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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76-1 : 정재원(1780.2.22제수, 동년.6.22부임-1780.12.21이임) :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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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원(丁載遠, 1730~?)은 1780년(정조 4) 6월 22일에 심풍지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같은 해 12월 21일에 이임한 예천군수 겸 안동진관 병마동첨절제사이다. 경기도 광주 사람, 자는 기백(器伯), 본관은 나주, 통덕랑 지해(志諧)의 아들, 재운(문과)․재진의 형, 약현․약전․약종․약용․약금의 아버지, 천주교 최초 영세자 이승훈의 장인, 당색은 남인이다.
부모 사후에 유학으로서 1762년(영조 38) 식년 생원시에 3등 43위로 합격하였다. 1767년(영조 43) 2월 26일 연천 현감으로서 임금의 노주례 때 그의 임금 대함이 좋아 큰사슴 가죽 1령을 하사받았다.
1780년 6월에 예천 군수로 부임하자 넷째 아들인 다산 정약용이 19세 때였으므로 아버지를 따라 예천에 와서 군청 옆에 있던 반학정에서 공부를 했고, 호명면 `선몽대기'를 지었다. 그러나 정재원은 1780년 12월 21일 영남 암행어사 이시수의 탄핵으로 예천 군수를 물러났다. 그 후 진주 목사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첫째 아들 약현(1751~?)의 자는 태현, 유학으로서 1795년(정조 19) 식년 진사시에 3등 64위로 합격하였고, 둘째 아들 약전(1758~?)의 자는 천전, 1783년(정조 7) 식년 생원시에 2등 6위로 합격하였고, 천주교 신자로 흑산도에 귀양가서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셋째 아들 약종은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하였고, 그의 아들 하상은 기해박해(1839) 때 순교하여 성인품을 받았고, 넷째 아들 약용은 1783년(정조 7) 증광 생원시에 3등 37위,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갑과 2위로 아원급제하였는데, 강진에 유배되어 「목민심서」 등을 지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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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원(丁載遠) : 1780년(정조 4) 6월 22일에 부임, 동년 12월 21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 겸 안동진관 병마동첨절제사이다. 이 때 다산(茶山) 정약용이 19세 때였으므로 정약용이 예천에 와서 관아(官衙) 옆 반학정(伴鶴亭)에서 공부했다. 1730(영조 6)-?, 광주(廣州) 사람, 자는 기백(器伯), 본관은 나주, 통덕랑(通德郞) 지해(志諧)의 아들, 재운(載運, 1739生, 字永會, 文科, 志說의 養子)ㆍ재진(載進)의 형, 약현(若鉉)ㆍ약전(若銓)ㆍ약종(若鍾)ㆍ약용(若鏞)ㆍ약금(若金)의 아버지, 천주교 최초 영세자 이승훈(李承薰)의 장인, 당색은 남인이다. 부모 사후(永感下)에 유학(幼學)으로서 1762년(영조 38) 식년 생원시에 3등 43위로 합격하였다. 학문이 넉넉했고, 1767년(영조 43) 2월 26일 연천(漣川) 현감으로서 왕의 노주례(勞酒禮) 때 그의 주대(奏對)가 임금의 뜻에 맞아 큰사슴 가죽 1령(令)을 하사받았다. 1780년(정조 4) 12월 21일 예천 군수를 이임하였고, 그 후 진주 목사를 지냈다. 첫째 아들 약현(1751生, 字太玄)은 유학(幼學)으로서 1795년(정조 19) 식년 진사시에 3등 64위로 합격하였고, 둘째 아들 약전(1758生, 字天全, <자산어보>의 著者)은 1783년(정조 7) 식년 생원시에 2등 6위로 합격하였고, 셋째 아들 약종은 신유박해(1801) 때 천주교 신자로서 순교하였다. 넷째 아들 약용(1762生, 字美庸, <牧民心書>의 著者)은 편부 슬하(嚴侍下)에서 유학으로서 1783년(정조 7) 증광 생원시에 3등 37위로 합격,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갑과 2위로 아원 급제(亞元及弟)하였다.(司馬榜目)
[茶山詩文集 第16卷 墓誌銘 庶母 金氏의 墓誌銘] : 우리 집은 본디 가난하였다. 1776년(영조 52) 봄에 아버지가 다시 벼슬하여 호조 좌랑이 되어 명례방(明禮坊)에 우거(寓居)하고, 1777년(정조 1) 가을에 화순 현감으로 나가고, 1780년(정조 4) 봄에 예천 군수로 올겨졌다가 겨울에 체직(遞職)되어 7년 동안 집에서 놀며 지냈다. 1787년(정조 11) 여름에 울산 도호부사로 나갔다가 1790년(정조 14) 겨울에 진주 목사로 옮겨져 1792년(정조 16) 여름에 임소에서 졸(卒)하였다. [上同 맏兄嫂 恭人 李氏의 墓誌銘] : 형수는 15세가 되어 백씨(伯氏)에게 시집왔다. 1780년(정조 4)에 시아버지(정재원)를 따라 예천군에 와서 돌림병을 앓다가 죽으니, 4월 5일이다. [茶山詩文集]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처음 1780년(정조 4) 가을 예천의 군사(郡舍)에서 애기 하나를 지웠다.
정재원(丁載遠) : 1780년(영조 4)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여 1781년(정조 5)에 이임하였다. 본관은 나주, 다산(茶山) 약용(若鏞)의 아버지, 천주교 순교자(天主敎殉敎者) 이승훈(李承薰)의 장인(丈人), 학문에 넉넉하고 이 때 정약용(丁若鏞)이 17세로 예천에 와서 공부하였고, 선몽대(仙夢臺)에 시를 지은 것이 남아 있다. [茶山詩文集] : 나(茶山 丁若鏞)의 아버지(丁載遠)께서는 영천 현감, 화순 현감, 예천 군수(1780년 봄에 부임하여 이 때 다산도 부인과 함께 예천에 왔다), 울산 도호부사, 진주 목사를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나는 불초하지만, 그 때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워서 다소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뒤에 수령이 되어 이를 시험해 보아서 다소 증험도 있었다. 그러나 뒤에 떠도는 몸이 되어서는 이를 쓸 곳이 없게 되었다.(茶山詩文集 第12卷 牧民心書 序). 1780년 봄 아버님께서는 영남 지방의 예천 군수로 가셨는데, 영남은 우리 나라의 추로(鄒魯)이다. (鄒魯 : 鄒 나라는 孟子의 出生地이고, 魯 나라는 孔子의 出生地이므로 孔孟의 異稱으로 鄒魯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여기서는 鄒 나라와 魯 나라 같이 聖人의 德化를 입은 地域을 意味한다.)(茶山詩文集 第17卷 墓表 曺台瑞의 墓表)
정재원(丁載遠) : 예천 군수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기백(器伯), 참의 시윤(時潤)의 현손으로, 지해(志諧)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에만 힘쓰고 재물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찌기 광주(廣州)의 세과(歲課)에 부방하였는데, 당시 광주유수 이종성(李宗城)으로부터 글의 뛰어남과 뜻의 원대함을 인정받았다. 1762년(영조 38) 생원․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제술이 영조에게 인정을 받고 곧바로 이조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뒤 참봉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780년(정조 4) 예천 군수가 되었으며, 관직은 진주 목사에 그쳤다.(正祖實錄, 樊巖集, 孫承喆(韓國學中央硏究院))
정재원 [記事] : 한국문집총간(236_495b) 번암집(樊巖集, 1824)에 실린 채제공(蔡濟恭)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通訓大夫晉州牧使丁公墓碣銘/ ...郞。仍差元陵都監郞。移引儀。陞濟用判官。丁酉。拜和順縣監。居四載。陞醴泉郡守。尋罷歸。丁未。拜司?主簿。移..."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한국문집총간(281_274b)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矗石樓?游詩序/ ...矗石樓?游詩序 上之四年春。家吾吾君移守醴泉。而外舅洪公爲慶尙右道兵馬節度使。方駐晉州。余赴醴...”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한국문집총간(281_300d)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黃州月波樓記/ ...黃州月波樓記 東國之稱月波亭者三。余得而盡見之。一在嶺南之洛東。余嘗由晉州赴 醴泉得登斯亭。然時當晝日。...”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한국문집총간(281_339d)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自撰墓誌銘/ ...意。正宗元年丁酉。先考出宰和順縣。厥明年讀書東林寺。庚子春。先考移醴泉郡。遂游晉州。至醴泉讀書廢?中。壬寅...”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한국문집총간(281_356a)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庶母金氏墓誌銘/ ...爲戶曹佐郞。僑居明禮坊。丁 酉秋。出宰和順縣。庚子春移守醴泉郡。至冬而遞。七年家食。丁未夏。復仕爲漢城...”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고전국역총서(1982 刊)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다산시문집 제1권/ 시(詩)/ 봄날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다. 화순을 떠나려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어 짓다[春日領內赴晉州 將離和順 ?然有作] 이른봄에 백씨(伯氏 : 다산의 맏형 약현若鉉)께서 내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는데 2월에 홍일보(洪日輔)가 모시고 돌아왔었다. 이 때 부친께서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전임되었으므로 나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먼저 진주로 갔다. 장인 홍공(洪公)께서 이 때 영우절도사(嶺右節度使)가 되어 진주에 계셨다” 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7 刊) 경세유표(經世遺表)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다산 정약용 연보/ ... 좋은 강학회가 다시 열릴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1780년(정조 4, 19세) 진주공이 예천군...”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고전국역총서(1982 刊)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목민심서 서(牧民心書序)/ ...을 받아, 연천 현감(漣川縣監)ㆍ화순 현감(和順縣監)ㆍ예천 군수(醴泉郡守)ㆍ울산 도호부사(蔚山都護府...” 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고전국역총서(1982 刊)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연유할 때 지은 시의 서/ ...(上 정조를 가리킴) 즉위 4년(1780) 봄에 아버지가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옮겼는데, 장인(丈...” 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고전국역총서(1980)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황주 월파루기(黃州月波樓記)/ ...의 낙동강(洛東江) 가에 있다. 내가 일찌기 진주(晉州)로부터 예천(醴泉)에 가서 이 정자에 올라간...”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고전국역총서(1982 刊)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하였다. 경자년(정조 4, 1780) 봄 선고가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옮겨...” 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고전국역총서(1982 刊)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선백씨(先伯氏) 진사공(進士公)의 묘지명/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이씨(李氏)는 경자년(정조 4, 1780)에 예천(醴泉)에서 죽으니 무덤은 ...” 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고전국역총서(1982 刊)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서모(庶母) 김씨(金氏)의 묘지명/ ...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나가고, 경자년(정조 4, 1780) 봄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옮겨졌다가...” 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전국역총서(1982 刊)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의 묘지명/ ...氏)에게 시집왔다. 경자년(정조 4, 1780)에 선군(先君 정약용의 아버지)을 따라 예천군(醴泉郡...” 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고전국역총서(1982 刊)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조태서(曺台瑞)의 묘표(墓表)/ ...으니, 하물며 사방에랴. 하였다. 3년이 지나서 아버님께서는 영남 지방의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가...” 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국역일성록 정조 04년 경자(1780) 2월 22일(신미)에 실린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정사가 있었다. ...한성 우윤으로, 손상룡(孫相龍)을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정재원(丁載遠)을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한국문집총간(281_009a)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아버지 정재원이 예천군수 부임(1780) 때 기사로, 그 내용은, “第一集詩文集第一卷○詩集/ 詩/ 春日領內赴晉州。將離和順。?然有作。早春伯氏領余室人往晉州。二月洪日輔陪還。時家君移守醴泉。余遂領內先至晉州。外舅洪公時爲嶺右節度在晉州。/ 久作湖南客。今辭竹裏亭。出門春野綠。回首曉煙靑。列岫如遮路。孤松好在庭。曺公那可忘。駐馬叩山?。”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한국문집총간(281_009c)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 부임 때 지은 기사로, 그 내용은, “第一集詩文集第一卷○詩集/ 詩/ 登陜川溪亭卽涵碧亭也。時余領內赴醴泉。四月也。/ ?閣依丹壁。澄潭界白沙。日長唯好鳥。春盡有餘花。繫馬?詩卷。呼兒遣酒家。臥看僧去處。山影任橫斜。”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한국문집총간(281_009a)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아버지 정재원이 예천군수 부임(1780) 때 기사로, 그 내용은, “第一集詩文集第一卷○詩集/ 詩/ 春日領內赴晉州。將離和順。?然有作。早春伯氏領余室人往晉州。二月洪日輔陪還。時家君移守醴泉。余遂領內先至晉州。外舅洪公時爲嶺右節度在晉州。/ 久作湖南客。今辭竹裏亭。出門春野綠。回首曉煙靑。列岫如遮路。孤松好在庭。曺公那可忘。駐馬叩山?。”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한국문집총간(281_009c)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예천군수(1780-1780) 정재원 부임 때 지은 기사로, 그 내용은, “第一集詩文集第一卷○詩集/ 詩/ 登陜川溪亭卽涵碧亭也。時余領內赴醴泉。四月也。/ ?閣依丹壁。澄潭界白沙。日長唯好鳥。春盡有餘花。繫馬?詩卷。呼兒遣酒家。臥看僧去處。山影任橫斜。”이다.(www.minchu.or.kr 2006)
정재원 [記事] : 승정원일기/ 정조 4년 2월 22일 (신미) 원본1459책/탈초본80책 (13/34) 1780년 乾隆(淸/高宗) 45년/ ○ 有政。 吏批, 判書金鍾秀在外, 參判鄭民始進, 參議朴祐源牌不進。 同副承旨趙尙鎭進啓曰, 判書金鍾秀在外, 參議朴祐源牌不進, 小臣獨政未安, 何以爲之? 敢稟。 傳曰, 仍爲之。 以兪彦鎬爲刑曹參判, 洪秀輔爲漢城右尹, 李枰爲刑曹參議, 朴海壽爲禁府都事, 孫相龍爲金海府使, 丁載遠爲醴泉郡守, 洪一源爲平安都事, 金鍾秀爲藥房提調。(www.history.go.kr 2007)
정재원 [記事] : 정조실록 10권/ 정조 4년( 1780 경자 / 청 건륭(乾隆) 45년) 12월 21일 을축 1번째기사/ 영남 암행 어사 이시수가 관리들의 부정․대구 영의 고리대업․환곡과 시노의 폐단 등으로 서계하다/ 영남 암행 어사 이시수(李時秀)가 복명(復命)하였다. 이시수와 대신․전신(銓臣)을 불러 보니, 이시수가 서계(書啓)를 올렸다. 맨 먼저 관찰사 조시준(趙時俊)이 도내 수령들의 남조(濫?)의 잘못을 금지하지 못한 것을 논핵하고, 또 김해 전 부사 손상룡(孫相龍), 남해 현감 노정윤(盧廷尹), 경주 부윤 이진익(李鎭翼), 밀양 부사 홍병은(洪秉殷), 예천 군수 정재원(丁載遠), 거창 부사 허명(許?), 단성 현감 신광요(申匡堯), 경주 영장 이윤춘(李潤春), 충주 영장 권숙(權璹), 자여 찰방(自如察訪) 정경조(鄭景祚), 유곡 찰방(幽谷察訪) 최수옹(崔粹翁) 등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상황을 말하였다. 이조와 병조에서 복주(覆奏)하니, 차등 있게 논죄하였다. 진주 전 목사 조윤정(曹允精), 성주 전 목사 남학문(南鶴聞)․이하영(李河永), 함안 군수 민유(閔游), 경주 전 부윤 심이지(沈?之), 경주 겸임 울산 전 부사 김우(金愚), 밀양 부사 홍병은(洪秉殷), 예천 겸임 풍기 군수 심중규(沈重奎), 용궁 현감 김상두(金尙斗), 안동 전 현감 윤사국(尹師國), 함창 전 현감 유한정(兪漢鼎) 등은 환곡(還穀)을 더 나누어 주거나 멋대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이포(吏逋)나 번작(反作)2425) 이 있기도 하였고 형구(刑具)가 규정을 어긴 것이 있기도 하였는데, 모두 잡아다 문초하였다. 칠원 현감 강응환(姜膺煥)은 본 현(本縣)의 마군(馬軍)을 사적으로 빌려주어 조련에 나가게 하여 또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으므로 똑같이 잡아다 문초하였다. 이 시수가 또 좌도 병마절도사 이문덕(李文德)과 우도 병마절도사 홍화보(洪和輔)의 죄상을 논핵하니, 병조판서 이성원(李性源)이 복계(覆啓)하기를, 우도 병마절도사 홍화보는 진영의 곡물을 빌려 주고 군창(軍倉)을 멋대로 풀어서 많은 값을 받기도 하고 혹은 본색(本色)으로 받기도 하면서 농간을 부린 바람에 군인과 백성이 피해를 입었고 필경에는 돈과 곡물의 이자로 취한 수량이 또 매우 많았습니다. 호궤(?饋)할 때의 끼친 폐단과 상격(賞格)의 초라함은 부차적인 일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탐욕스럽고 재물을 수탈하는 무리들은 하루라도 중대한 진영에 둘 수 없습니다. 좌도 병마절도사 이문덕은 군중(軍中)에 기생을 싣고 들어갔으니, 이것만도 해괴한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새벽에 군사를 모아 정오에 훈련장으로 나간 것으로 보더라도 군민(軍民)을 구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사를 호궤하는 떡과 상으로 주는 베도 우도 병마절도사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모두 잡아다 문초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두 병마절도사의 일은 형편이 없다만 우도 병마절도사가 범한 것은 탐욕을 부리는 관리이자 용렬한 장수라고 하겠다. 그의 죄상을 논하자면 낱낱이 열거하기 어렵다. 국법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어찌 감히 함부로 범하는 것이 이에 이르렀겠는가? 속히 잡아다가 구두의 공초를 받아 알리라. 하였다. 이시수가 또 별단을 올리기를, 1. 대구 영에서 빚을 놓기 시작한 지 이미 30여 년이 되었습니다. 남창(南倉)의 원전(元錢)은 20만 8천여 냥이었는데, 창고에 남아 있는 것은 2만 4천여 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혹은 경사(京司)에 납부하기도 하고 혹은 왜관(倭館)에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쌀로 만들기도 하고 혹은 은으로 만들기도 한 것이 또 7만여 냥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10만 7천여 냥과 감영 각 창고에 유치된 돈 7만 7천여 냥, 남창의 목면 2백여 동(同)의 대전(代錢) 1만여 냥을 합하면 19만 4천여 냥인데, 그 안에 도내 각 고을과 감영 중 각청에 빌려 준 것을 합하면 5만여 냥이나 되고, 나머지 돈 14만여 냥은 전부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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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