이 있는 것은 물론, 당초에 의서(擬書)를 올린 날 성상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자, 모두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통렬히 변해하였습니다. 대신들도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의심스럽다고 할 수 없으니 잡아온 도사(都事)가 소홀히 하였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했습니다. 당시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의심스럽다고 하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말입니까? 이른바 현기(玄機)법훈(法訓)학수좌(學首座) 등 이러한 흉악한 중들에 대해 신은 그들이 어떠한 흉적(凶賊)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신의 노자(奴子)에는 원래 석남(石男)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없으므로, 도사(都事)가 신이 위원군(渭原郡)에 바친 호적(戶籍)을 조사하여 보고도 끝내 비슷한 명자(名字)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이에 대노(代奴)를 잡아가지고 온 것입니다. 국옥(鞫獄)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따라서 그 사람이 없으면 중지해야 옳은 것인데, 대노(代奴)를 대신 수금(囚禁)한 것은 진실로 이미 의혹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원인(援引)한 석남(石男)이라는 사람이 이미 죄명(罪名)을 벗어났으니, 이른바, 󰡐가죽이 없는데 털을 어디에 붙일 수 있겠느냐?󰡑는 격이 된 것입니다. 지난번 대신(臺臣)이 신을 황진기(黃振起)의 족척(族戚)이기 때문에 압록강 일대의 지역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천청(天聽)을 공동(恐動)시키기를 거의 급서(急書)를 올리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만일 성명(聖明)께서 깊이 살피지 않으셨더라면 신은 이미 고문(拷問)에 의해 죽었을 것입니다.󰡓하였다.

 

  다시 이명언에게 신문하기를, 󰡒앞의 공초에서 역적 김일경이 거취를 함께 하려 했다는 말을 무신년의 공초에서 남김없이 변파(卞破)했다고 하였으나, 공초한 내용이 모호하여 끝내 분명히 이해할 수가 없다.

 

  갑진년에 올린 한 소장은 지의(旨意)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범연하게 말을 끝까지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사(意思)인가? 무신년에 이르러서는 정의련(鄭宜璉)조세추(曹世樞)이시훈(李時薰)의 공초에 너의 이름이 나온 것이 이렇게 낭자하였다. 이시훈은 장상(將相)과 여러 재신들을 무고한 것을 곧 자복했으나 너에 대해서는 끝내 내용을 바꾸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공초에서, 󰡐성상께서 형신을 가하여 무고(誣告)했다는 공초를 받아내라는 하교가 있었다.󰡑고 했으나, 그때 조세추는 처음부터 무고임을 자복한 말이 없었으니, 이것은 모두 네가 억지로 꾸며서 만들어 낸 말이다.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라.󰡓하니, 이명언이 공초하기를, 󰡒신이 무함을 받은 것은 본디 본말(本末)이 있습니다. 신의 부자(父子)가 함께 대륙(大戮)의 지경에 빠지게 되자, 원한을 품고 있던 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시기를 이용하여 돌을 던졌기 때문에 박멸당할 화()가 단지 종이 한 장 사이였으나 남다른 은수(恩數)를 베풀어 억울함을 환히 씻어 주셨습니다. 기유년8560) 에 작처(酌處)하셨을 적에 특별히 환배(還配)시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만, 유사(有司)가 극력 쟁론하였던 탓으로 억지로 윤허하는 것을 면치 못했습니다. 당일 성교(聖敎), 󰡐그 사이가 얼마쯤 되는가?󰡑 한 말이 있었으므로, 외간에서 망령되이 오래지 않아 마땅히 사유(赦宥)받을 것이라고 전하였기 때문에 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시기와 의심이 점점 깊어졌던 것입니다. 신처수(申處洙)가 다시 전계(前啓)를 발론하자, 소장을 잇따라 올려 구무(構誣)하여 마지않았습니다마는, 3년 동안 윤허를 아끼셨습니다. 따라서 천청(天廳)이 더욱 아득해졌기 때문에 시의(時議)가 특별한 안건을 얽어내었고 초야(草野)와 대각(臺閣)에서 농간을 부려 화응(和應)하여 해정(海正)3차에 걸쳐 엄중히 신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끝내 그런 사실(事實)이 없었습니다. 지난 을묘년8561) 신의 부자에 대한 대계(臺啓)의 비답에 매양 정론(停論)하기를 바라는 뜻을 보였기 때문에, 이석신(李碩臣)이 또 근거 없는 말을 가지고 발계(發啓)하였으며, 흉악하고 간교한 중이 또한 시상(時象)을 알고서 또 급변(急變)을 올렸으니, 스스로 늙어서 죽지 못하고 이런 한없는 치욕을 받게 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역적 김일경이 거취를 함께 하겠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무신년의 공초에서 이미 환히 변해하였습니다. 신이 만부(灣府)8562) 에 있었을 때 보내었던 서찰에서도 취미(臭味)가 같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혹 함께 요석(僚席)에 나란히 있기도 했었습니다만, 대소의 언의(言議)를 반드시 구차스럽게 함께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가 금당(禁堂)으로 있었을 적에 김시발(金時發)이 죄인의 여서(?)라는 것으로 멋대로 전지(傳旨)를 저지시키고 승복하기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곧바로 먼저 처단하려 했으므로 신이 유사(有司)의 직책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환수(還收)할 것을 청했었습니다. 따라서 역적 김일경의 의논과는 아주 같지 않았습니다. 갑진년 대상(大喪) 때 산릉(山陵)을 정하면서 김일경은 신릉(新陵)을 주장하였고, 신은 영릉(寧陵)의 구강(舊岡)을 주장했었는데, 과연 미견(微見)을 빈전(殯殿)에서 진달했다가 마침내 엄중한 하교를 받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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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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