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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82-1:이학영(1793.6부임-1794이임)
작성자장병창 @ 2020.07.21 17:34:36

  예천고을원 182-1 : 이학영(1793.6부임-1794이임) : 서정평제를 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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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학영(李學永, 1745~?)은 1793년(정조 17) 6월에 김이호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1794년(정조 18)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결성 사람,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한산, 호조판서 태중(台重)의 아들, 복영․득영(문과)․극영․직영․익영(진사)의 동생, 목영(진사)의 형, 희선의 아버지이다. 부모 사후에 유학으로서 1783년(정조 7) 식년 진사시에 3등 49뒤로 합격하였다.

1793년(정조 17) 6월 14일 영남 암행어사 이상황이 임금에게 복명하기를,󰡒개령현감 이학영은 강직하고 엄격하며 분명하고 엄정함이 한 도에 으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승진시켜 벼슬을 주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군수 직에 으뜸으로 올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예천 군수로 부임하여, 몇년 전(1791)에 큰 비로 무너졌던 고평제를 봉급을 다 바쳐 가면서 쌓았다.

이 고평제는 1832년에 다시 무너졌는데 이를 다시 쌓을 때(1843)는 이학영의 손자로서 영의정(1866)이 된 송서 이경재가 경사도 관찰사 재임 중 도움을 주었다.

또 이 군수는 고평제와 함께 무너졌던 서정평제도 함께 쌓았다. 1845년에 세운 고평제사적비에는 `갑인임시방(甲寅臨是邦)' 이라고 하였다. 1804년(순조 4)에는 장성도호부사 겸 나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를 지냈다.

아들 희선(1775~?)의 자는 사후, 유학으로서 1804년(순조 4) 식년 진사시에 3등 41위로 합격하였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4-12-03)

 

  이학영(李學永) : 1793년(정조 17) 6월에 부임한 예천 군수이다. 1745(영조 21)-?, 결성(結城) 사람,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한산, 호조 판서 태중(台重)의 아들, 복영(復永)ㆍ득영(得永, 1722生, 字德之, 生員, 文科)ㆍ극영(克永)ㆍ직영(直永), 익영(翊永, 1741生, 字弼之, 進士)의 동생, 목영(牧永, 1748生, 字述之, 進士)의 형, 희선(羲先)의 아버지이다. 부모 사후(永感下)에 유학(幼學)으로서 1783년(정조 7) 식년 진사시에 3등 49위로 합격하였다. 1793년(정조 17) 6월 14일 영남 암행어사 이상황(李相璜)이 왕에게 복명하기를, "개령 현감 이학영은 강직하고 엄격하며 분명하고 엄정함이 한 도에 으뜸이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승진시켜 벼슬을 주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군수직에 으뜸으로 올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예천 군수로 부임하여, 몇년 전(1791)에 큰 비로 무너졌던 고평제(高坪堤)를 1794년에 봉급을 다 바쳐 가면서 쌓았다. 이 고평제는 1832년에 다시 무너졌는데, 이를 다시 쌓을 때(1843)는 이학영의 손자로서 영의정(1866)이 된 송서 이경재(松西李景在)가 경상도 관찰사 재임 중 도움을 주었다. 또 이 군수는 고평제와 함께 무너졌던 서정평제(西亭坪堤)도 함께 쌓았다. 1845년에 세운 고평제사적비(高坪堤事蹟碑)에는 "갑인임시방(甲寅臨是邦)" 이라고 하였다. 1804년(순조 4)에는 장성(長城) 도호부사 겸 나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를 지냈다. 아들 희선(1775生, 字士後)은 유학(幼學)으로서 1804년(순조 4) 식년 진사시에 3등 41위로 합격하였다.(司馬榜目)

 

  이학영(李學永) : 1793년(정조 17)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여 1794년(정조 18)에 이임하였다. 본관은 한산(韓山), 1794년에 봉급을 다 바쳐가면서 고평제(高坪堤, 醴泉邑高坪里)를 재건했다. 또 고평제와 함께 무너졌던 서정평제(西亭坪堤, 醴泉邑西本二里)도 함께 쌓았다. 1845년에 세운 고평제사적비(高坪堤事蹟碑)에는, "갑인임시방(甲寅臨是邦)"이라고 하였다.

 

  이학영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7년 2월 14일 (을유) 원본1314책/탈초본73책 (79/93) 1771년 乾隆(淸/高宗) 36년/ ○ 徐浩修, 以成均館官員, 以大司成意言啓曰, 依傳敎, 牌不進人等子壻弟侄, 限十年停擧, 在外人等, 只子弟停擧, 竝問名査出, 兪彦述子漢緯․漢紀․漢絅․漢維, 侄漢鼎․漢益․漢師, 鄭光忠子昌期, 壻李天穆․李昌漢, 申暐壻趙德泂․李學永, 朴取源子相鼎, 申大修子鼎周, 李得宗子相履․相謙, 壻趙載天․兪恒柱, 弟衡柱․景柱, 趙宗鉉弟廷鉉, 鄭好仁弟國仁, 洪景顔子大淵, 金履素弟履裕․履度, 金載天弟載久, 洪檢壻柳肅之, 金蓍耈子瑞鎭, 侄琦鎭等, 一倂停擧之意, 敢啓。傳曰, 知道。李得宗分揀。(www.history.go.kr 2008)

 

  이학영 [記事] : 승정원일기/ 정조 9년 6월 24일 (신축) 원본1585책/탈초본85책 (6/16) 1785년 乾隆(淸/高宗) 50년/ ○ 親政。吏批, 以朴?爲兵曹佐郞, 沈景文․崔弘毅爲司饔院主簿, 韓弘裕爲刑曹正郞, 金鼎郁爲判校, 趙廷獻爲掌樂院主簿, 尹?遠爲利仁察訪, 金必泰爲永陵令, 宋文述爲恭陵令, 趙宅鎭爲居昌府使, 洪元燮爲光州牧使, 沈公藝爲蔚山府使, 鄭?世爲長淵縣監, 李商五爲寶城郡守, 閔致愼爲价川郡守, 李集明爲長興庫主簿, 李英裕爲司圃署別提, 尹光碩爲司宰監直長, 沈公權爲禧陵直長, 鄭殷祥爲宗廟署直長, 徐簡修爲仁川府使, 沈?爲龍川府使, 林栽洙爲樂安郡守, 鄭泰曾爲光陽縣監, 具善啓爲居山察訪, 姜?爲社稷署直長, 李象鼎爲尙瑞院直長, 尹昌胤爲司宰監僉正, 高廷憲爲監察, 南羲老爲龍安縣監, 崔?爲燕岐縣監, 鄭赫爲郭山郡守, 鄭鍊爲濟州判官, 朴廷玉爲延日縣監, 金?淳爲軍資監奉事, 洪?浩爲禮賓寺奉事, 閔光升爲茂山府使, 申耆爲吏曹佐郞, 金履鎬爲戶曹正郞, 李齊淵爲泰仁縣監, 趙重鎭爲平康縣監, 尹煜爲司饔院僉正, 魏光翼爲漣川縣監, 申大億爲富寧府使, 朴喆源爲司饔院奉事, 李龜錫爲義盈庫主簿, 李景溟爲翼陵令, 黃世中爲熊川縣監, 趙濟魯爲兼弼善, 李錫祺爲幽谷察訪, 李亨基爲獻陵令, 趙廷獻爲東部都事, 李翊永爲報恩縣監, 任希敎爲靑松府使, 李澄萬爲龜城府使, 李英裕爲掌樂院主簿, 金鳳諧爲直講, 金履容爲慶州府尹, 具?爲端川府使, 李懋爲嘉山郡守, 盧廷良爲扶安縣監, 李敬進爲監察, 李禹昌爲定平縣監, 尹?爲尙瑞院副直長, 趙光逵爲加平郡守, 鄭大容爲刑曹正郞, 趙毅鎭爲遂安郡守, 韓光迪爲雲峰縣監, 李?爲漢城主簿, 李象鼎爲引儀, 李牧永爲司僕寺主簿, 趙祥逵爲掌樂院主簿, 金載翼․韓興裕爲典籍, 李時淵爲原州判官, 尹?爲尙瑞院直長, 安春君?爲冬至兼謝恩使, 李性淳爲尙衣院主簿, 李命暹爲尙瑞院副直長, 光州牧使洪元燮仍任前職爲戶曹正郞, 兪彦?爲光州牧使, 趙祥逵爲刑曹佐郞, 趙時偉爲大司憲, 鄭存中爲大司諫, 南涑爲濟用監副奉事, 羅東善爲典設司別檢, 李尙榮爲廣興倉副奉事, 洪周萬爲執義, 李是銓爲刑曹佐郞, 金致光爲社稷署令, 李端會爲三陟府使, 林元浩爲牙山縣〈監〉, 李象鼎爲義禁府都事, 金載升爲引儀, 鄭福煥爲扶安縣監, 趙雲紀爲典籍, 權坰爲長寧殿令, 李東仁爲慶基殿令, 韓用和爲白川郡守, 典籍金致泳․曺亨壽竝單付, 樂安郡守林栽洙, 德川郡守沈黙之相換, 崔時淳爲濟原察訪, 魚用謙爲金泉察訪, 李繼祜爲引儀, 金致性爲司圃署別提, 李學永․趙鎭大爲義禁府都事, 任光白爲長寧殿參奉, 沈周賢爲健元陵參奉, 金履脩爲寧陵參奉, 李趾源爲惠陵參奉, 李亨正爲明陵參奉, 趙鼎玉爲英陵參奉, 柳?爲思陵參奉, 鄭在寬爲莊陵參奉, 趙錫福爲(爲)典獄署參奉, 李嗣萬爲兼引儀, 鄭桓․吳彦儉爲假引儀, 尹之鉉爲??察訪, 姜?爲司諫, 李寬․柳匡天爲掌令, 朴?․鄭景祚爲持平, 金履鏞爲獻納, 金履翼爲正言, 盧廷良爲書狀官, 李尙訥爲靈巖郡守, 李秀夏爲孟山縣監, 奉常參奉高昇甲單付。(www.history.go.kr 2008)

 

  이학영 [記事] : 승정원일기/ 정조 10년 11월 11일 (신사) 원본1614책/탈초본86책 (28/30) 1786년 乾隆(淸/高宗) 51년/ ○ 丙午十一月十一日辰時, 上御熙政堂。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右承旨洪仁浩, 假注書洪樂貞, 事變假注書張錫胤, 記事官尹行任․李相璜, 領議政金致仁, 左議政李福源, 右議政金?, 行戶曹判書鄭一祥, 行刑曹判書鄭昌聖, 禮曹判書徐有隣, 行副司直徐有慶․李柱國, 工曹判書趙時俊, 開城留守尹蓍東, 行副司直徐有大, 吏曹參判李秉模, 江華留守趙鼎鎭, 副校理洪聖淵, 正言韓商新, 以次進伏訖。致仁曰, 日氣不適, 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自卿重卜, 頗覺省事, 曾以一以委卿之意, 言及於筵臣, 卿或聞之矣。致仁曰, 王大妃殿氣候, 若何? 上曰, 一樣矣。致仁曰, 昨日問安, 臣獨病未進參, 極爲惶悚矣。致仁曰, 惠慶宮氣候, 若何? 上曰, 一樣矣。致仁曰, 此濟州牧使李命俊, 災實分等狀啓也。以爲三邑穡事, 俱未免?, 大靜爲稍實, 本州爲之次, 旌義爲尤甚, 而?賑一款, 姑不擧論。將觀開春民情, 追後狀聞計料, 而男丁大同米, 每口五升, 全數?減, 畓租尤甚處折半, 之次三分一代捧。各寺奴婢身貢米, 依近例二斗內, 減一斗, 旌義縣尤甚十二里還上折半代捧, 舊還則新還尙難准捧, 一時竝督, 行之不得, 姑爲停止。軍兵操鍊, 姑令停退, 待明春從附近哨司操鍊, 凡諸擧行等節, 固當登聞, 恭俟處分。而候風往來之際, 動費數朔, 故敢援前例, 先此擧行, 事涉擅便, 誠極惶悚, 竝令廟堂稟處矣。大同?減, 尤甚處代捧身貢米減捧, 舊還停止, 軍兵操鍊停退等事, 自前先擧行後狀聞, 例也, 今無稟處之事, 三邑分等, 依狀請施行,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致仁曰, 此咸鏡監司鄭民始狀啓也。以爲臣營屬親率除番收錢, 其數爲九千番, 錢爲一兩, 付之軍需等庫, 以爲營中應下之資矣。甲申改詳定時, 減爲五千四百名, 而除其應?, 則納錢實數爲四千六百餘名, 以需用不足之故, 番錢增爲一兩五錢, 其所增加者, 爲二千餘兩。今若依前減除, 則應下無以充給, 且獨鎭壯砲軍, 以其資裝之自辦赴操, 元無錢布之徵, 而本營物力凋殘, 將校?料, 無路周給。創出收斂之法, 一名所納, 幾爲一兩, 每年收斂, 雖禁其過濫, 猶當爲數三千兩, 今欲革罷, 則將官接濟, 無以給代。亦欲仍置, 則民將不堪, 臣營所管營賑穀實數爲二十一萬餘石, 耗條中, 每年折米二千石, 特許劃給還減。親率番錢, 永罷壯砲收斂, 而以穀作錢, 則當爲六千兩, 以五千餘兩, 充補於親率壯砲?弊之數, 餘數則屬之軍器庫, 以爲每年添造之資事, 請令廟堂, 稟旨分付矣。親率之加捧番錢, 壯砲之許多收斂, 實爲一邑痼弊, 道臣之必欲矯?者, 蓋不得已, 但此兩款事, 皆係朝家之所不知。甲申減額, 未必無商量, 則番錢加捧, 已甚無謂, 軍兵收斂, 朝禁本嚴。爲將校入番之料, 公會之供, 徵捧錢米於無依之類者, 未知創自何時, 而一道臣, 容易犯科。及其弊端轉深, 奸竇莫杜, 則反請朝家之區劃, 朝家無所責飭, 又從而許施, 則其於事面何如也? 雖以本道穀物言之, 營賑之外, 本自不敷, 營賑之中, 正穀尤少, 二千石折米, 以皮穀則當爲六千包之多, 逐年割出, 其數至何? 若或不幸而値設賑之時, 則逐口計糧, 尙患不足, 科外劃給, 恐不可輕議也。此道臣, 素稱精簡, 而其說如此, 則爲弊之滋甚可知, 其所矯?, 惟在道臣, 使之博採衆議, 細究事宜。或仍舊貫而減其冗費, 或就本役而求其方便, 從長釐正, 期於矯?之意, 分付,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致仁曰, 此統制使柳鎭恒狀啓也。以爲本營壯士支方之節, 實爲目下最急之務, 而通計三南應入之耗條米, 爲四千五百石零, 皮穀一萬三千九百五十四石零。支方應下之數則米爲二千六百七十八石零, 皮穀爲二萬四千一百九十五石零, 以此所入, 較彼給料之數, 則大不相當。從前支放之區劃, 專取嶺沿, 故沿邊所儲, 逐年耗損, 時存元穀, 雖盡數取來, 不能當一年料需, 而且今年嶺沿, 已有分數停退之令。則本穀耗條之比前大縮, 勢所必然, 而本營會內外穀之在道內山郡及兩湖邑鎭者, 難以載運, 作錢移貿, 自多耗費。見今本道沿邑, 常賑穀留庫之數, 旣甚?然, 就其中, 以本營山郡穀二萬石, 從便相換, 則此是衙門號名之移換而已。在常賑旣無所損, 實爲萬幸, 相換一款, 特令廟堂, 稟旨分付, 以爲支放區劃之地爲請矣。沿邊穀物, 近益?然, 誠非細悶, 而統營事勢, 亦不可不念, 常賑穀相換, 旣有已例, 所請二萬石內, 特許折半移換, 而只取耗條, 以補支放之需, 元穀則勿令犯用, 以備不虞爲宜, 以此分付,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致仁曰, 先儒之言曰, 勤政勤學, 事無二致, 殿下, 博學稽古, 六藝經傳, 皆是茶飯, 萬機之暇, 必不廢縕繹, 何資於區區講討而然? 維持此心, 緝熙聖學, 捨此則無所賴矣。大臣諸臣, 亦或言之, 承允可之敎, 而終無其效, 則此亦爲杜塞言路之一端也。近來三講久廢, 玉署便成冗員, 自頃以後, 多故所致, 而進講稀闊, 不如課試輪對之如期輒行, 其於輕重本末, 未免倒置。卽今則雖値祈寒停講之時, 頻行召對, 詢諮討論, 此後講筵, 罔或間斷, 而必以踐履服行爲要, 毋徒歸於應文之科焉。上曰, 當體念矣。出擧條 致仁曰, 殿下臨御以來, 勵精圖治, 宵?靡懈, 宜其功成治定久矣, 而每讀絲綸, 以治不?志, 輒勤聖憂。此誠群下不能承佐之罪, 而見今世道之淆?, 朝象之泮渙, 月異歲加, 殆無餘地, 眞如聖上百尺竿頭之敎矣。言路杜絶, 士節??, 凡於緩急, 無所可恃, 國勢至此, 寧不寒心? 目下年穀之??, 財用之?竭, 猶屬餘憂, 臣冒羞膺命, 茫然如漏船梢工, 無以着手。歷?十年之間, 不無一二言事者, 殿下一皆聽納, 未常見有?折, 而三司故紙之外, 無不?黙者, 此其故何哉? 其於彰?之典, 亦嘗留心, 凡所扶植培養, 可謂至矣, 而顧今習俗日以汚下, 祖宗朝盛際尙矣, 比諸嗣服之初, 亦不?落幾層, 此其故何哉? 臣固屛伏, 世事聾?, 而私自妄度, 竊謂聖上導率失要, 規度未立而然。惟其如是也, 故彬郁之治, 非不爛然聳聽, 而敦實篤厚之風, 漸至消剝, 摠攬之治, 非不赫然動人, 而姑息?泄之患, 寢成膏盲。或至於擧措之際, 偏私莫掩, 用捨之間, 好惡乖宜, 窺?彌巧而紀綱自紊, 趨和成習而名檢掃如, 馴致於莫可收拾之境, 則所謂世道之淆?, 朝象之泮渙, 固無足怪也。爲今之計, 豈有他術可以?藥? ?有奮發聖慮, ?然改圖, 視作一初, 誠心做去, 洞開不諱之門, 益恢翕受之量, ?群下曉然知聖意之堅定, 則孰敢不精白?勵, 以對揚休命也哉?

 

  上曰, 當體念矣。出擧條 致仁曰, 恩數之屑越, 非古明王受嚬笑之道, 以臣情勢, 豈宜一日冒出, 而聖意在於敦迫必致, 故恩禮之隆摯, 辭敎之過中, 曠絶千古。重臣崇宰, 絡續相守, 畢竟不敢聞之敎, 頻複?下, 王言之失, 尤非細故, 緣臣無狀, 仰貽過擧, 乃至於此。臣固惶悚無地, 而殿下, 亦宜?加警察, 深存不遠不貳之戒焉, 抑臣因此而有可仰達者矣。愼惜名器, 謹守舊章, 實爲今日?弊之一端, 名器濫故, 浮?躁競, 歲加月增, 人皆喪失其本心, 只知惟利是趨, 而不肯守分, 則其弊, 當至於何境乎? 殿下所以處之者, 亦不免漸不如初之歎臣竊悶焉。舊章壞故, 如竄配遠竄邊遠極邊之界分甚明, 楸․黑․耽三島, 非特敎勿配, 本有令甲, 古所謂法者, 天下平也。雖天子, 不得以低仰者, 而今則操縱闊狹, 惟在獄官之手, 此豈非大可懼者乎? 雖以推榮一事言之, 侍從父推恩, 須是所後父, 無可施處, 然後移施于生父者, 卽法典所載, 而近來則或有無他端而移施者。有適子者, 無適孫是禮也, 三十以前, 不得除職是法也, 而一皆蕩然, 今雖不可歷數追理, 而此後則隨飭在廷, 申明舊章。至於院額贈官贈諡等恩典, 雖是褒忠獎節之美事, 亦宜有斟酌, 而凡有陳請, 批以稟處該曹, 輒皆一例請施, 又或以堂下而直贈正卿, 此無前之事也。一事二事, 虧乖至此, 臣實憂慨, 亦不可不深留聖意處也。上曰, 所陳諸條, 無不至當, ?當體念, 而卿亦以此意, 申飭有司, 期有實效, 可也。出擧條 致仁曰, 人君之敬禮大臣, 非爲其人, 人之視大臣重而後, 大臣亦知自重, 此九經之義也。臣頃伏見朝紙所出, 右相有一二陳戒, 而自上不惟不賜開納, 至以卿何必如是爲言爲敎, 此恐爲王言之失。旣在其職, 則君德闕失, 大臣不言, 而孰可言之乎? 假使言有不槪, 只當優容而已。殿下之待大臣如此也, 故大臣爲人所輕, 而朝廷之不尊, 體統之不嚴, 未必不由於此等。臣不可以身?大臣, 懷嫌不言, 故敢此仰達。伏望自今深留淵衷, 改下前日批敎, 以光聖德焉。上曰, 卿言好矣, 原擧條還入, 更當下批矣。致仁曰, 頃日左相所被嚴敎, 不出朝紙, 臣固不能詳知, 而大臣有罪, 則罪之, 可也, 斥之, 可也。而乃殿下不爲顯加罪斥, 只使大臣, 窮?罔措, 不得任其去就, 亦有違於古聖王禮使之道。臣耿耿憂慨, 竊附無隱之義, 仰備日後之戒, 惟聖明, 俯察而加意焉。上曰, 卿言亦好矣, 當體念。出擧條 致仁曰, 筵說秘諱, 爲今日痼弊, 雖以臣耳目所覩記言之, 在前則朝經入侍, 夕已傳說, 苟或奏對失宜, 則?論者有之, 事涉處義, 則疏引者有之矣。筵說有可諱有不必諱者, 而一切諱之, 不敢出口, 未有如今日之甚者也。是以廷臣, 擧懷疑懼之心, 已非細悶, 而或自謂獨知, 而賣權之漸, 安知不源於此乎? 筵體不嚴, 猶屬細事, 此係矯?弊風, 鎭靜世道之大端, 惟聖明明諭群臣, 一變近規, 使朝野改觀, 則實國家之幸也。上曰, 救弊之擧, 反歸生弊, 矯?之方, 當留念矣。出擧條 致仁曰, 人臣告君之辭, 雖務積誠意, 直陳無隱, 難望其自上必從, 況反是乎? 頃日堂箚之討金宇鎭也, 以所檢擧者, 豈其本情爲言? 臣始甚?然, 追聞知其指尹光普․趙濟魯而言也。此兩人, 卽近日政注間?擬者, 而宇鎭獨政, 竝爲檢擬彼儒臣, 眞以爲非其本情, 而勉從他人之言乎? 意東言西, 疑亂聰聽, 遣辭窘遁, 用意崎嶇, 不料論思之列, 至有此等言議, 不可無警飭之道。伊日參箚玉堂, 竝罷職,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致仁曰, 聖人曰, 必也正名, 名不正則苟而已矣。宮園稱號, 卽我先朝定制, 其所別爲隆奉之擧者, 誠以毓慶之地, 所重有在也。若謂地閥有異, 則列朝嬪御, 不無高門盛族, 而不敢議到者, 可見法意之嚴也。向來仁明園改稱之論, 出於一二章疏, 而未承批敎, 蓋伊時議者, 以皇朝事爲言, 而是固天朝之制, 宜不敢證援。我朝典章, 則雖以儲君位號之重, 亦未嘗稱園, 而獨於本園, 創加例外之儀, 則揆以事例, 寧不未安? 宮號亦然, 事關國家典禮, 合有一番議正, 今日僚相, 皆入侍, 下詢而處之, 何如?

 

  上曰, 左右相之意, 何如? 福源曰, 領相所奏, 實有援據, 旣知其有違典禮, 則恐宜?卽釐正矣。?曰, 此事, 不但合速釐正, 向於宰臣疏後, 旣有下敎, 而尙無廟堂稟處之擧, 此則責在臣等不勝慙悚, 更不可留難咨且矣。上曰, 中朝故事, 不足旁引云云。領相之言, 旣出守經之論, 旣知其當改, 則何拘銷刻之嫌? 依領相所奏, 施行, 可也。致仁曰, 降號等節, 令該曹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福源曰, 臣眼視不明, 精力漸耗, 無一事仰贊?化, 至若兼帶, 亦非閑漫之務, 軍門雖有將臣, 入啓文字, 亦皆句管, 譯院雖有提擧, 循例等第, 許久稽滯, 極爲悚悶矣。上曰, 所辭過矣, 大臣重任, 豈可輕議許副? 上曰, 御營廳褒貶不行, 今爲幾年? 柱國曰, 今至四年矣。上曰, 此甚可悶矣。?曰, 左相兼帶辭免, 不過因眼視之不明, 而若臣之兼帶, 皆是莫重之地, 有不敢承當矣。上曰, 卿言過矣, 卿若以尊敬之地, 難於供職云爾, 則他大臣, 亦不如是爲言乎? 卿之所辭, 近於失言矣。致仁曰, 臣之所奏敬禮之義, 非爲僚相兼帶辭免之地也。如臣老劣, 冒據鼎席, 乞賜斥退, 改卜賢德, 區區之望也。上曰, 前領相, 每於筵席, 以改卜賢德爲言, 故予曾曰, 以人事君, 大臣之責, 必也薦進賢德, 然後卿可辭免云爾, 則伊後, 更無筵席控辭之擧, 此足爲中書美談矣。致仁曰, 僚相兼帶辭免, 似若緣臣而發, 極爲不安矣。上曰, 有都提擧衙門, 首相皆爲兼帶, 古例則然, 且予所聞古事, 卿之先卿, 爲首相也。凡有廟謨, 一誠擔當, 左右相則只是協贊云。元輔之體重, 固如是矣, 卿之趾美, 亦在此等處矣。況今兩相之辭免兼帶, 可見推讓之風, 則予當成其美矣。仍命書傳敎曰, 陳懇若此, 左相兼帶司譯都提調許副, 右相兼帶宗廟都提調, 亦爲許副。致仁曰, 臣聰聽眼視, 已無餘地, 尋常事爲, 十遺其九, 誠有?誤之慮, 至於簿書期會, 實賴僚相及有司堂上之分勞矣。上曰, 予之所以休養心神, 亦賴卿在耳。卿以敬大臣爲初筵第一義, 而予自大典通編總裁之時, 注意於卿, 則當此重卜之後, 親近尊禮, 竝行不悖。卿須恃而無恐, 安心做去, 則臥閤論道, 自無所妨, 筋力奔奏, 尤不必責, 向者批旨中, 逸於任人云云。蓋出委卿之意, 此是規模之大者, 外此不過節目間事矣。予自五月以後, 觸處?懷, 寶齡適符於先朝戊申, 而筋力凡節, 不及先朝萬萬矣。卿若總察百務, 得免叢?, 則豈非國家之幸乎? 致仁曰, 聖敎及此, 感泣無地矣。上曰, 十數年來, 朝象世道, 不成貌樣, 左思右思, 橫看?看, 不可不爲矯?之方, 故必致卿中書, 倚以爲重, 欲使諸宰, 矜式于卿也。致仁曰, 責成之敎, 相須之意, 固仰聖念之攸在, 而第臣旣非其人, 且今老?無能, 顧何可以仰副聖意之萬一乎? 上曰, 俄者卿所奏窺?云云。所謂時體也, 目今弊源, 皆在於此, 卿若擔當矯?之道, 易如反掌耳。卿試思之, 丙申後至庚子前, 則初無規模凡節之可言, 庚子後, 則徐判府, 久於鼎席, 而今旣許其全保, 豈可更使顚沛乎? 如是之故, 廟堂之上, 全不成樣, 比如人家無幹家之人, 十年以來, 如是度了, 此予所以强起卿於元輔之任也。卿豈不知予心乎? 致仁曰, 聖敎縷縷, 尤是微臣之所不敢當矣。上曰, 近來時任大臣之子, 輒於銓任, 看作應避之嫌, 卿意以爲, 如何? 致仁曰, 大臣子之爲銓官者, 私心雖或不安, 在朝家則不必曲從, 況亞堂比長銓尤有間, 而且有曾前行公之例矣。今若自上許遞, 則此後其將認爲定式, 必遞後已, 此不可不念也。上曰, 卿言節節果是, 近來人, 太不識似此格例, 以筵話, 出擧條, 此後申飭, 可也。出擧條 昌聖曰, 近來民習, 巧詐莫甚, 所謂血書, 間或有之, 而若非父母及其身陷刑戮者, 則決非容易可爲矣。日昨有尙州人擊錚原情, 以血書納, 若以雜血, 則誣罔之狀, 誠爲可惡, 取諸其身, 則大不近於人情。山訟異於刑戮, 肢體豈可輕毁? 事係四件, 故雖已依例上達, 此等之習, 不可不嚴懲, 當該人方自臣曹科治, 而此後雖四件事, 血書者, 勿施之意, 嚴飭, 何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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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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