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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76-2 : 정재원(1780.2.22제수, 동년.6.22부임-1780.12.21이임) :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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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놓는 법에 한 냥의 이자는 2전이고 감관(監官)과 색리(色吏)에게 바치는 선물을 포함하면 3전 7푼 남짓한데, 이를 모두 합계하면 만여 냥이 됩니다. 금년에 빚을 놓았다가 1년 만에 회수하는데, 빚을 놓을 때 먼저 이자를 떼고 받을 때는 원래의 수량대로 받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비록 해마다 빚을 받고 놓지만 실제는 한번 빚이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이자돈을 사용하는 곳은 쓰지 않을 수 없는 공적인 비용이기는 하나 태반은 영부(營府) 위 아래 사람들의 사적인 비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수십여 년 동안 빚을 유체시킨 바람에 옛날에 빚을 썼던 사람들이 지금 모두 다 늙었거나 또 죽었습니다. 그래서 애당초 빚을 낸 연월도 모르는 그들의 아들이나 또는 손자들로 하여금 해마다 수납하도록 하는데, 다 갚은 뒤에 이자와 본전을 비교해 보면 또 두세 배나 됩니다. 그리고 가산이 망하여 갚지 못하면 그들의 일가 붙이에게 떠넘기고, 그 일가붙이가 상환의 능력이 부족하면 또 그들의 이웃에게 떠넘깁니다. 그러다 보면 잡아들인 죄수가 감옥에 가득하고 매를 맞는 죄인이 뜰에 꽉 차 있어서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기색과 울부짖는 소리가 촌락마다 발생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 깨끗이 탕감해 주지 않고 몇 해를 더 경과한다면 온 경내에 자리잡고 사는 백성이 장차 드물게 될 것입니다. 지난 번에 채가(蔡哥)가 올린 글은 원통함을 하소연하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무함한 말이 많이 있었으나 그 폐단을 논한다면 이러한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이와 같지 않더라도 미구에 반드시 이보다 더 심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명년부터 이자를 중지시켜야 한다고 여깁니다. 가령 10냥의 빚을 짊어진 자는 해마다 1냥씩 납부하게 하여 10년에 이르러 그 본전의 수량을 갚았을 때 빚 문서를 모아 불태움으로써 여러 해 동안 고통을 받아온 백성들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빚을 다 갚아 버린 사람이 되도록 한다면 진실로 큰 혜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영의 허다한 지출에 있어서는 한꺼번에 모조리 잃어버린다면 대신 충당할 곳이 없어서 반드시 모양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이니 도백으로 하여금 여러 군데의 용도를 절약할 수 있는 데까지 절약하게 하고, 그 중 폐지할 수 없는 것만 묘당에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1. 경주 어촌(漁村)의 폐단은 신이 암행할 때에 이미 그 대략적인 것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출도(出道)한 뒤에 떨어진 누더기 옷차림에다 누렇게 뜬 얼굴로 서로 이끌고 찾아와 울며 하소연하는 자들이 있기에 물어보았더니, 어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어촌의 사람도 백성입니다. 각자 산업에 종사하여 공물을 바친다면 비록 힘을 다 들이더라도 백성이 어찌 감히 꺼려하겠습니까? 그런데 어촌 사람들이 이렇게 극한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각처에서 정채(情債)가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어촌에서 1년 열두 달에서 매달 납부하는 것이 9종인데, 그 댓가로 받는 회감미(會減米)는 40여 석입니다. 받는 것과 납부하는 것을 비교하면 물론 걸맞지 않습니다. 어촌의 폐해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채에 있습니다. 1종을 납부할 때마다 정채의 돈이 많을 경우에는 더러 백 냥에 이르기도 합니다. 읍에서 감영에 납부하고 감영에서 서울에 납부할 때에 모두 이른바 정채라는 것이 있는데, 세 곳에 소요되는 것을 일체 어촌에서 마련하므로 해마다 증가되어 지금은 천여 냥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어촌의 사람들이 날로 뿔뿔이 흩어져 원안(元案)에는 1백 60여 명이던 것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40여 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호수가 점차 줄어들기 때문에 부역이 점차 무거워지고 부역이 갈수록 무거워지기 때문에 호수가 더욱 줄어들고 있는데, 앞으로 모두 텅텅 비고야 말 것입니다. 근래에 진상하는 어물(魚物)이 점차로 예전보다 못한 것은 오로지 이로 말미암은 것인데, 필경에는 진상을 거르는 폐단이 형세상 반드시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신이 목격한 곳은 경주 한 지역뿐입니다. 여러 도와 여러 읍 중 바닷가에 인접해 어촌이 있는 곳은 폐단이 동일하리라는 것을 이로 미루어서 알 수 있으니, 금지와 개혁을 즉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읍(營邑)의 하리와 경사(京司)의 하인들이 종전에 의레 먹던 물건을 하루아침에 모조리 없애버리면 물리치고 받아들일 때에 반드시 은밀히 조종하는 많은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지금부터 어촌에서 영읍 및 경사에 정채는 또한 창곡(倉穀)의 색락(色落)2426) 규정에 따라 간략하게 정하여, 혹시라도 분전(分錢)을 지나치게 거두어 범법하는 자가 없도록 하되, 살피지 않은 관장(官長)은 발각되는 대로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이게 어촌이 유지 보존하는 방도가 될 뿐만 아니라 막중한 진상도 궁핍하거나 구차스러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1. 본도의 환곡(還穀)이 대체로 너무 많아 아전이 농간을 부린 통에 백성이 피해를 받고 있는데, 온 도의 가운데서 거창(居昌)과 함양(咸陽) 등 두서너 고을이 특히 더 많습니다. 대개 이 두서너 고을은 산골의 궁벽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 왕래하여 변통할 길이 전혀 없으므로 장사꾼들이 들어가지 않고 영문(營門)에서 떼어주는 것이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쌓이고 쌓여서 그 호수와 곡물의 총량을 비교해 보면 거의 수십 배에 이릅니다. 과부나, 잔약한 집과 자식이 없는 늙은 사람의 집을 제외하고 법대로 나누어 이자를 칠 경우 한 호가 받은 수량이 수십 석에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연말을 당하여 받아들일 때마다 매를 때리고 독촉하여도 오직 수량대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필경에는 빈 껍질을 절반이나 섞어 구차하게 석수(石數)를 채우기까지도 하는데, 해마다 이와 같이 하다가 그릇된 관례가 되어버렸습니다. 신이 그 지역에 들어갔을 때에 백성들에게 그들이 겪고 있는 폐단을 물었더니, 여러 사람들이 똑같은 목소리로 환곡이 많다고 말하였습니다. 시험삼아 또 바로잡을 방도를 물었더니, 혹은 차차 곡식이 적은 고을로 옮기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곡식이 적은 고을은 대부분 이웃 경계를 넘어 수백 리의 밖에 있으므로 많은 고을들을 거쳐 옮길 때에 생기는 폐단이 또한 큽니다. 만일 이 고을에서 돈을 만들어 가지고 저 고을에서 곡식을 사들이고자 한다면 비록 조금 편리할 것도 같지만 일이 전환(錢還)과 동일하므로 또한 십분 편리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거나 저와 같이 하거나 간에 그 총수를 감해야만 곡식이 조금 깔끔해질 수 있고 백성이 조금 힘을 펼 수 있을 것입니다. 도백으로 하여금 묘당에 의논하여 조속히 변통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1. 시노(寺奴) 한 가지 일은 진실로 일도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이미 멀리 통촉하시고 분부까지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별도의 변통이 없이 단지 오늘날의 하는 바와 같이 한다면 비록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2427) 로 하여금 수령을 맡게 하더라도 아마도 그 폐단을 시정하고 비방을 방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지 신이 거친 여러 곳으로 말한다면 수량이 많거나 적기도 하고 폐단이 깊거나 얕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경주(慶州)․예천(醴泉)․의성(義城)․안동(安東) 등 네 고을의 수량이 가장 많았습니다. 각사(各司)와 궁방(宮房)의 노비를 합계해 보면 많은 경우에는 더러 만 명에 가까웠고 적어도 수천 명에 밑돌지 않았습니다. 늙어서 사망으로 제외된 것은 진실로 사고로 처리되어 있지만 젊은 사람들도 많이 도피하였습니다. 그래서 신공을 징수할 때에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애당초 있지도 않은 사람을 허위로 명단을 만드는가 하면 아직 뱃속에 들어있는데 이미 첨안(簽案)에다 기록하여 우두머리에게 독촉하고 이웃과 일가붙이에게까지 징수합니다. 본읍에서 시작하여 다른 지경에까지 수탈하므로 이웃 마을들이 서로 경계하여 혼인을 하지 않고 수심과 원한이 길에 가득하니, 화기(和氣)를 손상하기에 넉넉합니다. 그 이유를 자세히 구명해 보건대 대개 또한 노비는 그가 낳은 자식에 미룰 따름이고 군보(軍保)처럼 다른 사람으로 대신할 수 없는 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원래의 정원이 한번 정해지면 반드시 채우고야 마는데 각 궁방에 하사한 것은 또 감히 원래 정원의 안에서 떼어낼 수 없고 거기다가 강한 자는 온갖 수단을 써서 모면하려고 꾀하며 약한 자는 죽기로 작정하고 도망가 숨으므로 실제 숫자는 여러모로 줄어들고 있으나 한번 정한 원래의 정원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각궁과 각사에서도 원공(元貢)을 본받아 일례로 비총(比摠)하니, 시노가 날로 줄어드는 것은 오로지 이것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경주(慶州)의 하납노(下納奴) 천여 명을 양수군(良水軍)으로 일컫고 그 명목을 바꾸어 한정(閑丁)을 싸잡아 충원한 것은 부득이한 것입니다. 지금 비록 원래의 정원은 갑자기 감소시킬 수 없으나, 그 가운데 틀림없이 도망갔거나 죽었거나 어린아이나 노인으로 판명되어 의심이 없는 자는 약간 조사하여 사고로 처리하였으니, 이 뒤엔 여러 사패 노비(賜牌奴婢)들은 숫자를 대조하여 원래 정원 가운데서 떼어낸다면 조금이나마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사(有司)의 신하는 비록 경비를 걱정하지만 백성의 고통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의 체모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번 변통하는 것에 대해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본도의 소금을 무역하는 폐단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사체가 바르지 못하여 폐막이 매우 엄청납니다. 옛적에 말한 바 술의 전매나 차의 전매라는 것이 바로 이런 종류입니다. 김해(金海)의 영중에 쌀 1천 5백 석을 유치하고 소금을 사는 자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해변에 소금이 싼 지방에서 사들여다가 강가의 소금이 비싼 고을에다 팔아서 쌀 한 섬으로 소금 두 섬을 만들고 소금 두 섬으로 돈 7, 8냥을 만드는데, 심한 경우에는 더러 열 냥이 되기도 하고 또 더 초과하기도 하므로 그 이익금을 합계해 보면 항상 2만 냥 내외가 됩니다. 그 중에서 4천 5백 냥은 본전으로 세우고 4천 냥은 노비에게 급대(給代)하며 5백 냥은 남창(南倉)에 납부합니다.
이상 도합 9천 냥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외의 감고(監庫)와 색리(色吏) 무리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영고(營庫)에서 공적으로 내려오는 것도 2천 냥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대개 가장 정밀한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억지로 값을 높게 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값을 올리거나 내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또 뒤따라 개인이 장사를 하지 못하게 엄히 금지하여 반드시 관청의 소금만을 사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공적으로 파는 소금과 사적으로 파는 소금이 매양 서로 다투고 있으니, 사체만 매우 구차스러울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사적으로 파는 상인들에게 살 때에 갖가지 물화로 값을 충당하기도 하고 혹은 먼저 먹고 나서 나중에 값을 치르기도 하므로 자연 유무(有無)와 완급(緩急)이 서로 많이 보탬이 됩니다. 그러나 공적으로 파는 소금은 그렇지 않아 반드시 당장 많은 돈을 요구하는가 하면 감관과 색리의 무리들이 또 값을 낮추었다 높였다 조종하므로 매양 이 때를 당하면 강변과 산협의 백성들은 소금이 없이 밥먹는 탄식을 면치 못합니다. 자본을 만들어 놓고 나머지 이익을 취하는 것은 본래 법에 어긋나는 것이니, 마땅히 폐지하여야 합니다. 만일 노비의 신공을 충당하지 않을 수 없고 남창에 납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경우, 설사 일체 폐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시장의 공공한 가격에 따라 장사꾼들과 공동으로 판매하고 전매의 이익을 감히 억지로 결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 도에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상철이 아뢰기를, 도백의 정사 업적이 족히 볼만한 것이 있는데, 임무를 자주 교체하는 것은 또한 어찌 민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도내 수령들이 이처럼 무엄하게 국법을 함부로 범하고 있으니, 안찰(按察)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신칙하지 않은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관찰사 조시준(趙時俊)은 파직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관찰사 직책은 그 임무가 매우 중하다. 비록 자신에 검약하게 하여 법을 지킨다 하더라도 오히려 읍․진(邑鎭)을 진압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지금 조정의 금령이 매우 엄하여 신칙한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도내 수령과 변장들이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을 무려 수만 포나 마음대로 나누었단 말인가? 연전 관서의 일이 어찌 영남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법을 범하였어도 일찌기 단속하지 않아 어사의 아룀이 이와 같이 낭자하게 거론되었으니, 경미한 처벌을 하였다는 이유로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살피고 신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그 일을 허락하였는지의 여부와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를 물어서 처리해야 할 것이다. 경상도 전 관찰사 조시준을 교체시킨 뒤에 잡아다 문초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붙잡아다가 신문하여 탈고신(奪告身)2428) 1등으로 법을 적용하였다. 김상철이 또 아뢰기를, 어사의 별단에 그 첫번째는 대구 영에서 놓은 빚의 이자를 정지시키자는 일이었습니다. 본영에서 빚을 놓는 것이 백성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는 것은 진실로 논한 바와 같습니다. 대체로 남창의 본전은 전후 도백이 별도로 준비한 것으로써 비국에서 관리한 일까지 있었습니다만, 빚을 놓아 이자를 불린 것은 감영 각 창고에 수용되는 자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말 애초 변통하지 않고 지켜서 축적하였다면 마땅히 국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용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만, 만일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재물을 마련하여 끝없이 소비하고자 한다면 백성에게 한없는 폐단만 끼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을 위한 방도로는 따로 변통할 필요가 없이 도신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민간에 흩어져 있는 본전은 이자를 제외하고 점차로 받아들이고, 빚을 주는 잘못된 규례는 일체 못하게 하는 것이 근본을 부리뽑고 막는 가장 좋은 도리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칙하여 금지한 뒤에도 만일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 해당 도신에게 제서 유위(制書有違)의 율을 시행하고, 빚놓는 것을 정지한 이후에 혹시 영의 용도로 변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면 사리로 논하여 비국에 보고하여 품처하도록 하소서. 그 하나는 경주 어촌의 폐단을 금지하여 영남 영․읍(營邑)과 경사(京司)에 정채(情債)를 간략하게 정하는 일입니다. 어촌에서 진상할 때 서울과 지방에 정채(情債)의 폐단이 어찌 본도만 그러하겠습니까? 여러 도에도 반드시 모두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라 곡식의 색락(色落)과는 달라 조정에서 다과를 참작하여 정할 경우 사체를 손상할 것입니다. 이는 여러 도의 도신들이 고을마다 조사해 바로잡아 영읍의 하리들이 수탈하는 폐단을 각별히 금지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경사(京司)에서 지나치게 징수하는 것에 있어서는 발각되는 대로 비국에 보고하여 여러 관사에 엄하게 신칙한다면 거의 바로잡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 여러 도에 분부하고 도신들도 각 관사에 신칙하여 종전처럼 지나침이 없게 하소서. 그 하나는 거창․함양 등 고을의 환곡이 지나치게 많은 폐단입니다. 본부의 곡부(穀簿)가 다른 도에 비하여 가장 많습니다. 아전이 이것을 이용하여 농간을 부리므로 백성이 피해를 받는다고 한 어사의 논의가 그 실정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하겠습니다. 조정에서 차차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명령한 것은 한쪽은 너무나 많고 한쪽은 너무나 적은 폐단을 바로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만 형세상 구애된 바가 있어 일을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폐단을 제거하는 방도는, 발매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10만 석을 마땅히 발매해야 된다는 논의는 도신이 또한 묘당에 왕복 논의하였고 어사의 서계에서도 이와 같이 요청하였습니다. 도신에게 분부하되, 곡식이 가장 많아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 고을은 곡수(斛數)를 정하고 사리로 논하여 보고한 뒤에 품처하도록 하소서. 그 하나는, 본도에서 소금을 판매하여 본전을 적립해 놓고 이익을 취하는 것을 비록 일체 폐지할 수는 없으나, 시장의 값에 따라 일반 장사꾼과 같이 판매하는 일입니다. 본도의 소금을 굽는 하나의 일은 비록 그만둘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팔 때에 감관과 색리의 무리들이 오로지 이익의 독점을 일삼고 있으므로 공사간의 호칭이 각각 나뉘고 시장의 값의 높고 낮음이 같지 않아 이렇게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사단이 있는 것입니다. 저 지난 해 묘당에서도 이에 대해 경연에서 진달하여 엄하게 신칙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에 어사의 장계에도 이와 같이 논하였으니, 다시 도신에게 신칙하여 잘못된 폐단을 시정한 뒤에도 만약 다시 이렇게 백성이 원망할 경우 도신은 무거운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청컨대 이러한 내용으로 분부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 45 책 199 면/ 【분류】 *신분-천인(賤人)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군사-병참(兵站) / *재정-국용(國用) / *재정-상공(上供) / *재정-역(役) / *수산업-어업(漁業) / *수산업-염업(鹽業) / *물가-물가(物價) / *물가-수수료(手數料)/ [註 2425]번작(反作) : 조선조 때 이속(吏屬)들이 허위 문서를 작성하여 환곡(還穀)을 부정하게 출납하던 일. ☞ / [註 2426]색락(色落) : 세곡(稅穀)이나 환곡(還穀)을 받을 때에 간색(看色)이나 모자라는 쌀을 채우기 위하여 얼마쯤 가외로 더 받아들이던 곡식. 색모(色耗). ☞ / [註 2427]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 : 소신신(召信臣)은 전한(前漢) 시대의 남양 태수(南陽太守)이고, 두시(杜詩)는 후한(後漢) 시대의 남양 태수(南陽太守)임. 이 두 사람이 남양(南陽) 고을에서 모두 선정(善政)을 하였기 때문에 민간(民間)에서 말하기를 전대에는 소부(召父)가 있었고, 후대에는 두모(杜母)가 있었다고 함. ☞ / [註 2428]탈고신(奪告身) : 죄를 지은 벼슬아치의 직첩(職帖)을 빼앗아 들임. ☞ (www.history.go.kr 2007)
정재원 [記事] : 승정원일기/ 정조 4년 12월 21일 (을축) 원본1477책/탈초본80책 (18/18) 1780년 乾隆(淸/高宗) 45년/ ○ 庚子十二月二十一日辰時, 上御宣政殿。 親臨都政入侍時, 行都承旨徐浩修, 行左承旨洪檢, 行右承旨李亨逵, 左副承旨徐有防, 右副承旨金宇鎭, 同副承旨鄭志儉, 假注書李集斗․姜世鷹, 兼春秋洪光一․張顯慶, 記事官徐龍輔, 吏曹判書李衍祥, 兵曹判書李性源, 兵曹參判洪良浩, 吏曹參判鄭民始, 吏曹參議李敬養, 兵曹參議沈念祖, 參知趙時偉, 吏曹正郞徐鼎修, 兵曹正郞姜?․李顯模, 兵曹佐郞李益運․尹得孚․朴行淳․韓光植, 吏曹假郞廳金瑞復․承綸․崔大恒․孫碩周․張漢喆․吳錫齡, 以次進伏訖。 上具翼善冠․袞龍袍, 坐御榻。 上命書傳敎曰, 兩司多臺, 皆是在外, 在外臺諫竝許遞, 今日政差出。 又命書傳敎曰, 侍從堂上․堂下, 違牌坐罷人竝敍用。 上曰, 今日政府習儀, 若値殿座則, 似有?稟, 禮房承旨出去, 委折知入。 有防承命出去, 仍入奏曰, 出問禮曹該吏則以爲, 殿座時例爲?稟, 而以其預儀, 故不敢自下入?稟, 今日擧行云矣。 以親嫌改差守令, 依夏政, 竝仍任前職, 如已出代, 待後?調用事。 出榻敎 上命書傳敎曰, 從大臣之請, 所以重事體也。 爲日稍久, 罰已施矣, 宗簿寺堂郞削職人員, 竝給牒敍用, 當該中官推考事。 出榻敎 當該中官, 事過後禁推事。 出榻敎 民始大司成落點代, 浩修爲吏曹參判。 新除授吏曹參判徐浩修, 卽爲牌招, 先參政後謝恩事。 出榻敎 慶尙暗行御史李時秀復命, 卽令入侍, 時秀進伏。 上命讀書啓及別單訖。 時秀曰, 守令之治否, 民俗之弊?, 俱載啓中, 別無更奏之事矣。 上曰, 御史出去, 本職肅謝後, 與大臣偕入, 仍參政事, 可也。 時秀退出。 吏曹佐郞李時秀, 先參政後謝恩事。 出榻敎 上曰, 屢次催促, 而謂有情勢, 終不入參, 李時秀不可無警矣。 吏曹佐郞李時秀禁推事。 出榻敎 以吏曹佐都李時秀禁推傳旨, 命書傳敎曰, 分揀申飭, 卽爲參政。 上曰, 屢下飭敎, 終無入來參政之意, 宜有處分。 仍命書傳敎曰, 事無異同, 罰豈彼此? 吏曹佐郞李時秀, 延曙察訪除授, 當日辭朝, 時任察訪, 遞付京職。 浩修吏曹參判落點代, 嚴璹爲都承旨。 新除授承旨, 牌招入侍事。 出榻敎 命書傳敎曰, 承旨房仍。 大臣入侍事, 遣史官傳諭事。 出榻敎 璹進前伏, 上曰, 卿過幾年, 而今爲知申耶? 卿年亦幾何? 璹曰, 辛卯年待罪此職, 而臣年六十餘矣。 上曰, 年雖老矣, 筋力尙旺矣。 領議政金尙喆, 右議政李徽之, 入來進伏。 尙喆曰, 日間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 尙喆曰, 卽見嶺南御史李時秀書啓, 道臣政績, 有足可觀, 藩任數遞, 亦豈不悶, 而道內守令之冒犯國法, 若是其無嚴, 則按察之地, 何可免不能禁飭之罪乎? 監司趙時俊罷職, 何如? 上曰, 依爲之。 出擧條 命書傳敎曰, 旬宣之責, 爲任至重, 縱使約己守法, 尙患彈壓邑鎭。 況今朝禁至嚴, 飭墨未乾, 道內守令․邊將之留庫穀, 擅分數爻, 至於數萬包之多? 年前關西事, 豈非嶺南之已鑑, 而然有冒犯, 曾不?勘, 繡啓論列, 若是狼藉, 不可以譴罷薄勘, 仍以不論。 其在愼審之道, 宜問許與不許, 知與不知處之, 慶尙前監司趙時俊, 交龜後拿問勘處。 尙喆啓曰, 嶺南御史書啓中, 金海府戊戌條統營還穀五百餘石, 本邑則以未捧磨勘, 而該營則以已捧還錄, 尙今虛留, 仍成反作。 事旣現發, 至登繡啓, 其時帥臣, 拿問勘處, 何如?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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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