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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61-4:이명곤(1746.5.14제수-동년6.24하직-1747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8.08.08 17:53:14

  예천고을원 161-4 : 이명곤(1746.5.14제수, 동년.6.24하직-1747이임) : 감천 사람 조원승 과거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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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곤[記事] : 영조실록 39/ 영조 10(1734 갑인 / 청 옹정(雍正) 12) 1010(임자) 1번째 기사/ 춘당대에 친림하여 문과와 무과의 합격자를 뽑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여 유생을 시험 보여 이명곤(李明坤) 5인을 뽑았고, 무과(武科)는 김의숙(金義淑) 50인을 뽑았다. 그리고 군병이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입격(入格)한 자는 복제(服制)를 마치기를 기다려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고, 무예(武藝)가 월등한 사람은 혹은 가자(加資)하기도 하고, 혹은 수령(守令)이나 변장(邊將)을 차등이 있게 임명하였다. 급제한 자를 창방(唱榜)하고 진하(陳賀)할 때는 백관(百官)이 우중(雨中)에 서 있었는데, 4품 이상의 관원이 조복(朝服)을 입지 않은 자가 많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정자(程子)의 문하(門下)에서 설중(雪中)에 서 있던7751) 뜻을 알지 못하는가?󰡓하고, 이방 승지(吏房承旨)와 예방 승지(禮訪承旨) 및 압반 감찰(押班監察)을 추고 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29399B/ 영인본42456/ 분류*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 / *군사-병법(兵法) / *사법-탄핵(彈劾)/ [7751]정자(程子)의 문하(門下)에서 설중(雪中)에 서 있던 : ()나라의 유작(游酢)양시(楊時)가 정이(?)를 처음 찾아가 뵈었을 대 정이가 눈을 감고 명상(瞑想)에 잠겨 있으므로, 두 사람은 곁에 시립(侍立)하여 날이 저물도록 기다렸는데, 정이가 물러가라고 명하였을 때에는 문밖에 눈이 석 자[]나 쌓였었다는 고사(故事). (www.history.go.kr 2008)

 

  이명곤[記事] : 영조실록 40/ 영조 11(1735 을묘 / 청 옹정(雍正) 13) 613(신사) 1번째 기사/ 권업김상석이명곤신만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업(?)을 동지 정사(冬至正使), 김상석(金相奭)을 검상(檢詳)으로, 이명곤(李明坤)을 정언으로, 신만(申晩)을 교리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304033A/ 영인본42480/ 분류*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8)

 

  이명곤[記事] : 영조실록 40/ 영조 11(1735 을묘 / 청 옹정(雍正) 13) 1123(무오) 1번째 기사/ 궁중 화목과 원자의 덕성 진작, 근시와 액례, 언로의 넓힘 등에 대한 이석표의 만언소/ 지평 이석표(李錫杓)가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함열 현감(咸悅縣監)에 보임하였는데, 그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부임하게 하였다. 이석표는 판서 이인엽(李寅燁)의 손자였는데, 그 아비 이하곤(李夏坤)은 포의(布衣)로서 문장에 능하여 훌륭한 명망이 있었다. 이석표도 또한 일찍이 명성을 지고 연달아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차례 대간의 자리에 들어갔으나 한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사람들은 혹시 그가 순묵(循黙)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만언소(萬言疏)를 올려서 임금의 결점과 사폐(時弊)를 극언(極言)하였는데, 절실하고 곧아서 아무런 숨김이 없었다. 그 절목에 말하기를, 󰡒첫째, 궁중(宮中)을 화목하게 하여 거룩한 교화(敎化)를 독실하게 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후궁(後宮)에 대하여 총애하는 것이 지나치게 융숭하여 상사(賞賜)를 너무 자주 행하는데, 상사가 너무 잦으면 사람들의 마음과 뜻이 사치스러워지고 은총이 지나치게 융숭하면 권세가 무거워집니다. 사치하는 마음으로써 무거운 권세를 의지하게 되면 포주(?)의 교훈7980) 을 삼가 지켜 밤을 당하여 시침(侍寢)하는 기롱(譏弄)을 범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둘째, 원자(元子)를 가르쳐서 덕성(德性)을 길러야 합니다. 원자가 새로 탄생하신 초기에 금화(錦靴)와 문관(紋冠)을 만들어 들여오게 하셨는데, 이것은 검소하고 질박한 것을 숭상하여 후사(後嗣)에게 평안함을 남겨주는 모책(謀策)이 아니니, 지난날 대신들이 절약하라고 청한 것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셋째, 근시(近侍)와 액례(掖隷)를 억눌러서 내전(內殿)을 엄숙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액례가 교만하고 방자한데도, 언제나 용서와 보호를 받아서 점차 변하여 약원(藥院)의 일까지 빚어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요구하는 것은 청죽(靑竹)에 그쳤지마는 청죽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우황(牛黃)에 이르게 되며, 우황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인삼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모욕을 당한 자는 장무(掌務)에 그쳤지마는 장무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제조(提調)에 이르게 되며, 제조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대신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넷째, 여러 신하들을 분별하여서 그 직임(職任)을 정선(精選)하여야 합니다. 전하의 병통은 직언(直言)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시기 때문에 윤순(尹淳)이 절수(折受)하는 일을 말하였다가 왕지를 거스렸으며, 이종성(李宗城)이 귀주(貴主)의 제택(第宅)에 관한 일 때문에 왕지를 거스렸던 것입니다. 전하의 뜻을 거스린 자가 이와 같으니, 전하께서 좋아하는 바는 그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유(李瑜)는 비밀히 상소하여 성상의 은총을 받았고, 윤혜교(尹惠敎)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관직(館職)을 보존하였던 것입니다. 저들 귀척 대신(貴戚大臣)들이 4년 동안 낭묘(廊廟)의 자리를 차지하여 조처를 시행한 것이 어떤 시책이었으며, 3(三晝) 동안 궁궐[厦氈]에 머물면서 건백(建白)한 것이 어떤 일이었습니까? 전각(殿閣)에 오르면 한마음으로 왕명을 받들고 순종하기를 거의 왕규(王珪)의 삼지 재상(三旨宰相)7981) 과 같으며, 논박을 당하면 잠깐 물러갔다가 도로 출사(出仕)하는 것은 또한 유면화(劉綿花)와 비슷하였습니다. 교활한 역관(譯官)을 시켜 권문(權門)을 초치하였고 어리석은 아들을 시켜 뇌물을 받았으며, 심지어 궁방(宮房)의 재목까지도 손수 물목(物目)을 써 주었고, 해당 창고의 월름(?)에 있어서도 몸소 두량(斗量)을 점검하여 일들이 지극히 자질구레했으니, 장차 어떻게 백료(百僚)들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안으로는 귀주(貴主)의 정분(情分)에 이끌리고 밖으로는 도위(都尉)의 안면(顔面)에 구애되어 잠정적으로 얽매어 두는 것인데, 마땅히 예로써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 언로(言路)를 넓히고 선비의 기풍을 장려해야 합니다. 대각(臺閣)에서 입을 다물고 묵묵히 말을 하지 않는 폐단은 군상(君上)께서 간언(諫言)을 채용하지 아니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태중(李台重)의 상소에 대하여 큰소리로 꾸짖은 것은 온전히 그 체모(體貌)를 잃어버렸고, 김상로(金尙魯)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한 말은 더욱 실언(失言)하였으며, 이종성(李宗城)처럼 극언하면서 논란하기를 다한 자에 대해서 혹은 비웃기도 하고 혹은 조롱하기도 하여 칭찬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헐뜯는 것 같기도 하였으니, 그 전사옹(田舍翁)을 죽일 뜻7982) 이 이미 싹트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염치(廉恥)를 권장하여 명분과 절개를 높여야 합니다. 지금의 문사(文士)들은 하나같이 돈을 사랑하고 작위(爵位)를 사랑하는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영관(瀛館)의 자리는 죽어도 회피하면서 전랑(銓郞)의 자리는 즉시 취임하고, 해조는 극력 사양하면서 홀로 이조 참의의 자리에 나오며, 제조(提調)는 부탁하여 도모할 자리가 아닌데도 재상이 친히 절간(折簡)을 보내고,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은 넘겨다볼 수 있는 직위(職位)가 아닌데도 명관(名官)들이 자주 찾아와전조(銓曹)의 자리가 다 해어질 지경입니다.

 

  여름철의 부채와 겨울철의 책력은 그 수량이 많은지 적은지를 비교하여 헤아리고 삭봉(朔俸)과 세궤(?)는 그 물량의 풍부한지 부족한지를 견주어 참량(參量)해서, 혹은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러서도 여러 곤임(?)들에게 절간을 보내어 친히 혼인과 영향에서 쓰이는 물품들을 토색질하기도 하며, 혹은 몸이 전조의 자리에 있으면서 무신의 수령을 임명하여 보낼 적에 가격이 싼 말을 후하게 값을 받고 팔아먹기도 합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사람을 쓰실 때에 그 작록(爵祿)을 사랑하는 자들을 물리치시고 그 작록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나아오게 하며, 그 의리를 사랑하는 자들을 승진시키고 재리(財利)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치신다면, 세상에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이재(李縡)10년 동안 산림(山林)에 있었고 김진상(金鎭商)은 젊은 나이에 편안하게 은퇴하였으니, 마땅히 이들을 더욱 포장하여 잠깐 벼슬길에 나왔다가 잠깐 물러가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소서. 일곱째, 사치를 없애고 검소한 덕을 밝혀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복어(服御)에 대하여 천박하고 누추한 것을 혐의스러워 하지 아니하시지만, 후궁(後宮)들 사이에서는 기라(綺羅)로써 어지럽게 사치하고 있습니다. 그 공봉(供奉)하는 데에 있어서도 전하께서는 소박(素朴)하고 검소함을 수치스러워하지 아니하시지만 귀주(貴主)의 집에서는 진수 성찬이 끊이지 아니하니, 이것은 특히 바깥으로 검소하고 질박한 뜻을 보여 여러 아랫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가리려는 데에 지나지 아니할 따름입니다. 통탄할 만한 것은 겨우 조정의 사적(仕籍)에 오르기만 하면 거개 조랑말을 타고,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오르면 문득 강가에 정자(亭子)를 세웁니다. 진신(搢紳)의 부류(部類)들이 위에서 참람한 짓을 하니, 여항(閭巷)의 사이에서 갑자기 서로 이를 본받습니다. 여덟째, 기강을 진작(振作)하여 퇴패한 풍속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왕옥(王獄)에서 지레 풀려 나온 학사(學士)는 그 죄가 고신(告身)7983) 을 거두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과장(科場)에서 간계를 쓴 유생(儒生)은 그 형벌이 겨우 한 차례 형신(刑訊)하는 데에 그쳤습니다. 해조의 아관(亞官)은 음직 당상(蔭職堂上)을 돌아가면서 차정(差定)하는 자리가 되었고, 대간(臺諫)의 청선(淸選)은 시임 재상들이 생색(生色)을 내는 자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호남호서 지방의 번임(藩任)은 중요한 직임인데도 천박하고 어리석은 자제들을 외람되게 등용하였고, 낭서(郞署)의 자리는 현질(顯秩)인데도 시골 출신의 평범한 무리들을 구차스럽게 보충하였습니다. 송문상(宋文相)의 탐오한 장물죄(贓物罪)도 또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결과로 돌아갔고, 이하택(李夏宅)의 역절(逆節)을 아직도 밝게 핵실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신(武臣)들의 교만한 습성은 점차 제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애당초 총관(摠管)을 제수하면 문득 사직하는 소를 올리고, 한 번 시망(試望)에 들어가면 언제나 패소(牌召)를 어기니, 윗사람을 능멸하고 아랫사람에게 오만한 태도는 문관(文官)보다도 심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어찌 정중부(鄭仲夫)7984) 의 전철을 다시 밟는 데에 이르지 아니하겠습니까?󰡓하였다.

 

  처음에 󰡐임금의 덕이 점차 처음과 같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이르기를, 󰡒한 사람의 몸이 판연히 둘로 갈라지는 것과 같고, 한 사람의 말이 마치 두 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하였고, 끝에 마음을 바루어 병폐를 제거하는 근본을 삼으라고 하였으며, 동중서(董仲舒)󰡐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서 조정(朝廷)을 바로잡으라.󰡑는 말과 주자(朱子)󰡐일만 가지 일이 임금의 한 마음에 근본한다.󰡑는 말로써 결말(結末)을 지었다. 말단에 또 말하기를, 󰡒무신들이 전에 이미 전하께 아첨하는 말을 올렸고 종신(宗臣)들도 지난번에 또 대비전[東朝]에 아첨하는 말을 올렸는데, 일후에 무신에게서 나온 것이 문신에게서도 나오지 않으며, 대비전에 아첨하는 자들이 전하께도 아첨하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행여나 이와 같은 마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한 번 흔들린다면 대본(大本)과 대원(大原)이 바른 데로 돌아가는 그러한 날이 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나이 젊은 신진(新進)이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숨김 없이 말하여 실상(實狀)에 지나친 바가 있으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상소의 원장(原章)을 궁중에 머물러 두라. 내 자신에 허물이 없으면 더욱 힘쓸 것이요, 허물이 있으면 맹성(猛省)하겠다. 영상[首揆]의 일에 이르러서는 미세한 일들을 모조리 주워 모아서 대신의 허물을 들추어 내었는데, 이것이 과연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는가?󰡓하였다. 그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소대(召對)를 열었는데, 그 상소가 들어가자 즉시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영상(領相)을 돈유(敦諭)하였다. 또 유시를 내리기를, 󰡒문언박(文彦博)은 현명한 상신이었고 당개(唐介)는 바른 말을 하는 신하였는데, 문언박은 특별히 영주(英州)에 보임(補任)하였고 당개는 별가(別駕)에 제수7985) 하여 황문(黃門)7986) 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으니, 대개 특별히 보임한 것은 대신을 공경하였기 때문이고, 호송한 것은 바른 말을 하는 신하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석표(李錫杓)가 진술한 말은 모두가 간절하고 곧으니, 대신을 배척한 한 가지 일로써 그를 싫어할 수가 있겠는가? 오직 그가 앞서지도 아니하고 뒤서지도 아니하여 관리들을 승진시켜 제배(除拜)하는 때에 경알(傾軋)하였으니,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그가 조정의 체모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를 신칙하기만 하고 포장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이석표를 함열 혐감에 제수하고, 특별히 역마(驛馬)를 타고 가도록 하여서 내가 나라의 체모를 중하게 여기고 바른 말을 하는 신하를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하였다. 처음에 이석표의 봉장(封章)은 그대로 쌓아둔 지 본래 오래 되었는데 조목별로 기록한 내용이 많았다. 장차 상소문을 정서(淨書)하기에 미쳐 󰡐당파의 습성을 깨뜨리자󰡑는 한 가지 조목은 뽑아 버렸다. 그리고 이미 그 상소가 궁중에 들어가자, 그는 스스로 무거운 견책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서신으로 그의 숙부 이명곤(李明坤)에게 고별하고, 또 그 원초(原草)를 보내어서 이것을 비밀히 간직하도록 하였다.

 

  이명곤이 그때 영월 부사(寧越府使)로 있었는데, 상소의 원본을 궁중에 머물러 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경솔히 도백(道伯)에게 이것을 보였기 때문에 드디어 널리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송징계(宋徵啓)와 조최수(趙最壽) 등이 인혐(引嫌)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임금이 상소 중에는 그 내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을 금지시켰다. 󰡐당파의 습성을 깨뜨려서 실효를 꾀하자󰡑는 한 가지 조문은 비록 예람(睿覽)을 거치지 아니하였으나, 이미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으므로, 사관(史官)이 이것을 추후하여 기록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생각하건대, 전하의 탕평책(蕩平策)은 아직도 미흡하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쓸 때에는 반드시 노(老少) 양당에서 천거하게 하여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자 하고, 간언을 들을 때에는 일찍이 그 옳은지 그른지를 분별하지 아니하며, 형벌과 상사(賞賜)를 자신의 임의로 하지 못하고,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도 스스로 주관하지 못하여 일단의 의견이 오로지 일을 미봉(彌縫)하는 데에 있으니, 비록 당파를 깨뜨리고자 하더라도 진실로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선왕조 때에 망명(亡命)한 사람들을 죄가 있다고 이른다면 마땅히 죽여야 하고 죄가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석방하여야 하는데, 처음에는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여 두었다가 나중에는 곧 양이(量移)하며, 평생토록 의지하고 기대는 신하에게는 그 은총이 악수(握手)하는 데에까지 미치고 그 포상이 해를 꿰뚫을 만큼 지극하지만, 그들이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빨리 치사(致仕)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전하께서 형벌과 상사를 과연 스스로 임의로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수원(柳壽垣)의 학식이 어찌 송징계(宋徵啓)만 못하여 홀로 영선(瀛選)에서 누락되었고, 오광운(吾光運)의 문한(文翰)이 또한 어찌 조최수(趙最壽)에 미치지 못해서 국자감(國子監)의 의망(擬望)에 통과되지 못했으며, 홍경보(洪景輔)의 재주와 명망이 어찌 유복명(柳復明)보다 못해서 도리어 번임(藩任)의 제수에 저지되었고, 홍정명(洪廷命)의 주벌(冑閥)이 어찌 박치문(朴致文)에 비교가 되지 않겠습니까마는 대성(臺省)의 의망(擬望)에 아직도 저지되었으니, 전하께서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을 스스로 주장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또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파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말하기를, 󰡒홍성보(洪聖輔)윤광천(尹光天)처럼 이익을 좋아하고 수치를 모르는 무리들은 진실로 족히 말할 것도 없지만, 곧 평일에 고담 준론(高談峻論)을 하며 스스로 청탁을 분별한다는 자들도 또한 때에 따라서 변화하니, 홍성보의 무리와 더불어 오십 보 백 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저 김일경(金一鏡)이 역적질한 것이 우리 편의 결백함에 무슨 허물이 되겠으며 저쪽 편의 더러움에 무슨 신선함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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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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