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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242-9:이범익(1916.부임...1919.5.18.이후 이임)
작성자장병창 @ 2021.04.21 06:38:03

  예천고을원 242-9 : 이범익(1916부임-1919.5.18이후 이임) : 삼익수도 공적비를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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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범익 [記事] : 한국사연구휘보/ 한국사종합논저목록 / 제목 僞間島省長李範益 / 저자/편자 常德 역자 시대 근대 / 게재지 僞滿人物 페이지 605-607 구분 논문 / 발행처 吉林人民出版社 발행지역 吉林省 발행일 1993(www.history.go.kr 2008)

 

  이범익 : 醴泉郡 특종소작 기타에 관한 건 회답/ 상위서지: 特種小作 기타에 관한 건/ 서명: 特種小作 기타에 관한 건/ 저자: 조선총독부 中樞院/ 분류: 도서 > 조사?통계자료 > 중추원조사자료/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중추원조사자료/ 特種小作 기타에 관한 건 [醴泉郡 특종소작 기타에 관한 건 회답] (1918-07-02, 醴泉郡守 李範益)/ 1.특종소작 관습/ 2.入會 관습/ 3.개간소작 관습/ 4.借家 관습//

 

  이범익 : [醴泉郡 특종소작 기타에 관한 건 회답]/ 상위서지: 特種小作 기타에 관한 건 > 醴泉郡 특종소작 기타에 관한 건 회답/ 서명: 特種小作 기타에 관한 건/ 저자: 조선총독부 中樞院/ 분류: 도서 > 조사?통계자료 > 중추원조사자료/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중추원조사자료/ 문서제목 [醴泉郡 특종소작 기타에 관한 건 회답]/ 문서번호 慶北醴泉財 제1858호/ 발송자 醴泉郡守 李範益/ 발송일 ( 1918년 07월 02일 )/ 수신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醴泉郡 특종소작 기타에 관한 건 회답]/ 慶北醴泉財 제1858호/ 大正7년(1918) 7월 2일/ 醴泉郡守 李範益 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귀중/ 특종소작 기타에 관한 건 회답/ 올해 6월 12일 朝樞發 제150호로 조회하신 위 제목의 건을 조사하였더니 아래와 같았으므로 이를 회답합니다./ 記//

 

  이범익 : 朝鮮總督府 郡守 成斗植을 南海郡,/ 상위서지: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3권/ 서명: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3권/ 날짜: 1916-02-17/ 분류: 도서 > 편년자료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제목 朝鮮總督府 郡守 成斗植을 南海郡,/ 년월일 1916-02-17/ 주제분류 정치,행정 > 정치,행정(조선총독부) > 지방행정,관서 > 군수/ 출전 朝鮮總督府官報 1916.2.19/ 내용 : 朝鮮總督府 郡守 成斗植을 南海郡, 同 孫之鉉을 慶山郡, 同 朴英鎭을 聞慶郡, 同 李命源을 盈德郡, 同 李範益을 醴泉郡, 同 李容漢을 達城郡, 同 金翰殷을 漆谷郡, 同 李瓚永을 居昌郡, 同 金泰興을 昌原郡, 同 兪相範을 統營郡에 在勤을 命하다./ 朝鮮總督府官報 1916.2.19//

 

  이범익(李範益) : 구분: 한국근현대인물자료/ 날짜: 1883-10-15| 1883-11 |1/ 분류: 인물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이름 이범익 ( 李範益 )/ 민족구분 한국인/ 본관지 1) 全州/ 생년월일 1) 1883-10-15, 3) 1883-11-99,/ 출신지 1) 忠淸北道 丹陽郡 丹陽面(원적), 2) 忠淸北道 丹陽郡 丹陽面 下坊里(원적)/ 현주소 1) 漢城 北署 觀光坊 大安洞契 古里井洞 第三十六(四十五)統 第四戶, 2) 漢城 北署 大安洞 第三十六統 四戶, 3) 江原道 春川邑 官舍, 4) 忠淸南道 大田知事 官舍/ 가족관계 부 1) 李瑗夏(관리)의 장남/ 가족관계 배우자 1) 洪順子(1884년 12월 생. 洪承五의 딸)/ 가족관계 자녀 1) 양자 李興鍾(1911년 8월 생. 中央佛敎專門學校 졸업)/ 가족관계 기타 1) 동생 李範觀은 忠淸北道 鎭川郡守로 근무 중/ 학력 1) 1890년 修學家塾, 1898년 9월 入學外國語學校, 1902년 12월 日語普通科卒業, 2) 外國語學校를 졸업/ 경력및활동

 

  1) 1903년 5월28일 任外國語學校敎官 敍判任六等, 1904년 2월 普光學校敎師, 6월 學部事務見習, 1905년 9월27일 命日本國陸軍省陸軍通譯, 10월27일 入學明治大學法學科校外生, 1906년 3월29일 任度支部?譯官補 敍判任官七級, 5월16일 辭普光學校敎師, 동28일 依免度支部?譯官補, 10월23일 敦明義塾講師, 1907년 3월5일 任度支部建築所技師 敍奏任官四等七級, 동 8일 依免日本國陸軍省陸軍通譯, 6월15일 依免度支部建築所技師, 동26일 任農商工部書記官 敍奏任官四等七級, 8월1일 囑托京城博覽會顧問, 9월6일 陞六品 進封 皇后時擧冊案執事, 동17일 囑托平壤?業所事務, 동25일 囑托京城博覽會審査官, 1907년 현재 農商工部書記官六品, 2) 1903년 5월28일 任外國語學校副敎官 判任六等, 1905년 3월29일 轉任度支部?譯官 補判任七級, 5월28일 依願免本官, 1906년 3월5일 任度支部建築所技師 奏任四等七級/ 6월15일 依願免本官/ 동26일 任農商工部書記官 奏任四等七級/ 3) 1920년 9월에 家督을 상속받음/ 1903년에 外國語學校 부교관/ 1904년 9월에 陸軍通譯/ 1907년 6월에 農商工部 서기관/ 1908년 1월에 農商工部 秘書官/ 1908년 6월에 內部 書記官 겸 秘書官/ 1912년 10월에 江原道 春川郡守/ 1921년 2월에 朝鮮總督府 道事務官으로 승진/ 1924년에 黃海道 內務部長/ 1927년 6월에 慶尙南道 參與官/ 1929년 11월에 江原道 知事로 임명되어 오늘날(1935년)에 이름/ 러일전쟁 때의 공로로, 1908년 2월에 공로금 80원을 하사받은 적이 있음/ 從4位 勳3等/ 4) 1903년 외국어학교 副敎官, 1904년 9월 陸軍 통역, 1907년 6월 農商工部 書記官, 1908년 1월 農商工部 秘書官, 같은 해 6월 內部書記官 겸 秘書官으로 되었다. 1912년 10월 江原道 春川郡守에 임명되었으며, 慶南 金海, 慶北 達城, 醴泉, 漆谷 등 각 군의 郡守를 역임하였고, 1921년 2월 總督府 事務官으로 자리를 옮겼고, 1924년 10월 黃海道 內務部長으로 발탁되었다. 1927년 6월 慶南 參與官, 1929년 11월 江原道 知事로 승진하고, 1935년 2월 忠淸南道 知事로 영전하여 1935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忠淸南道知事/ 從4位 勳3等/ 1911年 7月 31日 任 朝鮮總督府屬 內務部 勤務/ 1912年 10月 14日 任 朝鮮總督府 郡守 敍 高等官 7等 江原道 春川郡 在勤. 12月 28日 敍 從7位/ 1914年 12月 22日 陞敍 高等官 6等/ 1915年 3月 20日 敍 正7位. 11月 10日 大禮記念章 授與/ 1919年 10月 27日 陞敍 高等官 5等. 12月 20日 敍 從6位/ 1920年 6月 25日 敍 勳4等 授 瑞寶章/ 1921年 2月 12日 任 朝鮮總督府 事務官 敍 高等官 5等 內務局 勤務/ 1922年 3月 31日 陞敍 高等官 4等. 5月 10日 敍 正6位/

 

  1924年 10月 30日 陞敍 高等官 3等. 12月 25日 任 朝鮮總督府 道事務官 敍 高等官 3等/ 1925年 1月 31日 敍 從5位/ 1927年 6月 2日 任 朝鮮總督府 慶尙南道 參與官 敍 高等官 3等/ 1928年 6月 25日 敍 勳3等 授 瑞寶章. 11月 16日 大禮記念章 授與/ 1929年 1月 21日 陞敍 高等官 2等. 3月 1日 敍 正5位. 11月 28日 任 朝鮮總督府 江原道知事 敍 高等官 2等/ 1931年 9月 30日 陞敍 高等官 1等/ 1932年 4月 1日 敍 從4位/ 인물평외모 1) 가득찬 패기를 안에 숨기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기가 살아나지 못할 형상이며 조선인 관리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인물로, 어느 것에 대해서도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쉽게 타협하지 않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충분히 검토한다. 항상 당당한 논리를 펼치며, 결코 적당히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머리도 에리하고 배짱도 있어서 어느 곳에 나가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의논을 올리고 지시할 수 있는 균형잡힌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黃海道 內務部長 시절에는 지방 유지와 크게 격론을 벌였던 일도 있다. 투지도 가장 왕성하였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慶南의 參與官이 되고나서는 조금은 날이 무디어졌다. 産業部長으로서 분투할 때는, 그가 없었더라면 .... 이라고 생각될 때도 많았다. 이 무렵부터 長者다운 수양을 쌓았다고 할만한 인격도 그만큼 연마되었을 터였다. 江原道知事로서도 그의 명민한 두뇌는 십분 발휘되어 대단한 수완을 보였다. 때문에 중간 중간에 온화해졌다고 하는 평판이 나왔던 것이다. 예리한 머리로 계획하고 배짱을 가지고 열렬히 실행하기 때문에 십분 효과를 발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慶南北에서는 각지에서 군수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젊었기도 했지만 넘칠 정도의 원기와 패기가 있었기 때문에 감독관청을 꼼짝 못하게 하는 일도 많았다. 그것이 연마되어 수완있는 知事로 평판을 얻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관원이력(대한제국관원이력서) 39, 인사흥신(조선인사흥신록) 533, 조선공로자(조선공로자명감) 39, 기념표창자(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 667//

 

  이범익(李範益) / 기요하라 노리에키(淸原範益) : 구분: 한국역대인물자료/ 날짜: 1883/ 분류: 인물 > 한국역대인물자료/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이범익(李範益)/ [요약정보]/ 시대 조선 후기/ 본관 전주(全州)/ 성 이(李)/ 기타 인명 기요하라 노리에키(淸原範益)/ 성별 남/ 생년 1883/ 활동분야 친일파/ [상세내용]/ 이범익(李範益)에 대하여/ 1883(고종 20)∼?. 조선 후기의 친일파. 본관은 전주(全州)./ 부친은 이원하(李瑗夏)이고, 처는 홍승오(洪承五)의 딸 홍순자(洪順子)이다. 충북 단양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1903년 외국어학교 일어보통과를 졸업하고, 외국어학교의 교관, 일본 육군성 육군통역, 보광학교 교사, 경성박람회 고문과 심사관 등을 거쳐 농공상 서기관이 되었다. 이 때 농상공부대신인 매국노 송병준의 비서관이 되어 함께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 후 춘천(春川)·김해(金海)·예천(醴泉)·달성(達城)·칠곡(漆谷) 등의 군수를 지냈다. 1923년에 일제 조선총독부 사무관을 거쳐 황해도 내무부장과 경상남도 참사관, 강원현의 현장, 충청남도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1932년 11월부터 한국 국민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전개한 자력갱생운동인 정신작흥운동(精神作興運動)에 강원도도지사가 되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황국신민화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1935년에 중추원 참의원과 동양척식회사의 감사직을 거쳐, 1937년 7월에 만주의 초대 간도(間島) 성장으로 임명되었다. 간도 성장으로 취임 후 만주제국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치안유지를 강화하여 항일 무장 세력과 그 가족들에 대한 포위 토벌과 박해를 감행하였다. 1938년 9월 15일 일제 조선총독부에 조선청년들로 결성된 특설부대를 간도에 조직할 것을 제의하여 간도성 특별 부대를 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관동군사령부 및 만주국군과 합동으로 간도 일대의 항일무장 역량에 대한 포위토벌을 진행하였다. 더불어 만주제국 조선척식회사에 의뢰하여 만주지역으로의 우리 민족 이민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또 성내에 있는 산림과 광산자원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자원보유량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를 벌이고, 탄광의 채굴, 농업합작사를 증설하여 농촌경제에 대한 공제를 강화하는 등 일제에게 자원 약탈의 조건을 제공하였다. 한편 그는 각종 언론기관과 간도성 협화회 조직을 이용하여 일본-만주 친선, 일본-조선 일체 등을 선전하여 우리민족을 기만하고 사상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학교에 일본인 교원을 증원하고 일본어 수업을 보급하고 왜곡된 교과서도 편찬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학생들에게 노예화 교육을 강화하여 우민교육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시도한 일제 식민 정책의 일환이었고, 그는 대표적인 꼭두각시 인물이었다. 1940년 5월에 만주제국 참의부 참의로 취임하였지만 광복 후에 간도 부성장 윤태동(尹泰東)과 함께 소련 홍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참고문헌]/ 大韓帝國官員履歷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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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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