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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75-5 : 심풍지(1779.6.13제수-1780.6.22이임) : 형조 판서에 까지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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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께서 남강로를 처분하신 일은 이담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탕평과(蕩?科) 뒤에도 감히 동(東)․서(西)라는 말을 하는 자에 있어서는 반드시 큰 처분을 하려고 한다.라고 하교하셨었는데, 마침 남강로의 일이 생겼기 때문에 진실로 하신 말씀대로 실천하려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계의 상소 가운데 이런 의논이 없을 수 없다.라고 하교하셨다는 말에 있어서는, 그때에 내가 모시고 앉아 있었지만 원래 그런 하교가 없으셨는데, 이계가 어디에서 듣고 이렇게 말을 한 것인가?하였다. 몇 일 지나서 엉겁결에 나온 상소라고 하여 직첩을 내주고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1장 B면/ 【영인본】 44책 571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www.history.go.kr 2008)
심풍지 [記事] :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5월 5일(을해) 3번째 기사/ 정후겸을 가극하도록 하고 입시한 양사를 파직하도록 하다/ 정후겸(鄭厚謙)을 가극(加棘)하도록 명하였다. 삼사(三司)【대사헌 조덕성․대사간 임정원․집의 이중복(李重馥)․장령 윤장렬(尹長烈)과 윤재순(尹在醇)․지평 윤상동(尹尙東)․헌납 이겸빈(李謙彬)․부교리 심풍지(沈?之)․수찬 엄사만(嚴思晩)․부수찬 이병모(李秉模)이다.】에서 전계를 진달하여 정후겸의 일에 이르니, 비답하기를, 내가 윤허를 아끼는 것은 뜻이 있어서인데, 단지 찬배(竄配)만 하여 공론에 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정후겸을 그 자리에서 가극(加棘)하라.하고, 구윤명(具允明) 등의 일에 있어서 비답하기를, 구상(具庠)이 비록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기는 하지만 네 부자를 하나의 계사에 열거하는 것은 청명한 조정의 충후한 기풍에 흠이 된다. 구윤옥(具允鈺)에 있어서는 단지 구상과 차이가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번의 옥사에는 본시 관련이 없었다. 치밀하게 밝혀야 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또한 혼동할 수가 없으니, 시급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심풍지․엄사만․이병모가 아뢰기를, 탐오를 징계하는 법을 왕법에서 먼저 하는 바입니다. 홍술해(洪述海)의 일은 사계(査啓)한 것이 이미 분명하게 되어 있고 진장(眞贓)이 모두 드러났는데도, 우리 전하께서 특별히 흠휼하시는 뜻으로 사전(赦前)에 속한 것으로 쳐 법을 굽혀 가며 본율(本律)을 용서하셨습니다. 사법(司法)의 자리에서는 마땅히 쟁집하는 논계가 있어야 할 것인데, 지금 대신(大臣)은 그만 새 법으로 여기었고 대각(臺閣)에서는 입을 닫고 침묵하여 한마디 말이 없었으니, 청컨대 오늘 입시한 양사(兩司)를 모두 파직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3장 A면/ 【영인본】 44책 577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사법-법제(法制) / *변란-정변(政變)(www.history.go.kr 2008)
심풍지 [記事] :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5월 26일(병신) 2번째 기사/ 정거하여 사문을 존숭하고 빗나가는 의논을 막도록 하다/ 교리 심풍지(沈豊之)가 상소하기를,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은 곧 우리 동방의 주자(朱子)입니다. 도덕의 순수함과 사람들이 종장(宗匠)으로 삼아 추앙하고 있음이 돌아보건대 어떠했습니까? 고 판서 신(臣) 홍계희(洪啓禧)가 문정공(文正公) 신(臣) 이재(李縡)의 문하에 출입하였던 것때문에 제현(諸賢)으로 병칭하였고, 서원에 향사(享祀)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여 마치 연원이 직접 선정에게 닿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고 중신(重臣)이 입조(立朝)할 때의 본말에 있어서는 본시 공론이 있는 것인데, 한두 명의 향유(鄕儒)들이 어찌 감히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고 갑자기 이런 소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에 소유(疏儒)들의 말대로라면, 추(鄒)나라와 노(魯)나라의 장보(章甫)들이 모두 공자와 맹자에게 도통(道通)을 댈 수 있고, 낙양(洛陽)과 건양(建陽)의 제생(諸生)들도 모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게 배식(配食)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리로 헤아려볼 적에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소두(疏頭)에 대한 처분은 비록 이미 엄정하게 했습니다마는 소하(疏下)의 여러 유생들에게도 또한 경칙(警飭)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일체로 모두 정거(停擧)하여 사문(斯文)을 존숭하고 빗나가는 의논을 막아야 한다고 여깁니다.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9장 B면/ 【영인본】 44책 585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8)
심풍지 [記事] :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6월 25일(갑자) 5번째 기사/ 한익모를 삭탈 관작하고 윤태연․윤양후를 국문하라는 상소에 비답하다/ 삼사(三司)【대사헌 김재순(金載順)․대사간 심이지(沈履之)․집의 이일증(李一曾)․장령 유영진(柳榮鎭)․교리 심풍지(沈豊之)․부교리 정우순(鄭宇淳)․정언 강인(姜?)․수찬 정원시(鄭元始)이다.】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지난 겨울의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한 기틀은 지금도 뒤쫓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늠연(凜然)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진실로 국가를 체념(體念)하는 대신이 있었다면 비록 위에서 하교가 없었다 하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곧바로 대리 청정하기를 청했어야 할 것인데, 그 때에 수상(首相) 한익모(韓翼?)는 국가의 사세가 위급함을 생각하지도 않고 위의 하교가 간절하고 측은함을 체념하지도 않고서, 한갓 미봉(彌逢)하기만 일삼고 즉각 그대로 받들지 않아, 종국(宗國)의 큰 계책이 거의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게 하였기에, 진 죄가 지극히 무거워 용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볍게 죄를 감단(勘斷)한 지 얼마 안되어 작질(爵秩)이 여전한 까닭에, 놀라와하고 한탄스럽게 여기는 물정(物情)이 오래되어도 끝나지 않으니, 청컨대 판중추부사 한익모를 우선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윤태연(尹泰淵)은 본래 흉악하고 교활한 성질의 사람으로 평소에 발호(跋扈)하려는 뜻을 품고서 역적 정후겸(鄭厚謙)과 홍인한(洪麟漢)과 결탁하여 그들의 복심(腹心)과 조아(爪牙)가 되었고, 자기가 장수의 소임을 띠게 되자 낮이나 밤이나 정후겸과 홍인한의 집에 출몰(出沒)하며 종적(?跡)이 음비(陰秘)하여 세상 사람들의 지목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윤약연(尹若淵)이 감히 역적을 비호하는 꾀를 부리려고 한 것으로 보더라도, 평소에 두고두고 윤태연의 종용(慫慂)을 받아 왔음을 알 수 있는데, 몰래 홍인한을 비호하였음은 곧 위곡(委曲)하게 윤태연의 처지를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정후겸과 홍인한을 준엄하게 토죄하는 날에 당하여 음모(陰謀)를 주무해 온 실상을 구핵(究?)해 내어 해당되는 율(律)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시급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국(拿鞫)하여 준엄하게 심문하여 실정을 알아 내게 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다시 하교가 있기를 기다리라.하자, 양사(兩司)에서 아뢰기를, 윤양후(尹養厚)가 역적 정후겸과 체결하여 주무한 상항은 가리울 수 없게 낭자해졌으니, 그들의 더없이 흉악한 정절(情節)을 구핵해 내어 처단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시급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국하여 준엄하게 심문하여 통쾌하게 왕법(王法)대로 정형(正刑)하게 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다시 하교하겠다.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71장 A면/ 【영인본】 44책 596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www.history.go.kr 2008)
심풍지 [記事] :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7월 23일(임진) 2번째 기사/ 양사에서 심상운을 노적하고 홍낙임을 국문하도록 합계하나 윤허하지 않다/ 양사(兩司)【헌납 심풍지(沈豊之)․장령 고익경(高益擎)이다.】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심상운(沈翔雲)이 역적 정후겸(鄭厚謙)을 아비처럼 섬기며 그의 사주를 받아 흉서를 투정(投呈)하는 짓을 하였음은, 그 절정을 추구해 보건대 천만 음흉합니다. 신문하는 마당에 다섯 가지 조목의 단안을 그가 이미 하나하나 승복했는데도 단지 그 자신만 복주하였던 것은 실형(失刑)이 큰 것이니, 청컨대 시급히 노적(?籍)의 법을 내리소서. 홍낙임(洪樂任)은 처지가 어떠한 사람입니까? 흉악한 도당들과 결탁하여 감히 온실(溫室)의 나무 등의 말을 가지고 심상운과 난만하게 말을 주고 받는 짓을 하고 정후겸과 서로 주무(綢繆)하고 왕래하여 이름이 흉악한 무리들의 공술에 나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청컨대 잡아다가 준엄하게 국문하소서.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94장 A면/ 【영인본】 44책 607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www.history.go.kr 2008)
심풍지 [記事] :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1777 정유 / 청 건륭(乾隆) 42년) 4월 7일(임인) 1번째 기사/ 감시 어사 심풍지를 소견하고 북관의 재해 상황을 순문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감시 어사(監市御史) 심풍지(沈?之)를 소견하고 북관(北關)의 재해(災害) 상황을 순문(詢問)하였다. 이보다 앞서 함경 남도 병마 절도사 김상옥(金相玉)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북청(北靑) 등 세 고을의 경계에 지명(地名)이 천평(天坪)이라는 곳이 있는데 동서로 널리 뻗어나간 것이 거의 1백 리나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여 사는 유민(流民)이 지금 1백여 호(戶)가 되며 창고를 설치하고 조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간에 지름길이 있는데 삼수(三水)․갑산(甲山) 사람이 이 길을 경유하여 왕래하고 있으니, 의당 하나의 진(鎭)을 설치하여 요로(要路)를 차지하고 경보(警報)를 올리게 하면 유사시에 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하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명하여 그에 대한 편부를 상의하여 아뢰게 하였다. 도신은 첩첩 준령(疊疊峻嶺)이어서 매우 험저(險阻)하다고 하였고 수신은 사잇길은 평탄하다고 하여 말에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그리하여 다시 심풍지에게 감시(監市)하러 가는 길에 형편을 상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심풍지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천평의 지름길은 갑산에서 함흥(咸興)으로 통하여 나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평지(平地) 같습니다. 그러나 4월에 눈이 내리고 7월에 서리가 내리므로 백성들이 조수(鳥獸)처럼 수시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영로(嶺路)가 높고 가파른 데다가 동세(洞勢)는 깊숙하고 험하니, 수신(帥臣)이 이른바 길이 평탄하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긴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 적이 침입해 오는 길인 후치(厚峙)를 버리고 원천(元川)을 취택한다는 것은 이야말로 상리(常理)를 벗어난 것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후치와 천평 안쪽과 장령(長嶺)의 북쪽에 있는 수백 년 동안 기른 나무들을 불태우기도 하고 베어내기도 하여 보기에도 한심스러웠으니, 조정에서 의당 금칙(禁飭)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하니,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특별히 진보(鎭堡)를 설치하는 것은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는 곧 남병사(南兵使)의 관할인데, 영로(嶺路)가 막힌 것과 수목(樹木)의 벌채를 금하는 것은 모두 수신(帥臣)의 책임이니, 청컨대 엄히 신칙시키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심풍지가 또 아뢰기를, 관북(關北)은 곧 무예(武藝)를 숭상하는 지방인데 남․북관(南北關)의 무과 출신(武科出身)은 입격한 뒤에 귀속(歸屬)되는 데가 없으니, 청컨대 친기위(親騎衛)의 예(例)에 의거하여 1천 인씩 대(隊)를 만들어 감영(監營)과 남북의 병영(兵營)에 나누어 예속시켜 별친기위(別親騎衛)라고 호칭하고 매년 세 곳의 도시(都試)에서 으뜸을 차지한 사람은 북도 만호(北道萬戶)나 혹은 권관(權管)에 승차(陞差)시킨다면, 1천여 명의 용맹하고 건장한 군졸을 얻을 수 있고 격려 권면하여 수습하는 방도에도 진실로 합당할 것입니다.하니, 대신(大臣)이 어사가 논한 것이 진실로 의견이 있다는 것으로 시행하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였다. 여러 장신(將臣)들에게 두루 순문(詢問)하고 이어서 도신․수신에게 상의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행할 것을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30장 A면/ 【영인본】 44책 660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군사-관방(關防) / *호구-호구(戶口) / *구휼(救恤)(www.history.go.kr 2008)
심풍지 [記事] :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1777 정유 / 청 건륭(乾隆) 42년) 5월 6일(경오) 3번째 기사/ 가뭄을 안타깝게 여겨 도우려는 뜻으로 차서를 올린 옥당들에게 상을 내리다/ 특별히 배차(拜箚)한 옥당(玉堂)에게 상을 내렸다. 여러 옥당들이【교리 박재원(朴在源), 부교리 심염조(沈念祖)․정지검(鄭志儉), 수찬 심풍지(沈豊之)․윤상동(尹尙東), 부수찬 박우원(朴祐源) 등이다.】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삼가 일전에 내리신 비망기(備望記)를 보건대 일찰(一札)로 크게 마을을 개진하시면서 십조(十條)로 자책(自責)하였는데 경척(警?)하는 마음과 하늘에 대하는 정성이 애연(?然)히 사표(辭表)에 흘러 넘쳤으니 천심(天心)을 감동시키고 신명(神明)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성탕(成湯)이 상림(桑林)에서 자책한 것과 주(周)나라 선왕(宣王)의 운한(雲漢)723) 의 정성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또 더구나 도와주기를 청하는 하교가 집예(執藝)724) 의 반열에까지 이르렀으므로 신 등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받들어 읽노라니 감격스런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사복(嗣服)하고서부터 덕을 닦고 인(仁)을 행하는 방도에 있어 극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의당 천심(天心)을 누리고 아름다운 상서가 저절로 모여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 가뭄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재변은 헛되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참으로 성유(聖諭)와 같은 것이니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어떻게 조금인들 지완(遲緩)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하여 여러 임금들 가운데 뛰어나셨으니, 인욕(人慾)과 도덕(道德)의 분계점(分界點)과 동정(動靜) 사이에 함양하는 방도에 대해 진실로 이미 정미(精微)로운 데까지 분석하시어 긴요한 체험을 거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윤음(綸音)에서 이에 존양(存養)이 독실하지 못하고 성찰(省察)이 극진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자신을 책하는 요점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비록 성인(聖人)이 스스로 겸손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습니다만, 신은 전하께서 일부러 입언(立言)하여 고식적인 퇴탁(退托)을 일삼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반드시 스스로 살펴 실지로 그런 것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정치를 하는 방도에 이르러서는 옛사람이 반드시 치규(治規)를 세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그런 뒤라야 상하(上下)의 뜻이 안정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한갓 일에 따라 바로잡아 다스리고 접촉하는 데에 따라 끌어대어 보충하려고 한다면 혹 한때는 구차스럽게 편안할 수 있겠으나 백세(百世)에 본보기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구장(舊章)을 준행하면서 번번이 실효(實?)를 다짐하기 때문에 초원(初元)의 정사에 팔역(八域)이 감동하여 우러르니 치규(治規)에 대한 것은 또한 이미 확립되었습니다. 다만 크게 진작하고 크게 분발하여 각려(刻勵)하는 뜻을 보이고 돈박(敦朴)한 기풍을 책하는 것이 있지 않기 때문에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옛 습관을 씻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도모할 수 없게 되었으며, 아직도 안일함을 생각하고 사심(私心)을 용납하며 게으르고 구차스러움이 전일과 같습니다. 언로(言路)는 국가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인데 당직(?直)한 말이 나오지 않고, 식화(食貨)는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것인데 생식(生殖)하는 방술을 강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상(朝象)이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산림(山林)에서는 갓끈을 매고 나오는 선비가 없으며 공역(工役)은 의당 조속히 끝내야 하는데 토목 공사가 오래도록 시일을 끄는 폐단이 있습니다.
법강(法綱)이 진작되지 않고 실혜(實惠)가 아래에 미치지 않는 것이 무엇인들 뭇 신하의 허물 아님이 있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는 이를 자신의 허물로 삼으셨으니, 이는 본원(本源)을 거슬러 미루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진실로 그 이유를 따져 보면 실상은 치규(治規)의 확립이 미진한 데 연유된 것입니다. 아무 일 때문에 아무 재앙이 초치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선유(先儒)들이 진실로 천착이라고 비난했습니다만, 신도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을 발전시켜 상서로 만드는 방도는 신이 알기로는 반드시 실다운 마음으로 실다운 정치를 더욱 힘쓰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대응(對應)했는데 반응이 없는 경우는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마음에 있어서는 정일(精一)의 공부를 더욱 힘쓰시고 정치에 있어서는 치규(治規)를 확립하는 방도를 더욱 극진히 하시어 계구(戒懼)하는 마음이 동정(動靜)에 차이가 없게 하시고 퇴폐한 습속(習俗)이 모두 크게 혁신되는 데로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번 말하고 한번 침묵하는 것과 한가지 일 한가지 정령(政令)에 대해서도 모두 반성하기를, 이것이 과연 실리(實理)에 부족한 점이 없는가? 하여 부족한 점이 없다면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더욱 힘써서 순수하고도 계속되는 지경에 이르러 하늘과 그 덕이 합치되면 성의(誠意)가 감통(感通)되고 정신(精神)이 투철하여져 반드시 음양(陰陽)이 화합되고 금석(金石)을 관통시킨다면 재앙을 소멸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힘쓰소서. 신이 또 삼가 전교를 살펴보건대 방백(方伯)과 수재(守宰)로 하여금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조목별로 진달하게 하셨습니다. 아! 백성들의 질고는 또한 많습니다. 탐오한 관리가 침탈하는 것이 그대로 잘못된 규례가 되어 버리기도 하고, 우연히 요역(?役)을 가했던 것이 그대로 상부(常賦)처럼 된 것도 있으며, 군액(軍額)이 치우치게 많기도 하고, 환곡(還穀)이 고르지 않기도 한데, 이런 등류들은 각기 그 고을의 고질적인 폐단이고 그 백성들의 질고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령들이 그대로 답습하면서 변동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스러움을 원망하면서도 스스로 진달할 수 없는 것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의당 묘당(廟堂)에 명하여 특별히 행회(行會)하게 해서 각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부로(父老)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질고를 문의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해읍(該邑)의 민호(民戶)가 얼마이고 군액이 얼마이며, 전결(田結)이 얼마이고 곡수(穀數)가 얼마이며, 상공(常供)으로 상납하는 것이 얼마이고 격외(格外)로 징렴(徵斂)하는 것이 또 몇 항목의 명색(名色)이 있는가를 나열하여 기록한 다음 폐단이 되고 있는 것이 무슨 일인가를 부론(附論)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미 잘못된 규례에 관계된 것은 그것이 매우 불법(不法)한 것일지라도 자수(自首)할 것을 허락하여 숨기지 말고 일일이 도백(道伯)에게 갖추 보고하게 하며, 도백은 또 일도(一道)의 공통된 폐단을 논열하여 각 고을에서 보고한 것과 아울러 묘당에 올리게 함으로써 사실대로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전하께서 묘당의 신하들과 함께 이를 참작하여 헤아려 강구해서 견감시켜야 할 것은 견감시키고 변통시켜야 할 것은 변통시키되 요역(?役)․군정(軍丁)․환곡(還穀) 등속은 주자(朱子)가 이른바 종류대로 모아서 고르게 조절하는 법을 적용하여 편중(偏重)되는 걱정이 없게 한다면 실다운 마음을 미루어 실다운 정치를 행하는 방도에 있어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것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숨겨진 억울한 옥사(獄事)에 이르러서는 유사(有司)가 스스로 하교에 의거하여 상문(上聞)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살옥(殺獄)은 옥사 가운데서도 중한 것이어서 매장(埋葬)한 지 오랜 뒤에라도 또한 모두 파내어 검시(檢屍)하여 옥사를 완결짓는다는 법이 《무원록(無?錄)》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근래에는 파내어 검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탓으로 혹 시친(屍親)이 사사로이 화해하고 나서 곧바로 매장한 경우와 혹 사정(事情)이 오래 된 뒤에 비로소 발단된 경우에도 아울러 파내어 검시하는 법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증좌(證左)만 가지고 재판을 하게 되었으니, 옥사에 오류가 없게 하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이런 가운데 숨겨진 억울함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의당 유사에게 명하여 다시 파내어 검시하는 법을 행해야 된다고 여기고 있는데, 이 또한 실다운 정치를 하는 것 가운데의 한 가지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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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