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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176-9 : 정재원(1780.2.22제수, 동년.6.22부임-1780.12.21이임) :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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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55장 A면/ 【영인본】 45책 199면/ 【분류】 *신분-천인(賤人)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군사-병참(兵站) / *재정-국용(國用) / *재정-상공(上供) / *재정-역(役) / *수산업-어업(漁業) / *수산업-염업(鹽業) / *물가-물가(物價) / *물가-수수료(手數料)/ [註 2425]번작(反作) : 조선조 때 이속(吏屬)들이 허위 문서를 작성하여 환곡(還穀)을 부정하게 출납하던 일. ☞ / [註 2426]색락(色落) : 세곡(稅穀)이나 환곡(還穀)을 받을 때에 간색(看色)이나 모자라는 쌀을 채우기 위하여 얼마쯤 가외로 더 받아들이던 곡식. 색모(色耗). ☞ / [註 2427]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 : 소신신(召信臣)은 전한(前漢) 시대의 남양 태수(南陽太守)이고, 두시(杜詩)는 후한(後漢) 시대의 남양 태수(南陽太守)임. 이 두 사람이 남양(南陽) 고을에서 모두 선정(善政)을 하였기 때문에 민간(民間)에서 말하기를 전대에는 소부(召父)가 있었고, 후대에는 두모(杜母)가 있었다고 함. ☞ / [註 2428]탈고신(奪告身) : 죄를 지은 벼슬아치의 직첩(職帖)을 빼앗아 들임. ☞(www.history.go.kr 2008)
정재원 : 영남 암행 어사 이시수가 관리들의 부정·대구 영의 고리대업·환곡과 시노의 폐단 등으로 서계하다/ 서명: 정조실록 (정조 4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780-12-21(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정조 10권, 4년(1780 경자 / 청 건륭(乾隆) 45년) 12월 21일(을축) 1번째 기사/ 영남 암행 어사 이시수가 관리들의 부정·대구 영의 고리대업·환곡과 시노의 폐단 등으로 서계하다/ 영남 암행 어사 이시수(李時秀)가 복명(復命)하였다. 이시수와 대신·전신(銓臣)을 불러 보니, 이시수가 서계(書啓)를 올렸다. 맨 먼저 관찰사 조시준(趙時俊)이 도내 수령들의 남조(濫?)의 잘못을 금지하지 못한 것을 논핵하고, 또 김해 전 부사 손상룡(孫相龍), 남해 현감 노정윤(盧廷尹), 경주 부윤 이진익(李鎭翼), 밀양 부사 홍병은(洪秉殷), 예천 군수 정재원(丁載遠), 거창 부사 허명(許?), 단성 현감 신광요(申匡堯), 경주 영장 이윤춘(李潤春), 충주 영장 권숙(權璹), 자여 찰방(自如察訪) 정경조(鄭景祚), 유곡 찰방(幽谷察訪) 최수옹(崔粹翁) 등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상황을 말하였다. 이조와 병조에서 복주(覆奏)하니, 차등 있게 논죄하였다. 진주 전 목사 조윤정(曹允精), 성주 전 목사 남학문(南鶴聞)·이하영(李河永), 함안 군수 민유(閔游), 경주 전 부윤 심이지(沈?之), 경주 겸임 울산 전 부사 김우(金愚), 밀양 부사 홍병은(洪秉殷), 예천 겸임 풍기 군수 심중규(沈重奎), 용궁 현감 김상두(金尙斗), 안동 전 현감 윤사국(尹師國), 함창 전 현감 유한정(兪漢鼎) 등은 환곡(還穀)을 더 나누어 주거나 멋대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이포(吏逋)나 번작(反作)2425) 이 있기도 하였고 형구(刑具)가 규정을 어긴 것이 있기도 하였는데, 모두 잡아다 문초하였다. 칠원 현감 강응환(姜膺煥)은 본 현(本縣)의 마군(馬軍)을 사적으로 빌려주어 조련에 나가게 하여 또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으므로 똑같이 잡아다 문초하였다. 이시수가 또 별단을 올리기를, “1. 시노(寺奴) 한 가지 일은 진실로 일도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이미 멀리 통촉하시고 분부까지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별도의 변통이 없이 단지 오늘날의 하는 바와 같이 한다면 비록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2427) 로 하여금 수령을 맡게 하더라도 아마도 그 폐단을 시정하고 비방을 방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지 신이 거친 여러 곳으로 말한다면 수량이 많거나 적기도 하고 폐단이 깊거나 얕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경주(慶州)·예천(醴泉)·의성(義城)·안동(安東) 등 네 고을의 수량이 가장 많았습니다. 각사(各司)와 궁방(宮房)의 노비를 합계해 보면 많은 경우에는 더러 만 명에 가까웠고 적어도 수천 명에 밑돌지 않았습니다. 늙어서 사망으로 제외된 것은 진실로 사고로 처리되어 있지만 젊은 사람들도 많이 도피하였습니다.
그래서 신공을 징수할 때에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애당초 있지도 않은 사람을 허위로 명단을 만드는가 하면 아직 뱃속에 들어있는데 이미 첨안(簽案)에다 기록하여 우두머리에게 독촉하고 이웃과 일가붙이에게까지 징수합니다. 본읍에서 시작하여 다른 지경에까지 수탈하므로 이웃 마을들이 서로 경계하여 혼인을 하지 않고 수심과 원한이 길에 가득하니, 화기(和氣)를 손상하기에 넉넉합니다. 그 이유를 자세히 구명해 보건대 대개 또한 노비는 그가 낳은 자식에 미룰 따름이고 군보(軍保)처럼 다른 사람으로 대신할 수 없는 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원래의 정원이 한번 정해지면 반드시 채우고야 마는데 각 궁방에 하사한 것은 또 감히 원래 정원의 안에서 떼어낼 수 없고 거기다가 강한 자는 온갖 수단을 써서 모면하려고 꾀하며 약한 자는 죽기로 작정하고 도망가 숨으므로 실제 숫자는 여러모로 줄어들고 있으나 한번 정한 원래의 정원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각궁과 각사에서도 원공(元貢)을 본받아 일례로 비총(比摠)하니, 시노가 날로 줄어드는 것은 오로지 이것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경주(慶州)의 하납노(下納奴) 천여 명을 양수군(良水軍)으로 일컫고 그 명목을 바꾸어 한정(閑丁)을 싸잡아 충원한 것은 부득이한 것입니다. 지금 비록 원래의 정원은 갑자기 감소시킬 수 없으나, 그 가운데 틀림없이 도망갔거나 죽었거나 어린아이나 노인으로 판명되어 의심이 없는 자는 약간 조사하여 사고로 처리하였으니, 이 뒤엔 여러 사패 노비(賜牌奴婢)들은 숫자를 대조하여 원래 정원 가운데서 떼어낸다면 조금이나마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사(有司)의 신하는 비록 경비를 걱정하지만 백성의 고통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의 체모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번 변통하는 것에 대해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이러한 내용으로 분부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5책 199면/ 【분류】 *신분-천인(賤人)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군사-병참(兵站) / *재정-국용(國用) / *재정-상공(上供) / *재정-역(役) / *수산업-어업(漁業) / *수산업-염업(鹽業) / *물가-물가(物價) / *물가-수수료(手數料)//
정재원 : 봄날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다. 화순을 떠나려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어 짓다[春日領內赴晉州 將離和順 ?然有作] 이른봄에 백씨(伯氏 : 다산의 맏형 약현若鉉)께서 내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는데 2월에 홍일보(洪日輔)가 모시고 돌아왔었다. 이때 부친께서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전임되었으므로 나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먼저 진주로 갔다. 장인 홍공(洪公)께서 이때 영우절도사(嶺右節度使)가 되어 진주에 계셨다/ 서명 : 茶山詩文集/ 저자 : 정약용(丁若鏞)/ 분류 : 고전국역서 > 문학 > 문집류(文集類)/ 제공 : 한국고전번역원/ 다산시문집 제1권/ 시(詩)/ 호남의 나그네로 오래 있다가 / 久作湖南客/ 이제는 대숲 정자 하직하누나 / 今辭竹裏亭/ 문 나서니 봄 들판 새파랗고요 / 出門春野綠/ 고개 돌리니 새벽 연기 푸르르구나 / 回首曉煙靑/ 늘어선 산은 마치 길을 막는 듯 / 列岫如遮路/ 외론 솔은 뜨락에 그대로 있다 / 孤松好在庭/ 정든 조공 그 어찌 잊을 수 있나 / 曺公那可忘/ 말 멈추고 산가 문 두드린다네 / 駐馬叩山?//
정재원 :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 선생의 가톨릭 세례명은 뭔가요?/ 2010.01.31/ 정재원(丁載遠)의 사남(四男)이며, 이승훈(李承薰)의 처남이다. 양근(楊根)의 마재[馬峴]에서 출생.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實學)을 집대성하였다. 178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공서파(攻西派)의...(daum 2010)
정재원 : 위인10명이여~/ 2010.01.25/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 : 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 1587~1671)의 후손이며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이다. 다산의 자는 미용(美庸), 용보(頌甫), 귀농(歸農...(daum 2010)
정재원 : 6학년 1학기 사회 71쪽~73쪽...실학자들의 주장/ 2009.05.26/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생애와 저서 정약용(丁若鏞)은 1762년(영조 38) 8월5일 경기도 광주 초부면 마현리에서 양반 가문인 정재원(丁載遠)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약용(若鏞)이고, 호는 다산(茶山)이라 하였다. 세상에서는...(daum 2010)
정재원 : 다산의 일대기(생애 )/ 2008.08.14/ 생애 1762년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의 마재(馬峴)에서 태어난 후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daum 2010)
정재원 :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의 일생/ 2009-03-31/ 아버지가 훌륭해도 아들이 출중한 인물인 경우에는 아버지는 가리워지기 마련이고, 아버지가 탁월하면 아무리 잘난 아들이라도 묻히기 마련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다름 아닌 다산의 집안입니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1730-1792)은 번암 채제공이 일대기로 기록한 「진주목사정공묘갈명」에 나타나 있듯이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였고 학문도 높았지만, 특히 이치(吏治)에 밝아 현감·군수·부사·목사 등의 5개 고을의 목민관 생활에서 훌륭한 치적을 남긴 관료였습니다. 자애롭고 통찰력 깊은 목민관이면서도 의리에 밝은 선비의 자질이 넘쳐흘렀던 분이었습니다.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정학유 형제도 대단한 선비에 학문과 식견이 높았고 시문에도 뛰어났으나 아버지의 큰 그늘에 가려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못함이 아쉽기만 합니다. 그 중에서도 다산의 아버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라도 본격적으로 거론할 필요가 요구됩니다. 실제로 다산이 그만한 학문과 사상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직접 글을 가르쳐주고 학문의 방향을 정해준 아버지였습니다. 어린 시절 글을 가르쳐준 아버지, 글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와 방향을 정확하게 일러준 가장 가까운 스승이었습니다. “다산의 덕기(德器)가 관홍하고 경전에 정미(精微)하였음은 모두 아버지의 덕택이었다”라는 다산연보의 표현처럼, 다산의 인격과 학문이 아버지에게서 나왔음을 명확히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다산이 한창 글 배우기에 물이 오른 10세 전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아버지가 집에서 본격적으로 다산을 가르쳤다는 기록에서 보듯, 다산의 학문은 아버지로부터 기본을 닦았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이 남겼건만, 다산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하여는 짧은 「선인유사(先人遺事)」라는 글 한편만 남겼습니다. 당시의 어진 선비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훌륭한 정승감이었다는 한마디로 아버지의 큰 역량을 암시하는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채제공은 「묘갈명」에서, 자신이 퇴출되어 모두가 만나기를 꺼려할 때 유일하게 자주 찾아왔으나, 다시 정승으로 조정에 들어갔을 때에는 전혀 얼굴도 보이지 않던 훌륭한 인격에 대한 칭찬을 나열했습니다. 출세에 방해가 되는 일은 의리를 위해 과감히 행하면서도 출세에 도움이 되는 일은 구차스럽게 하지 못하던 인품에 채제공은 높은 점수를 매겼던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다산 아버지에 대한 천착이 부족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제라도 다산의 「유사」와 번암의 「묘갈명」에 의거해서라도 그의 훌륭한 인격과 치적이 제대로 드러난다면 다산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석무(daum 2010)
정재원 :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의 일생/ 아버지가 훌륭해도 아들이 출중한 인물인 경우에는 아버지는 가리워지기 마련이고, 아버지가 탁월하면 아무리 잘난 아들이라도 묻히기 마련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다름 아닌 다산의 집안입니다.../ http://blog.joins.com(daum 2010)
정재원 : 다산의 부친 정재원(丁載遠)/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은 번암 채제공이 일대기로 기록한 「진주목사정공묘갈명」에 나타나 있듯이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였고 학문도 높았지만, 특히 이치(吏治)에 밝아 현감·군수·부사·목사 등의 5개 고을의 목민관.../ http://blog.naver.com(daum 2010)
정재원(丁載遠) :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후기 / 문신/ 과거 및 취재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38년 (176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13위/ [상세내용] 정재원(丁載遠)에 대하여 :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기백(器伯). 참의 시윤(時潤)의 현손으로, 지해(志諧)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에만 힘쓰고 재물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광주(廣州)의 세과(歲課)에 부방하였는데, 당시 광주유수 이종성(李宗城)으로부터 글의 뛰어남과 뜻의 원대함을 인정받았다. 1762년(영조 38) 생원·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제술이 영조에게 인정을 받고 곧바로 이조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뒤 참봉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780년(정조 4) 예천군수가 되었으며, 관직은 진주목사에 그쳤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樊巖集(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月軒先生集跋 丁載遠]/ 2007.02/ 정재원(丁載遠) | 한국고전번역원 | 命時囚 丁載遠 等照律 洪允五 等議處 2007.02/ 丁載遠|洪允五|丁載遠|閔游|沈重奎|李鎭翼|具敍五|韓光植|金致泳|李汝忠|金大采|李汝忠|金大采|洪秉殷|金復源|洪允五|洪秉殷|金復源/ 국가지식포털(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命 蔚山府使 丁載遠 待三政磨勘拿來/ 2007.02/ 丁載遠|李祖源|丁載遠/ 국가지식포털(daum 2010)
정재원(丁載遠) :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38년 (176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13위/ [인적사항] 자 기백(器伯), 생년 경술(庚戌) 1730년, 합격연령 33세, 본관 나주(羅州), 거주지 광주(廣州)/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과목 일의(一義)/ [가족사항] [부] 성명 : 정지해(丁志諧), 품계 : 통덕랑(通德郞)/ [부모구존] 영감하(永感下)/ [제] 정재운(丁載運)/ [제] 정재진(丁載進)/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정재원(丁載遠) (기백(器伯))/ 발행일 2009-04-06/ 자료소개 관련인물 :기백(器伯)|시윤(時潤)|지해(志諧)|이종성(李宗城)|영조/ 관직 :참의|광주유수|참봉|예천군수|진주목사/ 관련지역 :조선|광주(廣州)(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압해가승 서(押海家乘序)/ 압해가승은 곧 나주 정씨(羅州丁氏)의 가승(家乘). 가승은 한 집안의 역사.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편찬하였음. 기미년(1799) 가을에 지음./ 정약용(丁若鏞) | 한국고전번역원 | 2007.01.13(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정약용에 관한 내용 (4p)/ ★ 정약용 출생 ★다산 정약용은 1762년(임오년,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아버지 정재원(羅州丁氏-荷石 丁載遠)과 어머니 해남윤씨(海南尹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한강 강변 마현.../ 해피캠퍼스 | 2008.05.19(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行菊製科次于 誠正閣/ 洪大浩|尹毅東|洪致榮|徐淇修|李雨肅|申錫耆|徐有?|宋鎬|黃基天|李英秀|洪秉周|朴宗京|鄭東運|成?樞|尹▣|金敬淳|魚用默|朴宗臣|杜萬馨|鄭東濂|具重榮|申大奎|洪良浩|丁載遠|李觀成|丁載遠|李觀成|許?|丁載遠/ 2007.02.13(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다산 정약용의 교육사상 (5p)/ 부친 정재원(丁載遠)은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아가 지방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시파(근기남인 중 정조의 정치노선에 동조하고 사도세자를 동정하던 파)의 입장에 동조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정조가.../ 해피캠퍼스 | 2010.01.25(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정약용의 교육사상 (2p)/ 생애와 저술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은 한국 실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철학자로서 경기도 광주에서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미용(美鏞)이고,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輿猶堂)인데,.../ 해피캠퍼스 | 2009.12.15(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29p)/ *다산 정약용의 출생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아버지 정재원(羅州丁氏-荷石 丁載遠) 어머니 해남윤씨(海南尹氏) 사이 넷째 아들. 태어난 곳은 한강 강변 마현. 당시로는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해피캠퍼스 | 2009.11.12(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정약용의 사상, 생애, 교육철학 (3p)/ 생애 정약용(丁若鏞)은 1762년(영조 38) 8월 5일 경기도 광주 초부면 마현리에서 양반 가문인 정재원(丁載遠)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약용(若鏞)이고, 호는 다산(茶山)이라 하였다. 세상에서는 보통 그를.../ 해피캠퍼스 | 2009.10.19(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孟子要義/ 본관은 押海로 牧使를 지낸 丁載遠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은 南人系인데, 廣州郡 馬峴에서 태어났다. 1789년 28세로 文科에 합격하여 禧陵直長으로 관계에 진출하였다. 그 이후 成均館直講·弘文館敎理·修撰.../ 丁若鏞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2009.04.08(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채제공(蔡濟恭)/ 吳光運)|강박(姜樸)|채팽윤(蔡彭胤)|이덕주(李德胄)|정범조(丁範祖)|이헌경(李獻慶)|신광수(申光洙)|정재원(丁載遠)|안정복(安鼎福)|최헌중(崔獻中)|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유태좌(柳台佐)|홍가신.../ 2009.04.06(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이승훈(李承薰){1}/ 관련인물 :자술(子述)|만천(蔓川)|동욱(東郁)|이가환(李家煥)|정재원(丁載遠)|정약전(丁若銓)|약현(若鉉)|약종(若鍾)|약용(若鏞)|이벽(李檗)|그라몽(Gramont)|이벽|이가환|정약종|김범우(金範禹)|김범우|정약용.../ 2009.04.06(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교육철학 및 교육사)다산의 교육사상 (6p)/ 다산 정약용의 생애 1762(영조38)년 6월 16일 사시(巳時)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京幾道 廣州郡 草阜面 馬峴里) 즉 오늘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兒名.../ 해피캠퍼스 | 2009.01.29(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한국 漢詩 4수 감상 (14p)/ 정약용 (丁若鏞)(1) 생애(生涯) 다산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아버지 정재원(羅州丁氏-荷石 丁載遠)과 어머니 해남윤씨(海南尹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한강 강변.../ 해피캠퍼스 | 2008.12.29(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정약용) 다산 정약용에 대한 조사 (7p)/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9대를 연달아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에 들어간 명문집안,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자(小字)는 귀농(歸農), 자(字)는 미용(美鏞) 또는 송보(松甫), 호는.../ 해피캠퍼스 | 2008.08.04(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다산 정약용에 대한 소개와 그의 문학작품 세계 (7p)/ (1) 수학기(修學期) 다산은 1762년(영조38)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부친 정재원(丁載遠)과 모친 해남 윤씨(海南尹氏) 사이의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압해 정씨(押海丁氏)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해피캠퍼스 | 2008.06.07(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대학보고서] 누정건축(강진일대) (2p)/ 그는 남인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의 아들이며 이승훈(李承薰)의 처남이었다. 이로 인하여 다산은 순조 원년(1801)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해피캠퍼스 | 2007.12.21(daum 2010)
정재원 [專門資料] : 경차벽상운배정선몽대(敬次壁上韻拜呈仙夢臺)/ 세상사에서 떠나 이 곳 선몽대에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시판의 왼쪽 부분에는 이 시판이 만들어진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이 시판은 정호선의 6대손인 정재원(丁載遠)이 선몽대를 방문/ 진성이씨 백송파종중 | 2007.11.05(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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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