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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65-17 : 김유행(1754.3.22제수, 동년.4.22하직-1756.4.13이후 체차) : 용궁 장안사 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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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행 [記事] : 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1757 정축 / 청 건륭(乾隆) 22년) 10월 6일(을축) 3번째 기사/ 김유행을 체차하여 이최중으로 대신케 하고, 이조 참의 조명정을 파직시키다/ 삼척 부사(三陟府使) 김유행(金由行)을 특별히 체차(遞差)하고, 이조 참의 조명정(趙明鼎)을 파직하였다. 임금이 사조(辭朝)하는 수령(守令)들을 소견하였는데, 삼척 부사 김유행의 차례가 되어서 임금이 그의 이력(履歷)을 물으니, 김유행이 대답하기를, 신이 홍산 현감(鴻山縣監)이 되었다가 공산 판관(公山判官)으로 승직되었는데, 전하께서 온천(溫泉)에 거둥하시었을 때를 당하여 연풍 현감(延豊縣監)을 정산 좌수(定山座首)로 오인(誤認)하고 꺼둘러 내렸다가 드디어 그 죄로 파직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뒤에 또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가 두적(斗?)의 일로써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아 잡아다 파직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으로서 이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칠사(七事)14108) 를 물으니, 김유행이 또 잘못 대답하였다. 삼척의 일은 어떠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전관(前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마는 대개 듣자니, 온 경내(境內) 백성을 수탈(收奪)하여 뼈만 남았다고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요즈음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여 수령들을 제대로 골라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삼척 부사 김유행은 홍산에서 기한도 되지 않았는데 공산으로 체승(遞陞)하였고 두적의 부정을 범하였는데 대사령(大赦令)으로 인하여 탕척(蕩滌)되었으며, 작년에 감률(勘律)하고는 올해에 또 승직시키었으니, 법(法)은 장차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경오년14109) 의 일은 또한 과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 기품(氣稟)의 정조(精粗)는 이미 알 만하였다. 알고도 효유하지 않는다면 삼척의 백성은 무슨 죄인가? 그 직책을 특별히 체차하도록 하라. 정관(政官)으로서 칙교(飭敎)를 따르지 않았으니, 이조 참의 조명정은 파직시키고, 전 승지(承旨) 이최중(李最中)을 삼척 부사로 특별히 제수하게 하라.하였다.
대개 김유행은 경오년에 온천에 거둥할 때를 당하여 공주 판관으로서 행재소(行在所)에 갔었다. 수령들이 있는 반열(班列)을 걸어서 지나는데 융복(戎服)을 입은 자가 앉아서 일어나지 않자, 김유행이 취하여 정산 좌수로 생각하고 아래로 내려가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웃으며 응하지 않자, 김유행은 성이 나서 관예(官隷)를 시켜 꺼두르면서 물었는데 그는 바로 연풍 현감이었으니,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감사(監司)가 드디어 김유행을 계파(啓罷)하고 아울러 연풍 현감도 파직시켰는데, 욕을 당하고 체통을 손상시켰기 때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19장 A면/ 【영인본】 43책 664면/ 【분류】 *인사(人事) / *재정(財政) / *사법(司法) / *행정(行政)/ [註 14108]칠사(七事) : 수령(守令)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 즉 농상의 번성[農桑盛], 호구의 증가[戶口增], 학교의 진흥[學校興], 군정의 정돈[軍政修], 부역의 균등[賦役均], 사송의 간략[詞訟簡], 간활의 금지[姦猾息]임. 수령 칠사(守令七事). ☞ / [註 14109]경오년 : 1750 영조 26년. ☞(www.history.go.kr 2008)
김유행 [記事]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6월 22일(계축) 5번째 기사/ 조재호와 관련하여 전 목사 김유행의 직을 추삭하다/ 전 목사(牧使) 김유행(金由行)의 직(職)을 추삭(追削)하였다. 남경용(南景容)이 공초하기를, 김유행이 죽을 때에 조재호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르기를, 장래에 대감(大監)이 반드시 당국(當國)하게 될 것이니, 여러 아들을 부탁한다.라고 하였는데, 조재호가 이를 매양 남들에게 자랑하였습니다.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31장 A면/ 【영인본】 44책 105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www.history.go.kr 2008)
김유행 : 下直,富寧府使閔百福, 醴泉郡守金/ 상위서지: 승정원일기 영조 30년/ 날짜: 1754-04-22(음)/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편년류(編年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영조 30년 4월 22일 (신축) 원본1105책/탈초본61책 (3/23) 1754년 乾隆(淸/高宗) 19년/ ○ 下直, 富寧府使閔百福, 醴泉郡守金由行, 積城縣監宋秀雍, 廢茂山萬戶崔雲?。//
김유행 : 以慶尙監司狀啓, 以醴泉郡守逋還未卽/ 상위서지: 승정원일기 영조 32년/ 날짜: 1756-04-13(음)/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편년류(編年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영조 32년 4월 13일 (경술) 원본1130책/탈초본63책 (9/12) 1756년 乾隆(淸/高宗) 21년/ ○ 以慶尙監司狀啓, 以醴泉郡守逋還未卽摘發, 惶恐待罪事, 傳于兪漢蕭曰, 勿待罪事, 回諭。//
김유행 : 丁丑十月初六日未時, 上御居廬廳,/ 상위서지: 승정원일기 영조 33년/ 날짜: 1757-10-06(음)/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편년류(編年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영조 33년 10월 6일 (을축) 원본1149책/탈초본64책 (20/20) 1757년 乾隆(淸/高宗) 22년/ ○ 丁丑十月初六日未時, 上御居廬廳, 編次人․儒臣․守令同爲入侍時, 編次人具允明, 校理尹得養, 副修撰洪景海, 左承旨金尙重, 假注書嚴璘, 記事官權穎․李東泰, 大丘府使洪益大, 三陟府使金由行, 以次進伏。尙重曰, 新除河東府使李杞齡在外, 不得入侍矣。上曰, 守令進前。由行進前, 上先問職․姓名, 次問履歷。由行曰, 臣初爲鴻山縣監四年, 陞公山判官, 以延?縣監, 誤認爲定山座首而?下之, 故罪罷矣。上曰, 此則溫幸時事也。由行曰, 其後爲醴泉郡守, 又以斗還事罪罷, 今以司僕判官, 拜是職矣。上曰, 斗還事, 因御史書啓耶? 由行曰, 因諫長任瑋論駁, 至被拿問行査, 而因赦蒙放矣。上問七事, 由行又錯亂以對。上曰, 三陟年事, 何如? 由行曰, 臣未及見前官, 而槪聞一境, 剝皮而餘骨矣。上曰, 汝在公山, 幾年而罷乎? 由行曰, 一旬之內也。上曰, 承旨書之。傳曰, 大凡近者, 公不勝外方不識何狀之人, 旣到階梯, 多年沈滯, 則或有試可乃已之道, 而非亦爲官擇人之意也。以座側不經守令文臣官案觀之, 其數?然, 以此推之, 蔭武可知。近日連見守令, 意專在於爲民, 銓官之道, 其宜?擇。噫, 三陟, 曾聞李顯重所奏, 往年甚於江陵云, 王者視民, 只爲一邑, 不顧他邑, 豈一視之道哉? 此府尤宜擇差, 而新除府使金由行, 鴻山未準期, 遽陞公山, 可謂爲官擇人乎? 犯其斗還, 其亦不治, 則幸因赦而蕩滌, 昨年勘律, 今歲又陞, 若此, 法將何施, 亦何以爲民擇人? 庚午之事, 事已往矣, 亦云?也, 而氣稟精粗, 業已知矣, 而今日七事, 其亦無異, 此時三陟, 誠爲難也, 旣知不諭, 陟民何辜? 三陟府使特遞。噫, 吏議知其爲人, 其欲用焉, 而昨於靑山, 惜其檢擬, 今者三陟, 大可非矣。守令賜對方殷, 三昨亦爲入侍, 而爲人擇官, 此而不飭, 他何懲?。吏曹參議趙明鼎, 罷職。又傳曰, 左右相入侍事, 遣史官傳諭。又傳曰, 吏曹判書李成中, 申飭, 已行矣。放送入侍, 大丘府使洪益大進伏。上曰, 此乃洪益三之兄益大也。汝懲崔景興, 努力善爲之, ?無陳荒之弊。益大曰, 敢不奉承聖敎乎? 仍命退出。上曰, 俄見益大, 思其兄, 甚可惜矣。其人有懷無隱, 且有公心。?原君, 則常斥其過, 而予知其公矣。承旨書之。傳曰, 故參判洪益三, 有懷無隱, 執心以公, 其知熟矣, 已作古人, 尙用思焉。其子待?服, 卽爲調用, 以?予獎公之意。上曰, 外人則必以予爲見益大而如是, 予則有所感而爲之矣? 趙明鼎, 柔善太過, 於安邊事, 已慨然矣。尹學東, 似可優爲, 而不免爲人擇官, 銓官如是則難矣。予異於年少名官, 下直守令, 分付勿赴甚迫切, 故不爲之矣。今於三陟事, 不得已處分, 以此見之, 則予之氣猶不衰矣。尙重曰, 雖不如是下敎, 人臣豈敢專爲偏私乎? 上曰, 伯程子所謂熙寧事, 吾黨激成者, 的論也。辛․壬以後, 一倂防塞, 豈無憤激之心乎? 此所以有志賊權奸滿朝之說也。然以?․壽垣事觀之, 亦非出於朝廷之所激, 此則不可知也。尙重曰, 此則專由於黨心矣。上曰, 我國人以偏論爲滋味, 承旨前所謂世人見朝紙, 而無偏論事, 則便覺無滋味者, 誠然矣。尙重曰, 入此諸臣, 皆無物我之心, 此乃眞箇滋味也。上曰, 外入之滋味, 尤以爲好矣。景海曰, 一世之陷於黨久矣。若非殿下導率, 何以見今日之世道乎? 自漢已有之一黨字, 到今痛破, 豈非大幸乎? 尙重曰, 果如儒臣之言, 舊有恩怨之人, 今多有解釋之效矣。
上曰, 向見可貴事矣。洪景海之外祖, 遭李宇夏之慘駁, 而景海稱道李延德, 故尹得養爲言之矣。尙重曰, 此莫非殿下州載苦心陶成建極之功也。景海曰, 殿下不如是, 則豈有此效乎? 莫非殿下之功也。上曰, 劉琨有言曰, 此偶然爾, 予之此事, 亦偶然矣。此實由物極必反之致也。尙重曰, 物極而善反未易, 今則咸歸于正, 可謂善反矣。膏?之疾, 必用大承氣湯而後, 始愈矣。上曰, 乙亥事, 可謂大承氣也。景海曰, 苦心導率, 用不息之功, 以至於此矣。
上曰, 去河北賊易云者, 唐文宗事也。唐宗則退托而已, 予則幸不至於養成矣。景海曰, 諸臣在陶句之內, 殿下處以無心。上曰, 一朝豁然, 是諸臣之功也。尙重曰, 會其有極, 使之歸極, 非殿下之功乎? 上曰, 諸臣少退, 待大臣入來復入。少退復入時, 左議政金尙魯, 右議政申晩入侍。尙魯曰, 近日日候乖常, 聖體若何? 上曰, 一樣矣。尙魯曰, 寒夜殿坐, 恐致傷損矣。上曰, 國事可悶, 入睡爲難。昔嘗無夢, 近頗夢煩, 殊甚可苦, 夜接臣僚, 亦爲此耳。晩曰, 進水刺乎? 上曰, 略進矣, 晩曰, 湯劑․茶飮, 進御乎? 上曰, 不開見矣。尙魯曰, 王世子氣候, 何如? 上曰, 卽今則不問其何如矣。尙魯曰, 冑筵近不爲之, 而召對則不闕, 昨日次對罷後, 亦仍爲召對云矣。上曰, 爲之乎? 尙魯曰, 臣入來後, 見三陟特遞傳敎, 臣誠萬萬惶悚。公山時事, 非但酒失, 其時下吏輩, 故爲生事。醴泉事斗還, 雖有朝禁, 亦出於爲民之意也。三陟人心極惡, 將爲棄地, 爲今之道, 惟在擇守令。金由行雖有病痛, 實有長處, 取其所長, 與右揆相議, 擇强猛而分付於吏曹。前席失措, 未知使事, 而吏議則?昧, 此臣之罪, 非吏議之罪也。小臣則以爲三陟得人矣。上曰, 前?朴師伯, 何如人耶? 尙魯曰, 淸簡恬雅則有餘, 而彈壓不足矣。晩曰, 師伯雖介潔, 不能爲治, 左相擧此人相議, 故臣亦以爲好矣。尙魯曰, 若有酒時, 則臣豈分付乎? 由行, 方爲司僕判官, 執法特甚, 抉杻木刷馬, 塵起則猛杖?人, 故?人皆有曷喪之歎。其執法, 到處如此, 曾於殿庭, 帶入隨從, 而伏地自現, 其白直又如是矣。且甚有峻氣, 時有領敦寧之氣味。晩曰, 此乃領敦外祖金昌業之孫, 故於領敦爲四寸矣, 尙魯曰, 氣味雖如領敦, 而其猛則又過之矣。銓官以小臣之故獲罪, 心甚不安矣。上曰, 以有朴贇事故也。若然則姑試由行, 可乎? 尙魯曰, 此則臣惶恐不敢對矣。特遞雖甚惶悚, 在渠則必以爲多幸矣。上曰, 然乎? 尙魯曰, 然矣。渠必不欲往弊邑。上曰, 李顯重善治江陵矣。尙魯曰, 使顯重治三陟, 不必善爲也。上顧允明曰, 卿去時, 何如? 允明曰, 大抵人心極惡, 官令, 民不肯施, 營報, 吏不卽傳, 吏․民皆無人心矣。上曰, 人心至此乎? 然則以試顯重送之, 無妨矣。晩曰, 無踰於由行。景海曰, 臣往丹陽時, 以醴泉接界, 故聞其治法, 雖不無弊害, 而公?則一新, 逋欠則盡捧, 鞭撻吏․民, 不動一髮, 雖不可謂循良之治, 而亦可謂强猛矣。上命注書, 持入初下傳敎曰, 承旨爻周。尙魯曰, 南原曾爲弊邑, 臣爲銓長時, 以元景濂爲府使, 二年之內, 壹祛其弊, 卽今爲完邑矣。上曰, 嚴瑀, 甚可惜矣。其四寸今爲注書, 昨今使之讀書, 則聲音頗似其兄矣。其祖嚴緝, 爲判書耶? 尙魯曰然矣, 尙重曰, 其父則爲玉堂矣。上曰, 然則其父․兄弟文科也。尙魯曰, 然矣。上曰, 嚴瑀之被駁, ?矣。爲人所麾, 不能展才矣。尙魯曰, 渠嘗痛心, 羞見君上云矣。如此者, 有食報之理, 子孫必繼出矣。晩曰, 嚴瑀之爲海伯, 臣以銓長, 問政於?原, 則?原力言, 故臣果首擬矣。上曰, 以登(登)機偵探之故, ?原亦如是矣。其時再入極北, 實是難事也。上曰, 吏議終甚柔善, 尹學東之首擬安邊, 亦由此病。尙魯曰, 非安邊也, 乃慶州也。上曰, 然矣。慶州, 物衆地大, 非爲官擇人, 意在於使之便養矣。尙重曰, 以乞郡也。上曰, 然乎? 尙魯曰, 安邊則李最中首擬而未受點, 李顯重以末擬而爲之矣。上曰, 顯重優爲之。尙魯曰, 言端出, 故敢達矣。李最中屢次首擬而?點, 是偶然乎, 抑有聖意乎? 上無發落。尙魯曰, 最中可用之人也, 其人甚剛。
上曰, 最中雖剛而寬, 不如明中, 三兄弟中, 予以爲明中最勝。尙魯曰, 時中亦周通。平壤是大難治之邑, 臣久置營下而見之, 恢恢有餘矣。上曰, 最中, 甚沓沓也。尙魯曰, 以有痰病, 故外見如是矣。上曰, 不開朗矣。李顯重則隘甚, 而其心無他, 故曾有下敎, 而旋卽甄敍矣。晩曰, 此乃聖上愛臣子之心也。尙魯曰, 最中亦如是矣。晩曰, 何處得通才而用之乎? 尙魯曰, 其心一定者, 能爲國報效, 周通者則善於擧職, 規模不一, 大體惟在其人之如何? 上曰, 隘無踰於顯重, 而使之任事, 則不如此, 最中則終不如顯重也。趙明鼎前則不能然, 而近頗有公處矣。尙魯曰, 過於周便矣。晩曰, 以湖西伯雖被罪, 而聞善爲云矣。尙魯曰, 長處在周便, 而亦以周便爲病, 湖西被罪, 亦坐此病。然道臣之能使民涕泣者, 古亦罕有也。
上曰, 此事, 洪景海曾陳之矣。景海曰, 遐方之民, 不知所坐之委折, 謂監司被罪遠竄。臣之經過時, 處處屯聚, 訟其?狀, 臣每以歸奏答之, 故不欲食言, 果有大略之仰陳者矣。上曰, 俄與承旨․儒臣言矣。朝廷用人, 不爲牢塞, 則似可以革面革心, 而惟其不然, 故終使之激其心矣。然如?者, 非朝廷之故也。尙魯曰, 此等, 皆別種也。卽今則自上, 善爲鎭定, 好矣。晩曰, 左相言是矣。惟在在上者鎭定之, 如何, 尙魯曰, 如是用心, 久而不解, 則成效何可量乎? 但雖臣等之心, 亦未知其能終始不解也。明鼎事, 則實出於無他也。上曰, 金由行之坐地如此, 故人君亦疑銓官之偏右。爲人臣者, 亦不可不知矣。故相臣宋寅明, 曾言仁廟朝具某之終不除邑事, 而其名忘之矣 允明曰, 此臣之族祖具仁重也。仁廟嘗敎曰, 兒時與仁重同遊, 渠每自言, 才不能治邑, 必其自知者明, 終不落點於守令云矣。上曰, 至矣, 盛矣。洪益大末望落點, 已諭而戒之矣。若使益三爲?, 則予不必戒之矣。尙魯曰, 公則服人? 能有公心, 何患不服人, 昔諸葛亮有言曰, 吾心如稱, 不能作輕重。此可爲一生服膺之言也。如亮則非但言之而已, 實能行之, 所以爲賢也。上曰, 此所以泣李平而死廖立也。尙魯曰, 臣等苟能體此, 無一毫私意, 則何憂於用人? 只是終不能然, 故可悶。上曰, 昔日下敎, 予何敢追乎? 予則必使仁重爲太守矣, 仁重於仁廟, 爲幾寸乎? 允明曰, 仁重, 卽國舅綾安府院君第三子容之子, 容, 於臣祖宬, 爲兄弟也。仁重善於文, 出蔭路數十年, 不得一除守令矣。尙魯曰, 金得臣善文章, 而爲守令時, 臣祖以臺諫論劾之, 以爲文雅有餘, 而吏才不足云, 古則如此矣。上曰, 彈墨亦雍容, 當之者必不怒矣。得臣有文集乎? 晩曰, 有單卷文集, 名曰柏谷集, 末端自錄一生讀書之數矣。上曰, 注書出去, 問于玉堂取來。上覽柏谷集曰, 一億爲十萬乎? 讀數如此, 何以計之? 其詩亦好矣。上曰, 以親祭事有定式者, 承旨書之。傳曰, 國之所重, 祀典, 而三年之內, 與常時有異, 故雖大祭, 無七日戒․三日齋之儀, 而於散․致齋, 大享與凡祭, 無甚異同, 此非重祀典之意。以?洗推之, 大祭, 詣殿庭爲之, 凡祭, 先?洗詣庭, 可以見分輕重之義。居廬之處, 齋殿雖同, 儀節不可混, 此後大祭, 則傳香後, 仍詣齋殿, 祭畢後入, 凡祭, 朝先傳香, 祭前五刻, 詣齋殿, 祭畢後入, 則有大小之分, 禮制有節。或曰, 一闕之內, 有何早晩云, 而此則不然。三年之後, 徽寧殿祭若親行, 必也朝詣齋殿, 夜行其祀, 此則昔年已見, 其禮當然, 雖於上食, 其於躬行, 亦無??之事。令儀曹自今大享, 依此擧行, 亦載補編, 而詣齋殿之後, 一依廟社例, 侍衛諸臣, 只入直人入直, 其餘留門時入來, 而承․史, 皆直宿於近處, 禁軍亦直本處, 而留門後來待殿庭事, 定式。此後大祭獻官以下, 散齋三日, 致齋二日。而一日則直宿於本司, 一日則宿於享所, 而朔望及節祭․陵祭, 散齋二日, 致齋一日事, 亦載補編。上曰, 散齋之散字, 奇矣。人之誠意, 可見於散齋, 散齋乃人所不知, 所獨知之處也。予於潛邸時, 受誓後, 出行道中, 則心常悚懼, 恐遇不潔事故也。十九歲, 求差獻官, 時年雖少, 猶能知祭享之至重, 卒事而歸解衣, 然後心始降矣。傳敎書畢後, 尙魯曰, 致祭於此殿, 亦好矣。靜攝中離次經夜, 可悶矣。上曰, 予則不難, 而諸臣之經夜, 似難矣。晩曰, 自上旣離次, 如臣等??之身, 一夜露處, 何足煩聖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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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